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일>(8.13)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14,30) '용기를 내자!' 오늘 복음(마태14,22-33)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벽에 호수 위를 걸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십니다.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칩니다. 6호 태풍 카눈이 지나갔습니다. 한반도 내륙을 관통하는 태풍이었고, 이곳 고성쪽을 지나는 태풍이어서 걱정을 했지만,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태풍이라는 큰 풍랑을 맞이할 때마다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큰 자연의 힘 앞에서 그동안 자연의 순리, 곧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오지 않은 모습, 교만과 탐욕을 드러낸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입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서 '공동이익'을 위한 회개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아마도 더 큰 자연의 재앙을 맞이하게 될 것 같습니다. (7호, 8호 태풍. ...) 제자들이 파도가 이는 풍랑 앞에서 시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제자들에게 다가가셔서 그 풍랑을 잠재우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나)의 배도 종종 크고 작은 풍랑에 시달리면서 앞으로 나아가질 못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약해서 넘어지고 풍랑을 피해 달아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 모든 풍랑을 이겨내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나아가서 외칩시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시고, 다시 부활하게 하십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14,33) (~ 시편104,35) |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8.14)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마태17,22-23) '대신 죽는 삶!' 오늘 복음(마태17,22-27)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는 말씀과 성전세를 바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랑의 순교자이신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신부님은 폴란드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형제이셨고, 성 프란치스코의 세 수도회(작은형제회.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카푸친 작은형제회) 중에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이십니다. 콜베 신부님께서는 성모신심이 크셔서 원죄 없으신 성모기사회(1917년)를 만드셨고,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때에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선교(1930-1936년)하셨습니다. "내가 대신 죽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콜베 신부님의 찬란한 영광은 폴란드의 나치 침공 때, 유다인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죽음의 형무소라고 불렸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침으로써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신 일입니다. 탈옥 사건의 벌로 열 명이 죽게 되었을 때, 가족들을 생각하며 울부짖는 한 형제를 대신해, "내가 대신 죽겠다."고 자원하셔서, 아사(餓死)의 형벌로 순교하셨습니다. '대신 죽는 삶!'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대신 죽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친구인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기 때문이고,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3)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너를 위해 죽어야 생명을 얻는, 내가 죽어야 부활하는 '신비의 신앙이요, 역설의 신앙'입니다.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리고 예수님의 뒤를 그대로 따라간 콜베 신부님처럼, 우리도 벗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이웃을 위해 나를 내어놓는 순교의 삶을 삽시다! (~ 시편113,9) |
<성모 승천 대축일>(8.15)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1,47-48) '위로와 희망의 표지!' 오늘 복음(루카1,39-56)은 '하느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로 부르심을 받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과 마리아의 노래'(마니피캇)입니다. 우리는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합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 마리아를 공경합니다. 마리아를 믿는 것이 아니라 공경합니다. 부르심의 응답 이후 한 생을 당신 아들 그리스도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완전한 모범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어머니 마리아께서 하늘로 들어 올림을 받으신 '성모승천대축일'입니다. 오늘은 의무대축일입니다. 그러니 꼭 성당에 가셔서 미사에 참례하셔야 합니다. 어머니 마리아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큰 날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합시다! 그리고 오늘 영명축일을 맞은 많은 자매님들과 오늘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새 영세자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성모승천은 이 세상 나그넷길에 서 있는 우리의 확실한 '희망이요 위안'입니다. 조금 후에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을 먼저 들어가심으로써, 우리의 확실한 '위로와 희망의 표지'가 되셨습니다. 구원자 하느님의 비천한 종이신 어머니 마리아가 이렇게 '감사와 찬미의 노래(기도)'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1,51-53) '성모신심'은 레지오 단원도 아니고 묵주기도도 아닙니다. '성모신심'은 어머니 마리아처럼 충실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 시편135,21)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19주간 수요일>(8.16)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18,20) '성체신심!' 오늘 복음(마태18,15-20)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는 말씀과 '함께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과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보고 사귀던 사람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밝지 못하고, 백스무 살에 모압 땅에서 죽은 소식을 전하는 오늘 독서(신명34,1-12)를 묵상하면서, '성체신심'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개신교 예배의 핵심은 '목사의 설교와 찬양'입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성찬 전례'가 그 중심입니다. 일치와 화해의 공의회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말씀 전례'의 중요성도 강조되었지만, 그래도 전례 중에 전례인 미사의 본질은 빵과 포도주가 사제의 손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뀌는 성(聖)변화에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이 성체를 받아모시기 위해 애쓰고, 그리고 받아모신 성체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성체를 모독한다는 '모령성체'는 성체를 받아모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체를 받아모시는 것입니다. 