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0주간 수요일>(6.8)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 '율법의 완성과 양다리?'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해방)을 위해 메시아(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생명처럼 여기고 있었던 율법을 파괴하러 오신 분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완성의 의미'는, 율법과 예언서의 본질인 '사랑'이요, '모두의 구원'입니다. 법의 잣대로 너와 나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고, 지키는 이와 지키지 않는 이를 갈라놓는 것이 아니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까지도 구원의 잔치에 참여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율법의 완성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내내 이 완성을 위해 땀 흘리셨고, 마침내 십자가 수난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1열왕18,21) 하느님과 바알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한 하느님의 예언자인 엘리야가, 바알 신의 예언자들 사백오십 명과 대결하여 승리함으로써,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합니다. '너는 왜, 나처럼 율법의 완성을 위해, 땀 흘리지 않느냐?' '너는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이냐?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요, 예수님께서 지금 나에게 던지는 물음이라고 묵상되었습니다. 오늘도 세상 가치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으면서 양다리를 걸치라고 유혹할 것 같습니다. 이 유혹을 성령의 힘으로 물리치고, 율법의 완성을 위해 더 노력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모님 제대 차림하고 오늘 1독서 해ㅆ답니다 길다고 말씀하시는 자매님께 제가 좋아하는성경부분이라 기쁘다고 하면서 침착하게 선포했답니다 모두 열심히 들으셔서 기뻤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1열왕18,2) 잃어버린 양 한 마리까지도 구원의 잔치에 참여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저녁에 기도회 7명으로 출발했습니다 기도 열심히 할께요 고모님 싸랑합니다. |
<연중 제10주간 목요일>(6.9)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능가하는 의로움!'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이란,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는 율법 규정 그 자체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살인 금지 규정을 능가하는 것들, 곧 살인에 이르게 하는 분노를 잘 다스려야 하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5,23-24) 살인에는 '육체적 살인'도 있지만, '정신적 살인'도 있습니다. 정신적 살인은 '생각과 말로 너를 죽이는 행위들'입니다. 뒤에서 너에 대해 험담하거나 악담하는 행위들이고, 성을 내고 바보라고 하고, 멍청이라고 말하는 행위들입니다. 우리의 이런 살인 행위들로 인해 많은 교우들이 지금 냉담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육체적 살인 금지를 뛰어 넘어 정신적 살인까지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입으로 나오는 것들, 곧 마음 안에서 나오는 것들이 너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무심코 툭 던진 말 한마디가 때로는 너에게 비수로 꽂히기도 합니다. 비수를 꽂아놓고도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양 무관심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나의 모습은 어떤가? 내 마음 안에서 흘러나오는 나의 생각과 말은 어떤가? 나의 행위들이 너에게 힘이 되어주고, 너를 살리는 행위들인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복음 환호송)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10주간 금요일>(6.10)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5,29) '회개하는 사람들!' 요즘 우리가 듣고 있는 복음 말씀은 '산상설교(산상수훈)', 곧 예수님께서 가파르나움 언덕 위에서 제자들과 군중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산상설교'는 너무나 분명하고 간결한 말씀이어서, 특별한 해석이나 이해의 도움이 필요 없는 '문자적 의미'로 다가오는 말씀들입니다. 그대로 실행하면 되는 말씀들입니다. 오늘 복음(마태5,27-32)은, '간음과 이혼'에 관한 말씀으로, '극기하고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극기'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욕심 등을 이성적인 의지로써 눌러 이기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규정된 '간음 금지' 규정을 언급하시면서, 이것에 더해 '정신적 간음인 음욕을 단호하게 끊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끔찍하게 다가옵니다.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리라.'고, 또 '오른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행한다면, 지금 우리 주위에는 불구자 천국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만큼 '단호하게 죄의 유혹을 끊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단호하게 극기하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께서 도와주시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여정'입니다. '불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으로 바뀌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 여정'은 또한 '회개의 여정'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 곧 '회개하는 사람들과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날마다 회개합시다!' 나---ㅎㅎ예비자교리 느므 즐거워요 ㅎㅎ 선포 예수님의 첫선포 하느님 나라가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우리는 하느님 나라백성 기쁜소식good news |
