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사의 은혜/연중시기

<연중 제15주간>(23.7.16) -농민주일-"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13,3) --내려놓아야 합니다.땀을 흘려야 합니다.그래서 함께 잘 살 수 있습니다


<연중 제15주일>(7.16) -농민주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13,3) 

'겸손의 덕!'

오늘 복음(마태13,1-23)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오늘이 농민주일인데, 이 비유를 '농부의 비유'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농부들은 늘 흙과 씨름합니다. 좋은 결실을 내기 위해 땅을 벗 삼아 살아갑니다. 씨가 뿌려지는 땅을 고르고 또 고르면서,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서 땀을 흘립니다. 이렇게 땅을 벗 삼아 살아가는 이들은 대체로 마음이 순하고 겸손합니다. 땅이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애써야 하고, 특히 좋은 결실을 맺기 위해 땀 흘리는 농부처럼 애써야 한다는 메시지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선포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관한 '말씀의 씨'가 매일 뿌려지고 있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께서 매일 '복음의 씨'를 뿌리고 계십니다. '내 마음의 밭'이 좋은 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내 마음의 밭을 좋은 땅이 되게 하는 삶입니다.

때가 되면 사라지는 세상 가치들에 파묻혀 있거나, 겸손의 덕을 멀리하고 욕심과 교만 속에 파묻혀 있으면,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도 보이지 않고, 매일 뿌려지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는 나와 상관없는 공허한 나라가 되고 맙니다.

하느님의 땅이요 공동의 집인 지구가 몹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어디는 물 폭탄을 맞고, 또 어디는 폭염과 가뭄과 추위에 떠는 기후변화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피조물을 잘 다스려야 하는 인간의 욕심과 교만이 낳은 결과입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래서 함께 잘 살 수 있습니다
 
(~ 1마카 13,11)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5주간 월요일>(7.17)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10,34) 

'역설의 신비!'

오늘 복음(마태10,34-11,1)은 '파견 설교의 끝부분'으로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씀'과 '버림과 따름에 대한 말씀', 그리고 '파견된 이들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받을 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씀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 안에 머물러 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 안에서만 바라보면'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말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평화와 하나됨의 역설(paradox)'입니다. 때문에 문자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되고, 그 너머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바라보아야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24,36; 요한20,19.21)

예수님께서는 분명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요한복음 17장 참조) 그런 예수님께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고, 일치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역설입니다. 

'참 평화'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 거짓과 싸워 승리할 때 주어진다는 의미...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악과 싸워 승리할 때, 그리고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육의 열매들(갈라5,19-21 참조)을 예리한 영적인 칼로 단호하게 잘라낼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 안에 머물 수 있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참되게 믿으면 평화가 함께하고, 하나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를 확인하시고자 가끔씩 고통도 주십니다. 이 고통 앞에서 나의 민낯이, 나의 믿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가끔씩 나를 찾아오는 고통이 또한 칼의 의미이자, 분열의 의미가 아닐까?

(~ 1마카 14,34)

'역설의 신비!'                                                                                                                          '참 평화'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거짓과 싸워 승리할 때 주어진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악과 싸워 승리할 때, 그리고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육의 열매들(갈라5,19-21 참조)을 예리한 영적인 칼로 단호하게 잘라낼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 안에 머물 수 있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참되게 믿으면 평화가 함께하고, 하나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를 확인하시고자 가끔씩 고통도 주십니다. 이 고통 앞에서 나의 민낯이, 나의 믿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가끔씩 나를 찾아오는 고통이 또한 칼의 의미이자, 분열의 의미가 아닐까?

<연중 제15주간 화요일>(7.18)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11,22.24) 

'회개의 기적!'

오늘 복음(마태11,20-24)은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 곧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꾸짖음은 지금 여기에 있는 믿는 이들에게 하시는 꾸짖음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 예수님께서 날마다 우리 안에서 일으키시는 기적은 무엇일까? 

저는 그 첫 번째 기적이 매일 제대 위에서 사제의 손을 통해 일어나는 '성체와 성혈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성변화되는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적은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크고 작은 은총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 기적을 보고도, 이 기적 체험들을 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꾸지람입니다.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매일 일어나는 기적을 보면서도 지금 여기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마지막 심판 날에 큰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보다도 더 많은 매를 맞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 저 너머에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평화와 기쁨을 희망합니다. 그 목적이요 희망이 나에게서 이루어지려면 지금 여기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로 보다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리고 내 안에서 날마다 아니 매순간 회개의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배둔에서도 새 성전 건축이라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이제 배둔공동체가 해야 할 일은 주님께로 돌아오는 회개입니다. 

