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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연중 제13주일>(7.2) -교황 주일- )'고통 앞에서 기도하자!'


<연중 제13주일>(7.2) -교황 주일-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 

'고통 앞에서 기도하자!' 

오늘 복음(마태10,37-42)은 '버림과 따름'에 대한 말씀과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받을 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십니다. '부모나 자식보다 당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그리고 '고통(십자가) 앞에서 넘어지지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의미의 말씀을 하십니다.

어제 오후에 근처 적석산으로 잠깐 산책 다녀오면서, 참으로 오랜 만에 좋아하는 성가('아무것도 너를' 과 '태양의 찬가')를 불렀습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면서 고통을 이겨내자.'는 '성녀 대 데레사의 기도'를 다시금 묵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지 않은데서 찾아오는 것이 고통은 아닌지.

산책을 다녀와서 토빗기를 필사했습니다. 토빗이 참새 똥에 맞아 눈이 멀게 된 고통과 라구엘의 딸 사라가 겪는 고통과 그들이 고통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과 그 두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토빗2,1-3,17) 

'고통 앞에서 기도하자!

예수님도 고통 앞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바로 잡히시기 전에 바치신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기도'입니다.
우리도 고통 앞에서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 기도로 고통을 이겨냅시다!

연중 제13주일인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다.
'이 지상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살아가시고 사목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교황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면서 잘 따라갑시다! 

"하느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본기도) 

(~ 토빗 3,17)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성 토마스 사도 축일>(7.3)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온전하게 믿자!'

오늘 복음(요한20,24-29)은 '예수님과 토마스'에 대한 말씀으로 '토마스의 불신'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이전에도 열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여인들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토마스 또한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라며 예수님 부활 소식을 전하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0,25)

예수님께서 그런 토마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당신의 몸을 직접 보여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이에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며 믿음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신앙'은 '부활 신앙'입니다. 이제와 영원히 부활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토마스의 불신'은 우리가 부활 신앙을 삶으로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도, 곧 예수님으로부터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세 번씩이나 들은 제자들도 믿지 못했는데... 우리의 힘듦(믿음의 약함)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다가옵니다.

'정말 믿고 있는가?'

'믿음의 본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우리의 부활, 나의 부활, 지금 여기에서의 부활이 힘든 이유는 믿음의 본질을 온전하게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님의 부활만 믿고, 그 부활만 바라고 있지, 그 부활의 절대적 전제인 죽음에 대한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 

온전하게 믿고, 온전하게 부활 합시다! 
--------월욜 --'믿음의 본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우리의 부활, 나의 부활, 지금 여기에서의 부활이 힘든 이유는 믿음의 본질을 온전하게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님의 부활만 믿고, 그 부활만 바라고 있지, 그 부활의 절대적 전제인 죽음에 대한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 

온전하게 믿고, 온전하게 부활 합시다! ---아버지 토마스 사랑하고 감사드립니다.
(~ 토빗 9,6)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3주간 화요일>(7.4)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8,27)

'풍랑은 회개의 메시지!' 

오늘 복음(마태8,23-27)은 '예수님께서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나섭니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시면서 일어나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십니다. 그러자 풍랑이 멎었습니다.

우리들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풍랑들이 많습니다. 어찌보면 우리의 삶은 바람 잘 날 없는 풍랑의 삶이 아닐까? 크고 작은 시련들, 아픔들과 같은 풍랑들은 언제나 내 곁에 있습니다.

차이는 그 앞에서 드러납니다. 금방 넘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인내하면서 참아내는 사람, 풍랑들을 이겨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토빗기에 나오는 토빗이 바로 그런 모든 풍랑을 이겨내고 다시 부활한 사람입니다. 모두가 한 두 번은 꼭 읽고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토빗은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주님을 굳게 믿고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면서 주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주어진 은총이 부활입니다.

풍랑을 좋아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풍랑 앞에서 즉시 주님께 감사기도를 청하는 사람도 한 사람 없습니다. 풍랑 앞에서는 누구나 힘들어 합니다. 차이는 누가 더 빨리 우리의 구원을 위해 겪으셔야만 했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랑, 곧 주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에로 더 빨리 나아가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풍랑을 이겨냅니다. 그래서 다시 부활합니다.

우리도, 나도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 주님을 굳게 믿고 풍랑을 이겨냅시다! 회개합시다!

