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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2022년 연중 제6주일)인간 삶의 두 가지 극단적 운명 The Two Extreme Fates of Human Life

                                           
                                              인간 삶의 두 가지 극단적 운명
                                          The Two Extreme Fates of Human Life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에례 17:5-8
2독서: 1코린 15;12.16-20
복음: 루카 6:17.20-26


이번 주일 복음 말씀인 진복팔단(眞福八端)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복음의 역사성에 대해 2주 전에 살펴본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주 전 우리는 네 명의 복음사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본질적인 의미에서 벗어나지는 않으면서 각자가 소속된 공동체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 여러 측면 중에 하나의 시각을 부각하여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팔복(八福)을 모두 이야기하지만 루카 복음사가는 그중 네 가지만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루카는 네 가지의 복을 이야기하면서 이와 대칭(대립각)을 이루는 저주를 아아(탄식을 나타나는 의성어)’와 함께 이야기하여 네 가지의 복을 강조합니다. 또한 마태오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간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지만, 루카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하여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마태오는 영적인 가난(‘영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 반면 루카는 물질적 가난(‘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두 복음 사가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은 조금도 바꾸지 않는 세부 사항일 뿐입니다. 두 분의 복음사가는 각자 독특한 방식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하면 잊어버렸을 새로운 측면을 강조합니다. 루카는 숫자적인 면에서는 덜 완전하지만, 본질적으로 그 의미를 완벽하게 나타냅니다.

진복팔단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즉시 첫 번째 구절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구절이 말하는 그 지평은 훨씬 더 넓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 나라의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위로를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는 지상에서의 삶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하여라그리고 불행하여라라는 대칭되는 표현으로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두 개의 범주와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 복음 때문에 박해와 모욕을 당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복을 받는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부유하고, 배부르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그리고 박해를 당하는 사람들을 단순히 찬양하지 않는 것과 같이, 부자, 배부른 사람들, 웃고 칭찬받는 모든 사람들을 단순히 악으로 단죄하지도 않으십니다. 그 차이(구별점)은 좀 더 심오한 곳에 있습니다. 요점은 당신이 당신의 안전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 당신의 삶을 어디에 근거하여 구축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다시 말해 당신이 당신의 삶의 근거를 지나가는 모든 것에 두고 있는지 아니면 영원한 것에 두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은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분리되어 완벽히 반대되는 두 운영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의 동쪽과 서쪽을 나누는 그리니치 자오선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니치 자오선은 고정되어 있습니다. 마치 적도가 세계의 가난한 남구와 부유한 북구를 나누는 것과 같이 동쪽 땅은 서쪽으로 이동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행복한 사람들불행한 사람들을 나누는 구분선은 다릅니다. 이는 움직이는 경계로서 매우 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가능할 뿐 아니라, 복음에서는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하라고 강력하게 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난해지도록 초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상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였다는 것은 그것을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간 사람들은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며, 자유로우며, 형제요 자매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합니다. 누가 이런 가난을 마다하겠습니까?

 
<연중 제6주일>(2.13)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루카6,20.24)

'행복하십니까?'
오늘 복음(루카6,17.20-26)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참행복과 불행 선언'입니다.
고대 그리스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돈이나 경제에 관심이 많은 우리의 기준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아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처럼 다가옵니다.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모욕과 중상을 받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니까요.
코로나 팬데믹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이들이 많은 지금, 오늘 복음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받아들여야 하고, 그것이 전부의 의미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떠나갈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돈이 결코 참행복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행복 지수가 높은 나라가 부탄왕국이라고 합니다. 부탄 왕국은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해 있는 작은 나라이고, 아주 가난한 나라입니다.
그것을 보면 결코 돈이나 경제가 행복의 절대 기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행복은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라고...
참행복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욕심과 탐욕을 내려놓고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 겸손함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음과 겸손 안에서,
언제나 오늘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잠시 후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게 될 때, 그곳에서 영원히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화답송)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15,19)

??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아끼지 마라
좋은 음식을 다음에 먹겠다고 냉동실에 고이 모셔두지 마라.
어차피 냉동식품 되면
신선함도 사라지고 맛도 변한다.
맛있는 것부터 먹어라.

