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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연중 제20주일>(23.8.20)'겸손한 믿음!'


<연중 제20주일>(8.20)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15,28)

'겸손한 믿음!'

오늘 복음(마태15,21-28)은 '가나안 여자의 믿음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을 때, 한 이방인 여자인 가나안 부인이 나와 호되게 마귀가 들린 자기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그런데 그녀는 예수님으로부터 세 번의 무시를 당합니다. 가나안 여인의 첫 번째 무시는 그녀의 소리를 들으시고도 '한마디도 대답하시지 않음'입니다. 두 번째 무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15,24) 라는 무시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무시는 그녀가 강아지 취급을 당한 무시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15,26)

참으로 놀랍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완전 개 취급 당하는 무시 속에도 예수님께로 향한 그녀의 신뢰(믿음)는 변함없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15,27)

예수님께서 그녀의 겸손한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15,28) 바로 그 시간에 호되게 마귀들렸던 그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겸손한 믿음을 봅니다. 세 번에 걸친 완전 무시에도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을 봅니다. 이 겸손한 믿음, 큰 믿음이 바로 구원에 필요한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여러가지 기도와 신심행사에 열중하고 육신의 많은 극기와 고행을 하면서도, 자기에게 해가 될 듯한 말 한마디만 듣거나, 혹은 어떤 것을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우리들은 아닌지?' 

겸손한 믿음이 되어봅시다! 

(~ 코헬 2,26)

가나안 여인의 겸손한 믿음을 봅니다. 세 번에 걸친 완전 무시에도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을 봅니다. 이 겸손한 믿음, ******* 큰 믿음이 바로 구원에 필요한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15,28)

'겸손한 믿음!'자체로 순진한 순수함이 되어봅시다! 아멘 !!!

<성 비오10세 교황 기념일>(8.21)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19,21) 

'버려야 할 것들!'

오늘 복음(마태19,16-22)은 '하느님 나라와 부자에 관한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묻습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그에게 지켜야 계명들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19,21)

그 젊은이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슬퍼했을까?
오히려 기뻐해야 하지 않는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알게 되었으니.

재물이 많은 부자 젊은이는 그 재물을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보다도, 영원한 생명보다도 돈을 더 좋아하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집작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놓고 싶지 않고, 잃고 싶지 않아서 꽉 잡고 있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이 돈일 수 있고, 권력과 명예일 수도 있고, 그것이 또한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약점들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 약점을 건드리면 발끈하거나 평정심을 잃게하는 아킬레스건과 같은 약점들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의 이러한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꽉 잡고 있으면서 슬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내려놓고 기뻐하는 사람이 됩시다! 

(~ 아가 3,5)

내가 집작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놓고 싶지 않고, 잃고 싶지 않아서 꽉 잡고 있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이 돈일 수 있고, 권력과 명예일 수도 있고, 그것이 또한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약점들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 약점을 건드리면 발끈하거나 평정심을 잃게하는 아킬레스건과 같은 약점들 말입니다.-'버려야 할 것들!' 찾아서 주님게 봉헌해야 겠습니다
 나의 이러한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꽉 잡고 있으면서 슬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내려놓고 기뻐하는 사람이 됩시다! 아멘 !!!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8.22)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마태19,23) 

'부자의 의미!'

오늘 복음(마태19,23-30)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인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 의미로만 받아들인다면, 부자는 구원에서 영원히 제외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그럴까?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들은 비유적, 은유적 표현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자라는 단어에 숨겨져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돈과 재물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계명을 실천할 때 받는 복입니다. 

하지만 돈과 재물에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바로 안주의 유혹이고, 우상숭배의 유혹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자기소유로만 하는 유혹과 돈과 재물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우상숭배의 유혹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이런 유혹을 경계하라.'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이 단순히 돈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 돈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19,27)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19,29-30) 

(~ 지혜 8,8)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0주간 수요일>(8.23)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20,16)

오늘 복음(마태20,1-16)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주인이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고용하는 내용과 고용된 일꾼들에게 품삯을 나누어 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포도밭 주인이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한 데나리온의 일당으로 고용합니다. 이른 아침에 고용된 사람이 있고, 아홉 시와 열두 시, 그리고 오후 세 시와 다섯 시에 고용된 사람이 있습니다. 

일을 마치고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일꾼들에게 품삯을 내 줍니다. 맨 마지막에 고용된 일꾼들부터 시작해서 첫째로 고용된 일꾼들에게 합의한 대로 한 데나리온 씩 내 줍니다. 