(~ 1마카 16,24)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아버지,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11,26)  
 
'기도의 모범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마태11,25-27)에서 우리는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의 모범이셨습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구원의 길을 앞서 걸어가셨습니다. 참으로 낮아지셨고, 땀을 흘리셨고, 수난 당하셨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이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이 순종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범'이셨습니다. 복음서 곳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만나는데, 외딴 곳인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기도가 오늘 복음(감사와 찬미 기도)과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기도(탄원기도)와 당신 자신과 제자들과 믿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신 요한복음 17장(청원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과 나누는 진솔한 대화'입니다. '가식 없이 그리고 어떠한 틀에 얽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많이 아프고 힘들면 욥이나 토빗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울부짖으면서 하느님과 대화하고(탄원기도), 또 기뻐할 일이 있으면 감사와 찬미의 대화(기도)를 하고, 간청할 것이 있으면 온 마음을 다해 우리의 소망을 말씀드리는 것(청원기도)입니다.  
 
구약성경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해 보면, '순종과 불순종의 역사'입니다. '회개하는 이들과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역사'입니다. 몸과 마음이 하느님께로 돌아와 간절하게 매달릴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주님, 불쌍한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 2마카 3,12) 



<연중 제15주간 목요일>(7.2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11,28) 

'나에게로 와서 배워라!'

오늘 복음(마태11,28-30)은 '내 멍에를 메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쳐있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와서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물 폭탄과 그리고 폭염으로 지구촌 곳곳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너무 많은 희생자들이 나왔고, 큰 피해를 입은 분들이 많아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매일 미사 드릴 때마다 이번 장마로 희생된 영혼들과 힘들어 하는 형제자매님들을 기억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지 말고, 모두가 함께 정신을 바짝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찾고, 그 지혜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 지혜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지혜를 배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처럼 예수님 방식대로 서로 사랑하는 지혜, "네 탓이요!" 만을 외치지 말고, "내 탓이요!"를 더 외치는 지혜, 조건 없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지혜. 나에게로 와서 이런 지혜를 배우라고 하십니다.

생각과 말로만 예수님께로 나아가지 말고, 구체적인 행위가 지혜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더 힘들어 하지 않고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예수님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참으로 힘에 겨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예수님을 배우는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부활의 길입니다. 

모두가 많이 부족하지만,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천사가 되어 함께 부활의 길로 나아갑시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 2마카 5,4)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5주간 금요일>(7.21)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12,8) 

'법의 근본!'

오늘 복음(마태12,1-8)은 '율법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밑밭 사이를 지나가고 계실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윗 때에 일어났던 일을 상기 시켜주시고 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12,7-8) 

모든 법의 근본은 살리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을 살리고 보호하기 위해 법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특히 약자들을.

하느님의 법인 율법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은 십계명과 모세오경의 말씀인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 율법의 세부 규정들을 많이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이 613개나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그 규정들이 율법의 근본을 파괴했습니다.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이러한 법들과 싸우셨습니다. 율법이 법의 본질이요 근본인 사람을 살리는 법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눈에 가시였던 예수님께 율법 파괴죄를 씌워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에 분명하게 계시되었습니다. 이 법이 교회 공동체에서나 삶의 자리에서 사람들을 살리는 법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더 나아가 우리나라가 만들어 놓은 헌법이나 여러 규정들이 사람들을, 특히 약자들을 살리고 보호하는 법으로서의 근본 구실을 잘하고 있는지, 한번 곰곰이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2마카 7,23)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7.22)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간절함!'

오늘 복음(요한20,1-2.11-18)은 예수님의 발현사화로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한 때 '일곱 마귀'에 사로잡혔던 여인입니다. 그랬던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 다시 살아나는 하느님 체험을 합니다. 

이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한 생을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요 증인이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일곱 마귀에 사로 잡혀 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의 삶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아주 센 마귀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했을 그녀의 간절함 안에 머물러 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랑하는 이를 찾아 나서는 신부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간절하게 만나고 싶어하면서 예수님을 찾아나섰을 것입니다. 그녀의 그런 간절함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그녀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른 제자,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요한20,13.15) 

마리아 막달레나의 간절함이 우리의 간절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간절하게 찾고 있고, 주님께 매달리고 있는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임마누엘이신 주님, 우리가 찾고 있는 그 주님은 어디에 계실까?

우리가 찾고 있는 주님, 만나야 할 주님은 멀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 계십니다. 내 마음 안에, 내 가정 안에, 삶의 자리, 그것도 가장 낮은 삶의 자리에 계십니다.

(~ 2마카 9,29)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