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일>(2.12)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마태5,17-37)은 예수님의 산상설교로써, '예수님과 율법', '화해하여라.', '극기하여라.',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정직하여라.' 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지키면 사는 것이고, 지키지 않으면 죽음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 전체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모세오경이 전하고 있는 율법의 핵심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6,5)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19,18)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몸소 당신의 육화의 겸손과 땀의 찬가와 십자가 수난과 죽음으로 이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 우리를 위한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율법을 완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완성해야 할 율법의 본질인 구체적인 사랑에 관한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화답송) '율법의 완성을 통해'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산 이들에게 주어지는 복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어떠한 눈도 본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2,9) (~ 판관 1,21)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제목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8,12) '내가 표징이 되자!' 오늘 복음(마르8,11-13)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을 두고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8,12)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기적), 곧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어떤 증거를 보고,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다려온 메시아, 로마의 식민통치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메시아이신지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표징을 요구하는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우리들! 우리도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안고 있는 크고 작은 바람들이 이루어지는 표징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청하라고 하셨으니,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요구(청)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 뜻이 이루어지는 이 요구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문제이고,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음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표징을 요구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표징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곧 '지금 여기인 삶의 자리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표징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표징이 되려는 노력은 게을리 한 채, 자꾸만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내가 표징이 됩시다!' (~ 판관 6,24)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2.14)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21) 오늘 복음(마르8,14-21)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는 말씀입니다. 공관복음인 루카복음 12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그들의 위선을 조심하여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거짓과 위선을 누룩에 비유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거짓과 위선을 조심하여라.'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엉뚱하게도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수군거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우매함을 보시고,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을 상기시키시면서,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은혜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도 하신다고 묵상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가 무엇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씀일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 아닐까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났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전례의 최고 등급으로 자리 잡고 있고, 성사 중의 성사인 성체성사(미사)를 통해서 매일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수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하게 깨닫는다면, 삶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내가 먼저 사랑하는 변화, 내가 먼저 낮아지고, 내가 먼저 용서하고, 내가 먼저 죽는 그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변화는 기적입니다. 이 기적들을 통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세6,5-6) (~ 판관 10,6)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6주간 수요일>(2.1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마르8,25) '영적인 눈을 뜨면!' 오늘 복음(마르8,22-26)은 '예수님께서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눈먼 이에게 손을 대시니,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됩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태생 소경이 아니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입니다.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던 이들의 믿음, 예수님께서 손만 대어도 치유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그들의 믿음이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만나 그를 낫게 합니다. 생활성가 중에 '내 눈을 뜨게 해 달라.'는 성가가 있습니다. 이는 육적인 소경이 아니라, 영적인 소경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성가입니다. 우리 안에는 영적으로 눈먼 이들이 있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 이상의 것을 볼 수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보이는 것에 갇혀 있고, 지나가는 것에 갇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보이는 것 그 너머에 숨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의 신비여!' '신앙은 곧 신비'입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 뒤에 부활이 감추어져 있고,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도 감추어져 있습니다. 영적인 눈을 뜬 이후 한 생을 기쁨의 눈물 속에서 살아가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생태계의 주보성인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합일을 통해 영적인 눈을 뜨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 안에 숨어 계시는 주님을 만나 뵙고 기뻐합니다. 그 기쁨의 찬미가가 피조물의 찬가인 '태양의 찬가'입니다. (~ 판관 15,9)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영적인 눈을 뜨면!' '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하지만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보이는 것 그 너머에 숨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의 신비여!' '신앙은 곧 신비'입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 뒤에 부활이 감추어져 있고,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도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기쁨의 찬미가가 피조물의 찬가인 '태양의 찬가'입니다. 아름다운 아침 따뜻한 사랑 봄 꽃들 한쌍의 새들 ----오 감미로워라 주님께서 계시하시니 한생을 기쁨의 향기속에서 사신분 닮고 또 닮고 가까이 더 가까이 예수님과 함께, 통하여, 안에서 지내기를요 아멘 !!! |
<연중 제6주간 목요일>(2.16)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8,29) '그러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오늘 복음(마르8,27-33)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말씀'과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라고 하느냐?"(8,27)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8,28)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8,29) 하고 제자들에게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8,29) 하고 대답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 '예수님의 신원'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십니다. 이 '함구령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구세주)이시지만, '죽음과 부활이신 그리스도의 신원'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죽음과 부활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멋진 답과 신앙고백을 드러낸 베드로이지만, 죽음과 부활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호되게 야단맞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8,33)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은 나에게 그리스도이신가?' 이제 우리가, 내가 답할 차례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그리스도이신가?' 라는 물음의 답은 나를 찾아온 고통 앞에서 드러납니다. 고통 앞에서 넘어지지 않거나, 고통에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게 하는 힘, 다시 부활하게 하는 힘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나의 신앙고백'입니다. (~ 판관 19,10)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예수님이 나에게 그리스도이신가?' 라는 물음의 답은 나를 찾아온 고통 앞에서 드러납니다. 고통 앞에서 넘어지지 않거나, 고통에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게 하는 힘, 다시 부활하게 하는 힘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나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그리스도이신가?' 전부이십니다. |
<연중 제6주간 금요일>(2.17)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 '나의 십자가는?' 오늘 복음(마르8,34-9,1)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어 그들에게 먼저,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신원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때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나의 나약함'이라고 묵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생각과 말과 행위로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어제로 구약성경 룻기까지 필사를 마쳤습니다. '구약의 역사'는 작고 약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 구원의 역사가 바로 '구약성경의 내용'입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의 순종과 불순종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는 '신약시대인 예수님의 시대로' 이어지고 있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순종과 불순종의 역사'가 바로 '이스라엘의 나약함'이고, 지금 여기에서 드러나는 '순종과 불순종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나약함'입니다. 이 '나약함'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 짊어지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할 '나의 십자가'라고 묵상했습니다. 구원은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이 나약함을 주님 자비의 힘에 내어맡김에서 옵니다. 이것이 우리에 앞서 몸소 당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가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실망하지 맙시다!' 순종과 불순종의 여정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순종에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인내로써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는다면. (~ 룻 4,22)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순종과 불순종의 여정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순종에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인내로써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는다면.구원은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이 나약함을 주님 자비의 힘에 내어맡김에서 옵니다. 이것이 우리에 앞서 몸소 당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가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아멘 !!! |
<연중 제6주간 토요일>(2.18)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마르9,2) 오늘 복음(마르9,2-13)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는 말씀'과 '엘리야의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으뜸 사도인 베드로와 두 형제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타볼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거룩한 변모 사건은,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신원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9,7) 그리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희망의 사건'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 사건'입니다. 이는 그러니 '힘들더라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희망을 잃지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실 때, 세 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으뜸 사도였던 베드로도 예수님의 부활 앞에 놓여진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16,22)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호된 꾸지람을 듣습니다.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힘든 무게입니다. 너무 힘들어 내려놓고 싶고,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통해서, 힘들지만 포기하지 말고 힘내라는 희망의 메세지를 예수님의 제자들과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오늘 독서(히브11,1-7)는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11,1) 그리고 이어서 믿음으로 인정받은 이들의 모습(아벨,에녹,노아)을 전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이는 믿음', 곧 '십자가 죽음 그 너머에 부활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 1사무 5,12)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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