(~ 유딧 4,15)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7.5)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

오늘 복음(마태10,17-22)은 '사도들의 파견 사화로써 박해를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길, 신앙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박해가 따르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박해를 각오하고, 그 박해를 견디어 내라고 하십니다. 그 박해를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박해를 각오하고, 이 박해를 끝까지 견디어 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신부님은 1821년 충남 솔뫼에서 태어나셨고,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 땅으로 이주하여, 열여섯 살인 1836년에 용인 은이라는 곳에서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길을 떠나 신학 공부를 마치고,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하이 금가항 성당에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아 한국 천주교회의 첫 사제가 되신 분입니다. 하지만 신부님께서는 이듬해인 1846년 9월 16일 서울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십니다. 

26살의 젊은 나이로 장엄하게 순교하셨습니다. 일 년 동안 사제로 계시면서, 1846년 4월 8일 용인 은이에서 마지막 미사를 하시고, 6월 5일에 백령도에서 체포되어, 9월 16일 군문효수형으로 장엄하게 순교하셨습니다. 이렇게 신부님께서는 끝까지 박해를 견디어 내시고 구원의 길로 들어가셨습니다. 

만약 지금 우리 앞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때의 박해 상황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견디어 낼 수 있을까? 신부님처럼,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처럼 그 모진 박해를 이겨낼 수 있을까? 

무엇을 빼앗기거나, 해가 될 듯한 말 한마디만 듣거나, 혹은 자존심이 상하면 쉽게 넘어지고, 미사에 나오지 않는 우리들이 아닌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나 많은 순교자들은 칼(죽음)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화이팅~~~

(~ 유딧 10,23)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3주간 목요일>(7.6)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9,2c)

'두 부류의 사람들!'

오늘 복음(마태9,1-8)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중풍 병자는 스스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환자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신 것이 아니라,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큰 깨달음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너를 위한 나의 작은 기도나 행위가 결코 작지 않고 큰 기적을 낳는다는 깨달음입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금방이라도 파멸에 이를 것만 같은 데도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던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18,20) 

두 세 사람이면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제대로 믿는 의인 두 세 사람만 있어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너와 공동체를 위해, 그들의 부활을 위해 두 세 사람 안에 있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9,2c)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9,6c)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자,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던 율법 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딴지를 겁니다. 또 한 부류는 평범한 군중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나는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가?
기뻐 찬양하는 사람인가, 딴지를 거는 사람인가? 
살리려고 하는 사람인가, 죽이려고 하는 사람인가? 
순종하는 사람인가, 불순종하는 사람인가? 

(~ 에스 1,9)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3주간 금요일>(7.7)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b)

'겸손하게 죄인임을 고백하자!'

오늘 복음(마태9,9-13)은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습니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9,11b)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의 삶의 근본을 이루고 있었던 율법의 규정은 죄인들을 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인들과 가까이 하는 것이 곧 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마태오나 세리들은 당시 로마의 협력자로서 유다인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먹고 마십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못마땅해 하는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2-13)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내가 죄인이니까.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는 여전히 바리사이들처럼 너의 부족함을 보고 죄인이라고 단죄하면서 그들과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내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완전함 앞에서 끊임없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고백해야 예수님께서 내게로 오십니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에스 8,17)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3주간 토요일>(7.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9,17) 

'둘이 아닌 하나!'

오늘 복음(마태9,14-17)은 '단식 논쟁'과 '새것과 헌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그리고 이어서 새것과 헌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랑이신 예수님!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 

잔치와 단식은 기쁨과 고난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서로 다른 반대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보면 이 둘은 하나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라고 묵상되었습니다. 

'둘이 아닌 하나!'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 기쁨이고, 이 기쁨이 있어야 단식, 곧 고행과 악습들을 끊어내는 단식, 서로 사랑하는 단식,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단식,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오늘과 지금 오시는 예수님, 새 포도주이신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잔치를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먼저입니다.

매일 성체성사(미사)라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이 잔치에 함께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성사요, 이 사랑 안에 머무는 성사입니다. 이 큰 사랑 앞에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성사요, 하느님의 자비로 새로워지는 성사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고, 다시 부활하는 성사입니다. 
그래서 성체성사가 가장 큰 성사요 잔치입니다. ----아멘!

(~ 1마카 3,60)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금-"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b)
--  내가 죄인이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주님의 모습-                                                                                '겸손하게 죄인임을 고백하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완전함 앞에서 끊임없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토-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 기쁨이고, 이 기쁨이 있어야 단식, 곧 고행과 악습들을 끊어내는 단식, 서로 사랑하는 단식,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단식,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성체성사(미사)라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성사요, 이 사랑 안에 머무는 성사입니다. 이 큰 사랑 앞에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성사요, 하느님의 자비로 새로워지는 성사입니다.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고, 다시 부활하는 성사입니다. 
성체성사가 가장 큰 성사요 잔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