너를 용서하지도 너와 화해하지도 않은 채 방약무인하게 성체를 받아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체를 받아모시고도 변화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罪)입니다. '성체신심'이 약하다 보니,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도 약합니다. 성직자를 함부로 대하는 이들에게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성직자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이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에 봉사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기에,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람에게 짓는 죄보다 이분들에게 짓는 죄는 더 큰 것입니다."(권고26, 하느님의 종들은 성직자를 존경할 것) 오늘 복음과 독서가, '공동체 안에 성체신심이 강한 영적 어른이 두 세 사람만 있으면 된다.'는 말씀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 잠언 1,33)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19주간 목요일>(8.17)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18,35) 용서의 당위성! 오늘 복음(마태18,21-19,1)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조건없이 용서하라.'는 말씀과 큰 용서를 받고도 작은 용서를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전해지는 '매정한 종의 비유'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18,21) 라는 베드로의 물음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18,22)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의 의미?' 이는 '용서의 당위성인 조건없는 용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18,23-35)를 들려주시면서 용서의 당위성을 설명하십니다.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을 십만 원으로 잡았을 경우, '만 탈렌트'는 6조 원이나 되는 큰돈입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임금에게 다가와 간청하자, 임금이 그 종의 빚을 다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탕감받은 그 종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1천만 원) 빚진 동료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합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18,32-33) '용서의 당위성?' 내가 용서받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18,35) 하느님의 용서 체험이 없으면 용서하기가 힘듭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 받았기 때문에, 너를 조건 없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용서는 믿음의 문제이고, 그 대전제는 회개 곧 돌아옴입니다. (~ 잠언 10,32) '용서의 당위성?' 내가 용서받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18,35) 하느님의 용서 체험이 없으면 용서하기가 힘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의 의미?' 조건없는 용서 '내가 용서받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크나큰 용서와 자비를 잊지않고 늘 감사해야겠습니다. 아멘 !!! |
<연중 제19주간 금요일>(8.18)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19,6) '잊지 마라!' 오늘 복음(마태19,3-12)은 '혼인과 이혼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풀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가톨릭에서는 원칙적으로 이혼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설령 법적으로 이혼했다 하더라도 교회 안에서는 이혼이 아닌 '별거의 상태'입니다. 문제는 하느님 앞에서 혼인관계를 맺고(성사혼과 관면혼), 별거 상태에서 다른 사람과 혼인하려고 할 때 문제가 됩니다. 이때는 교회 법원에서 이전 혼인이 무효라는 것을 확증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과 혼인관계를 맺으면 그때부터 '조당'이 됩니다. 오늘 독서(여호24,1-13)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불러 놓고 한 말인데, 이 말의 핵심은 '잊지 마라.'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은총을 잊지 말고 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기억의 동물'이면서 동시에 '망각의 동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잘 기억도 하지만, 잘 잊기도 합니다. 성경 전체(73권)의 핵심도 바로 '잊지 마라.'입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기적들을 잊지 마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잊지 마라는 것'입니다. 매일 드리는 미사는 '주님께서 우리를(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랑의 기억이요 재현'입니다. '잊지 마라!' 첫 마음(초심)을 잊지 마라! 부부 성소 안에 있는 첫 기억, 첫 사랑을 잊지 마라! 지금의 힘듦은 잊고 살기 때문이 아닌가? 첫 마음, 첫 기억, 첫 사랑을 간직하지 못하고 잊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느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라."(복음환호송) (~ 잠언 20,30)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19주간 토요일>(8.19)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19,14) '전폭적인 신뢰와 따름!' 오늘 복음(마태19,13-15)은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사랑하시다.' 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어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나서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어 주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19,14) 제가 3-4살 될 무렵에 넘어져 오른쪽 눈가가 찢어지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유는 시골에서 어머니가 냇가로 빨래하러 가시는데, 울면서 어머니를 뒤쫓아 가다가 넘어져서 그랬다고 합니다. 그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영아기 때부터 6세 이전인 초기 아동기 때까지의 어린이들의 모습입니다. 그 시기 어린이들은 조금도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침에 울고불고하는 어린이의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이는 유치원에 가는 어린이가 엄마와 헤어질 때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어린이는 바로 이런 어린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어린이들이 엄마에게 보이는 모습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이고, 이런 모습을 지닌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여호24,14-29)는 모세를 대신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여호수아가 죽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유언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유언을 마치고 백열 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24,15) '전폭적인 신뢰와 따름!' 이것이 바로 어린이들의 본성이며,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본성입니다. 이 본성이 하느님을 믿는 우리 안에 늘 살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잠언 27,10)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미사의 은혜/연중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