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사의 은혜/연중시기

<연중 제13주일>(6.26) -교황주일- 연중 13주간


<연중 제13주일>(6.26) -교황주일-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9,58)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세요."
(프란치스코 교황)

교회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29)이나 이날과 가까운 주일을 '교황주일'로 지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베드로의 후계자이고, 바티간 시국의 국가 원수인 교황을 위해 기도하는
'교황주일'입니다.
그리고 교황의 사목을 위한 특별헌금(베드로성금)을 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를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리고 "나를 따라라."는 예수님 말씀에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예수님 따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 모습이 지금의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끊어버립니다." "믿습니다." 라는 말로 주님 부르심에 힘차게 응답했지만, 자꾸만 뒤를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

그런 모습 앞에서 예수님의 고뇌(스트레스)와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신 교황의 고뇌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교황을 기쁘게 해 드리는 길은, 내가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것, 그래서 지금 여기가 우울한 지옥이 아니라,
기쁨이 충만한 하느님의 나라(천국)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면 살고, 육의 욕망인 악령에 이끌려 살면
그 끝은 파멸이라고 말합니다.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예언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산 이들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그래서 서로 싸우지 말고, 서로 사랑합시다!

<연중 제13주간 월요일>(6.27)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마태8,19)
한 율법 학자의 고백처럼, 이렇게 고백한(약속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안에 모습을 보면 이유와 핑계가 너무 많아 보입니다.
돈이 없다는 핑계!
바쁘다는 핑계!
아프다는 핑계!
마음이 불편하다는 핑계!
등등

우리는 이렇게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 따르기를 주저합니다.
기분에 따라 우리의 믿음도 흔들거립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시편 저자는 외칩니다.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깨달아라."(시편50,22)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95,7.8)*********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은혜를 망각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모스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나는, 곡식 단으로 가득 차 짓눌리는 수레처럼, 너희를 짓눌러 버리리라."(아모2,13)

먹고 살기에 바쁜 우리들이기에, 이유와 핑계가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유와 핑계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 안에 진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을 믿고, 너를 사랑한다는 마음 안에 진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유와 핑계를 대지 않으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느님 아버지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우리의 엄마 성모님께서도,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라는 걸정적인 신앙고백이후 이유와 핑계를 대지 않으면서 끝까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 길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함과 연약함이 많았던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성령의 내림을 받은 이후 완전히 변화되어 이유와 핑계를 대지 않으면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복음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온 세상에 전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한번 살아봅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6.28)

"주님, 구해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8,25)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자, 제자들이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급히 깨우며, 자신들이 죽게 되었으니 구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시면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십니다. 그러자 풍랑이 멎어 아주 고요해집니다.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합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8,27)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풍랑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크고 작은 시련이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는 삶 속에서 크고 작은 풍랑이 없는 사람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너와 주위를 바라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고통이 나만의 고통이고, 가장 큰고통이라고 착각하면서 넘어지는 사람들, 그것도 크게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크고 작은 풍랑, 시련과 고통 앞에서 나는 어떤 모습인가?
제자들처럼 살려달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가?
나는 하루의 삶 속에서 나의 구원자이신 주님의 이름을 얼마나 부르고 있는가?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라는 이 외침 안에서 제자들의 큰 간절함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의 간절함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주 주님의 이름을 불러봅시다!
그것도 온 마음을 담아서 아주 간절하게 불러봅시다!
그것이 바로 기도자체이고, 아주 멋진 기도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다양한 방법과 모습으로 ㅎㅎ

오늘은 저의 18주년 서품기념일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주님의 이름을 간절하게 불러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29)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8,25)
'교회의 초석인 두 기둥!'
오늘은 교회의 두 큰 기둥이신, '성 베도로와 성 바오로 두 사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뜻깊은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형제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활동했던 사도이고, 바오로는 예루살렘 교회 밖인 이방인 지역에서 활동했던 사도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평범했던 두 사람의 모습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의 완전한 대변신을 합니다. 베드로의 오순절의 성령체험과 바오로의 다마스쿠스에서의 체험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고 기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게 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복음 선포에 앞장섰던 두 사도는 같은 해인 기원 후 65년 경에 순교로써 승리의 월계관으로 받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사도12,5)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4,7-8)
오늘 두 독서와 복음 안에서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가 전하고 있는 하느님은 이렇습니다.
'모든 것에서 나를 빼내어 주시는 하느님!'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시는 하느님!'
'지금 여기에서 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두 기둥 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두 사도가 전하는 하느님을 굳게 믿고, 이 하느님의 힘으로 교회의 역사를 계속 써내려 갑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에 열쇠를 주겠다."(마태16,18-19)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3주간 목요일>(6.30)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9,2)
'그들의 믿음인 나의 믿음!'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중풍 병자는 쉽게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환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너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당신께 데리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예수님께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죄의 결과가 병이라고 생각했던 율법 학자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이라는 율법 학자들의 중얼거림에서 알 수 있듯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는 권한입니다.
그러니 중풍 병자의 치유사화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선언, 곧 예수님의 하느님 (신성)이 드러난 선언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한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날마다 아니 매순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다시 살아나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에 대한 믿음을 갖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너의 구원을 위한 믿음의 행위들(희생.봉사.나눔)을 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9,8)
오늘도 나의 구원과 너의 구원을 위한 믿음을 키워갑시다!
나를 위한 믿음이 되고, 그들을 위한 믿음이 되어봅시다.

일 년의 절반인 6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을 잘 마무리하시고, 더 따뜻한 7월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3주간 금요일>(7.1)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
'구원받는 길!'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하십니다.

그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2-13)
예수님의 이 말씀이 참으로 기쁨과 희망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내가 죄인이라는 고백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리사이와 세리가 함께 기도했지만, 자신을 한없이 낮추며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세리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셨고(루카18,9-15 참조), 돌아온 탕자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신 아버지의 모습 때문입니다(루카15,11-32 참조).

내가 구원받고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죄인이라는 고백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십자가 사랑 앞에서 금방 확인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십자가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늘 짧고 굵은 세리의 기도 밖에 드릴 수 없는 나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18,13)
오늘 독서인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십자가의 완전한 사랑을 망각하면서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에 가난한 이들을 망하게 하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주님의 파멸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축제를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를 애가로 바꾸리라."(아모8,10)
이제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3주간 토요일>(7.2)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마태9,15)
'예수님과 함께!'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이어서 새것과 헌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9,17)고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 신랑은 예수님이고, 손님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며, 신랑을 빼앗길 날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새 포도주는 예수님 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고, 새 부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아내야 하는 회개하는 우리들을 상징합니다.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중시했던 것은 율법입니다.
율법 규정 그 자체요, 단식 규정 그 자체입니다.
바리사이의 기도에 드러나 있는 것처럼(루카18,12 참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일주일에 두 번 단식했고, 그것이 의롭게 되는 절대적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율법도 모르는 사람들, 율법도 지키지 않는 먹보요 술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좋아하신 단식, 곧 단식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이지 않을까?
끊임없이 새로워지려고 노력하는 회개이지 않을까?
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새 포도주)을 잘 맞이하기 위해 악습을 끊어내는 모습(새 부대)이지 않을까?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형식이나 외적인 모습에 집중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좋아하신 본질에 더 집중하는 우리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기뻐 즐거워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함께 노력해 봅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