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일>(1.29) -해외 원조 주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5,3)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오늘 복음(마태5,1-12)은 '참행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전하고 있는 참행복 선언은 '아홉 가지'입니다.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모욕과 박해와 사악한 말을 듣는 사람들! 아홉 가지 행복 선언 중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일까?' '육이 가난하다.'고 말할 때의 그 의미는 '육을 위한 양식이 부족하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가난하다'고 말할 때의 그 의미는 '영을 위한 양식의 부족함'을 의미하는 '내적 가난'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것을 비워내고, 하느님의 것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영으로 채우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곧 이들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묵상해 봅니다. 그러니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들이고, 끊임없이 회개하는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거룩한 영의 충만함 안에서 기뻐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참행복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요 선물이라고 묵상해 봅니다. '연중 제4주일'인 오늘은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육체적 가난 때문에 질병과 기아와 기후 재난으로 고통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을 기억하는 날이고, 그들을 위해 특별 헌금을 봉헌하는 날입니다. 가난한 이들 안에 함께 계시는 주님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정성과 마음을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정성과 마음을 모으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사람들이며,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민수 29,11)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시련의 높은 파도나 고통이 다가올 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점 한가지!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고통이나 시련 여부에 상관없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늘 존재하고 계신다는 것. 주님은 우리 앞에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와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것. |
<연중 제4주간 월요일>(1.30)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5,8) '실망하지 말자!' 오늘 복음(마르5,1-20)은 '마귀들과 돼지 떼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그 사람 안에 있던 더러운 영들을 그들의 바람대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히브11,32-40)는 많은 예언자들의 믿음과 그들이 기쁘게 받아들였던 고난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돌아다녔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기는 하였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에, 우리 없이 그들만 완전하게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11,37-40) 히브리서 저자가 전하고 있는 이 말씀이, 하느님께 선택된 많은 예언자들의 믿음과 희생과 고난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많은 예언자들 중에서 첫 번째 예언자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주님께서 부르실 때, 그에게 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창세12,1-2 참조)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아브라함에게서 끝나는 복이 아니라, 이사악과 야곱과 예수 그리스도를 거쳐,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와 우리의 미래를 향해 계속 진행되어져 가는 복이라는 것을, 오늘 독서가 전하고 있다고 묵상합니다. 그러니 많은 예언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우리의 믿음과 희생과 고난의 결과로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들이, 지금 내게 그리고 우리 때에 당장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크게 실망하지 맙시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떤 아픔은, 더 큰 아픔을 막아주시기 위한,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한 주님의 손길 아닐까요??? (~민수 31,24)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지금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떤 아픔은, 더 큰 아픔을 막아주시기 위한,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한 주님의 손길 아닐까요??? 시련의 높은 파도나 고통이 다가올 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점 한가지 !!!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고통이나 시련 여부에 상관없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늘 존재하고 계신다는 것. 주님은 우리 앞에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와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것. -- 아멘!감사해요!♡ 아유 제가요 더요 울 고모님 느무 사랑하구 자랑스러워요 !!! 아멘!!! 저두요 예수님 !!! 미소 절로 머금은 삶으로 힘과 사랑과 절제 주시는 티모테오성인님과 울 티모테아 고모님께서는 늘 좋은 하루 하루 선물 주시는 것 같아요 |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사방천지를 둘러봐도 의지할 곳 하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아군은 단 한명도 없고 적군들만 수두룩합니다. 그러니 세상에 대한 기대를 줄이고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 고정시켜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
제목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2.1)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6,4) 예수님의 소외! 오늘 복음(마르6,1-6)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셨을 때,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믿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고향에서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십니다. '참으로 이상한 역설입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요즘은 큰 상을 받거나, 경사스러운 일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현수막을 걸고 난리인데... 예수님 고향 사람들도 "우리 고향 나자렛에서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다."고 사방에 현수막을 걸고 환영해야 할 일인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또 이상한 역설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메시아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를 기다려온 이들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소외'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삶 속에서도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외를 당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땀 흘리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매 맞으시고. 침 뱉음 당하시고, 옷 벗김 당하시고, 마침내는 십자나무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나도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사다난했던 1월을 뒤로 하고, 새 달인 2월을 맞이했습니다. 2월 한 달을 다시 구원의 기회((선물)로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주님 마음의 드는 날들로 가득하기를 기원하면서 힘차게 출발합시다! (~ 신명 5,33)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제목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연중 제4주간 금요일>(2.3)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6,16) '예수는 나에게 누구인가?' 오늘 복음(마르6,14-29)은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말씀과 세례자 요한의 죽음(순교)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입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오르내립니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되살아난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엘리야다.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헤로데도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합니다. 신성을 지니시고 오신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초대 교회 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근본 교리를 부정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 무리가 바로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한 아리우스 이단'입니다. 그 무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보지 않고,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나신 분,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계시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교회 첫 번째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서기325년)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서기381년)가 그 무리를 단죄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16,15) 라는 예수님의 이 물음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 '예수는 나에게 누구인가?' 오늘 독서(히브13,1-8)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분께서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13,5) 잠시 있다가 떠나가는 인생입니다. 지나가는 것에 너무 집착하면서 힘들어 하지 말고,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같은 분이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서' 자유와 해방이 되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 신명 17,20)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4주간 토요일>(2.4)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마르6,31) '구원에 필요한 간절함!' 오늘 복음(마르6,30-34)은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에 앞서, 사도들의 보고와 예수님께 몰려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많은 군중 때문에 음식을 먹고 쉴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든 끝까지 찾아 갈 태세입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들의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살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 자유와 해방이라는 부활을 향해 있던 간절한 마음, 그들의 이 간절한 마음이 그들의 발과 시선을 예수님께로 향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군중의 모습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간절함'입니다. 믿고자 하는 간절함,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고자 하는 간절함,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영원한 부활을 얻고자 하는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의 이 간절함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간절한 마음이 있는 곳에 당신 자신도 함께 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지도자들의 말을 잘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 셈을 해 드려야 하는 이들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탄식하는 일 없이 기쁘게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탄식은 여러분에게 손해가 됩니다."(히브13,17) 나는 사목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히브리서의 이 말씀 안에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친목이 우선이 아닌 우리의 구원에 우선적 목적을 두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 신명 26,11)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우리의 구원에 우선적 목적을 두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간절함'***입니다. 믿고자 하는 간절함,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고자 하는 간절함,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영원한 부활을 얻고자 하는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의 이 간절함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간절한 마음이 있는 곳에 당신 자신도 함께 하십니다. 아멘!!! |
미사의 은혜/연중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