울 고모 ----베리베리굿! 저도 기뻐요.아녜스는 성령 안에 사시는 것 같아요.성당 제대도 차리고 성당일을 많이 하다보면 복음정신에 어긋나는 것들도 보일 수 있어요. 사제나 사목위원들의 좋지않은 모습도 보이고 이럴때 모든기쁨도 사라지고 악의 세력이 들어올 수도 있담니다. 프란치스코총회장이기에 더 조심하고 공동체 안에서 모범이 되어야해요.내조 잘 하셔야지요.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고 분별력이 필요하고.좋지않은 말은 삼가하며.침묵도필요해요. 아녜스가 말씀 전하는 은사에 기쁨을 느껴 고모도기뻐요. 하느님께서 큰 봉사에 쓰시려고 점지하셨다고믿으며,저도기쁘고감사드립니다. 나---네 고모님!!! 곰곰히 마음에 새기는 침묵 명심명심 할께요 ----사람보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지혜를 주십사 지금 막 기도합니다. |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6.11)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 오늘은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행의 동반자였던 '성 바르나바 사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바르나바'는 사도행전의 말씀인 오늘 독서가 전하고 있는 것처럼,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고 오늘 독서는 전합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모습을 통해서 복음 선포의 사명인 '예언직의 모습'을 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무엇을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바르나바 사도가 간직하고 있었던 모습입니다. 곧 '착한 사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착한 사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자기 것을 모르는 바보,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바보, 그래서 기쁘게 잘 나누는 바보, 하느님께만 온전히 의탁하는 바보, 바로 이런 바보가 착한 사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의 모습이지 않을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지금 여기에서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은 이렇습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무상선물이다.' 그래서 참되게 믿는 사람들은 되돌아 올 것을 바라지 않으면서 나눕니다. 그것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정도로 드러나지 않게 겸손하게 기쁘게 하느님의 것을 나눕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자들은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만 의탁하면서, 예수님 말씀처럼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떠날 수 있으며, '거저 받은 복음과 생명'을 거저 나눕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복음 환호송) |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6.13)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5,39) 오늘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성인 중에 한 분이신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뜻깊은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1195년 포르투칼 리스본에서 태어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와 성 십자가 수도회를 거쳐, 모로코에서 순교한 작은형제회 수사 다섯 명을 보고, 작은형제회로 옮겨오신 분입니다. 안토니오 성인을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라고 부릅니다. 이유는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파도바에서 많은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전해지는 일화에 의하면 안토니오 성인의 탁월한 설교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아 파도바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거나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안토니오 성인께서 강론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동이 뒤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습니다. 입은 다물고 행동으로 말합시다. 우리는 불행히도 말로는 부풀어 있고 행동에는 텅 비어 있습니다."(성무일도, 고유독서 참조) 안토니오 성인은 사부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그랬던 것처럼 복음을 그대로 실행하려고 애쓰셨고, 그래서 파도바의 많은 사람들이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성 안토니오처럼, 지금 여기에서 행동으로 믿고 행동으로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복된 안토니오를 뛰어난 설교자요 곤경 속의 전구자로 보내 주셨으니, 저희가 그의 도움으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게 하소서."(본기도) 안토니오 성인은 '곤경 속의 전구자'로 알려진 분이십니다. 무엇을 분실했거나, 혹은 영과 육의 고통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 안토니오 성인을 부르면서 기도하면 도와주신다고 합니다. "안토니오 성인이시여, 곤경에 처한 저를 도와주소서." |
<연중 제11주간 목요일>(6.16)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6,9) '나의 기도가 빈말이 되지 않게 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보니,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너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주님의 기도를 온전하게 바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의 기도 끝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6,14-15) 그러니 '용서와 화해'는 '하느님의 언어'이며,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내가 너에게 베푸는 특전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한 행위'이며, '나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는 신적 행위'입니다. 요즘 독서를 통해 만나는 그리스도교 초기 두 예언자인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한 하느님의 말씀도 결국은 서로 용서하고 화홰하라는 말씀, 곧 하느님과 화해하고, 너와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살아생전에 엘리사는 기적들을 일으켰고, 죽어서도 그의 업적은 놀라웠다."(집회48,14) 엘리사를 통해서 일어난 기적들과 그의 업적은 무엇이었을까? '용서와 화해의 기적', 그래서 많은 이들이 주님께로 돌아와 다시 살아난 '회개의 기적'이 아니었을까?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화답송)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온 마음으로 바치는 의인, 너를 용서하는 의인, 그래서 이제 영원히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의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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