그런데 맨 먼저 온 이들이 불만을 드러냅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러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20,15)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20,16) 

오늘 비유를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구원은 순서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먼저 부르심을 받았다고 구원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은 꼴찌도 첫째가 될 수 있는 구원입니다. 지금 꼴찌지만 지금 회개하면, 지금 깨어 있으면, 언제나 첫째가 될 수 있는 구원입니다. 그러니 오래 전에 세례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하더라도 지금 깨어 있지 않으면 꼴찌가 됩니다. 

모든 움직임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시각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불평불만과 시기질투를 드러내지 말고, 언제나 지금 깨어 있으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지혜 18,25)

'구원은 순서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먼저 부르심을 받았다고 구원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도 아니다.'                                          모든 움직임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시각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불평불만과 시기질투를 드러내지 말고, 언제나 지금 깨어 있으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네 주님 여기 있습니다.

----요약한강론말씀이너무좋다고하네요.아녜스의요약명강론을제가잘활용해요.가나안여인처럼신앙이돈독한나의사랑하는조카아녜스 ! 화이팅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8.24)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1,47) 

오늘 복음(요한1,45-51)은 '예수님께서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열두 사도 중에 한 분이신 성 바르톨로메오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타나엘이라고 불리는 사도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1,45) 그러자 나타나엘이 필립보에게 말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1,46) 

"와서 보시오."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쪽으로 오는 나타나엘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1,47)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안에서 나자렛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별 볼일 없는 촌락이었고, 때문에 메시아가 태어나실 곳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메시아가 태어나실 곳은 '유다 베들레헴'이었습니다.(미카5,1 참조) 나타나엘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메시아에 대해서 말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이 '우리의 마음이 거짓이 없고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이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 집회 3,16)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고모님 참 소중한 사랑 !!!  주시는 사랑 잘 받아 거짓없고 고결한 예수님마음으로 채워주시길 은혜로 채워 주시길 빌겠습니다 저도 고모님도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요  하트 뿅뵹 티모테아 수녀 고모님 -자랑스러워요 울 고모님 !!!!

<연중 제20주간 금요일>(8.25)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22,36) 

'가장 큰 두 계명!'

오늘 복음(마태22,34-40)은 '가장 큰 계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22,34-40) 

율법 교사가 가장 큰 계명 하나가 무엇인지를 예수님께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하나가 아닌 두 개의 계명,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두 계명을 나열하시는데, 그 첫째 자리에 하느님 사랑을 놓고, 다음으로 이웃 사랑을 놓습니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이고, 그런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하느님 사랑으로 모든 것이 시작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모든 움직임의 힘이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힘, 너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힘은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라고 말씀하신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 나의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너를 바라보지 말고, 나를 바라봅시다!
내가 먼저 나의 하느님을 진실 되게 사랑하고 있는지?

(~ 집회 9,18)

 하느님 사랑으로 모든 것이 시작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모든 움직임의 힘이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힘, 너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힘은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라고 말씀하신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 나의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너를 바라보지 말고, 나를 바라봅시다!
내가 먼저 나의 하느님을 진실 되게 사랑하고 있는지?  하느님 진실되게 사랑할 수있는 힘 을 달라고 마음을 다해 청원 하겠습니다.--암요 주실겁니다 아멘 !!!



<연중 제20주간 토요일>(8.26)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 

'위선이란?'

오늘 복음(마태23,1-12)은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복음 안에 드러난 예수님의 분노는 크게 두 개입니다.
하나는 오늘부터 시작된 '위선에 대한 분노(마태23,1-36)'이고, 또 하나는 '성전이 더럽혀진 것에 대한 분노(요한2,13-22)'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그리고 '자신들을 드러내려고 하고 윗자리와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에 대한 책망'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23,11-12) 

'위선이란?'

'하느님의 자녀들이 하느님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하게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성당 안에서나 기도할 때에는 "아멘!"이라고 말해 놓고서는, 성당 밖에서는 그리고 삶으로는 아멘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기도하고, 삶으로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지 않고 화해하지 않는 것',  '나의 구원의 절대적 전제인 용서와 화해를 계속 미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와 우리의 위선'입니다.

'거짓과 위선'은 이천 여 년 전 예수님으로부터 호되게 야단맞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나와 우리 안에도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우리의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예수님의 기쁨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우리들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께로 돌아가 겸손하게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 집회 1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