좋은 것부터 사용하라.
비싸고 귀한 거라고 아껴뒀다 나중에 쓰겠다고 애지중지하지 마라.
유행도 지나고 취향도 바뀌고 몇 번 쓰지도 못하고 버리게 되는 고물이 된다.

특별한 날을 기다리지 마라.
그런 날은 고작 1년에 몇 번이다.
하루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라.
모든 것은 내 맘에 달려있다.
오늘이 가장 소중한 날이다.

때가 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시름시름 아프면 나만 서럽다.
계획만 짜다 시간 다 간다.
실행할 수 있으면 맘먹었을 때 바로 실행하라.

언제나 기회가 있고 기다려 줄 것 같지만 모든 것은 때가 있다.
☆ 김수환 추기경.

작음과 겸손 안에서,
언제나 오늘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잠시 후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게 될 때, 그곳에서 영원히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화답송)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15,19)


하루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서 작음과  겸손안에서  언제나 감사하는  오늘이  매우 특별하고 행복했으면 차암 좋겠습니다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2.14)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8,12)
오늘 복음(마르8,1-13)은 예수님의 정체를 두고 벌어진 '논쟁사화'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과 논쟁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바리사이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들의 시험과 요구는 당연해 보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이스라엘에는 메시아대망 사상이 팽배해 있었고,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강한 힘을 지닌 정치적 메시아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시험과 요구는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정치적 메시아이신지 정체를 드러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시험과 요구를 거부하십니다. 더 나아가 믿음이 없는 그런 악한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야고1,2) 라고 말합니다.

시련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이 보편성 앞에서 두 부류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련을 긍정하면서 이겨내고, 그것을 하나의 기회로 만드는 부류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시련을 부정하면서 주저앉는 부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전자'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이 십자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메시아요 그리스도로 굳게 믿는 이들은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부활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부활하는 길을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권고처럼,
지금 여기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시련을 기쁨으로 여기는 것, 바로 기적이 아닐까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해 있는 믿음 안에서 시련을 이겨내는 것, 이것이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기를 바라시는 기적이 아닐까요?
기적을 요구하기보다,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연중 제6주간 화요일>(2.15)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21)
'깨달음을 위하여!'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야고1,12.17)
날마다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깨닫고, 또한 찾아오는 시련을 잘 견디어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침묵'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침묵 안에 머물면서 '되새김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무는 '거룩한 행위'이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머무시는 '신적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이 '거룩한 행위'와 '신적 행위'가 '내 안에서 함께 일어날 때', 우리는 말씀을 보다 더 잘 깨닫게 되고, 시련을 잘 견디어 내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누룩의 의미'는,
더 큰 악의 모습으로 부풀어지게 만드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거짓과 위선'이라고 묵상했습니다.

'거짓과 위선을 조심합시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누룩'은 '빵'을 만들 때 꼭 필요한 재료입니다.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린 제자들은,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8,15)는 예수님의 분부에, 자기들이 가져오지 않은 빵을 생각하면서 수군거립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마르8,17)
그리고 두 번에 걸쳐 일으키신 '빵의 기적'을 상기시켜 주시면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당신과 함께하고 있음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완고함을 깨워 주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야고1,12.17)

날마다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깨닫고, 또한 찾아오는 시련을 잘 견디어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침묵'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침묵 안에 머물면서 '되새김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무는 '거룩한 행위'이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머무시는 '신적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이 '거룩한 행위'와 '신적 행위'가 '내 안에서 함께 일어날 때', 우리는 말씀을 보다 더 잘 깨닫게 되고, 시련을 잘 견디어 내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누룩의 의미'는,
더 큰 악의 모습으로 부풀어지게 만드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거짓과 위선'이라고 묵상했습니다.

'거짓과 위선을 조심합시다!'

<연중 제6주간 목요일>(2.17)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29)
'너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8,27) 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마르8,2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8,29)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2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물으십니다.
그리고 같은 물음을 열두 제자들에게 물으시고,
또 하나의 제자인 나에게도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예수님께서 '머리에 기름부은 받은 자'로서, 우리의 '구세주'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정답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십니다.
곧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이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반박하는 베드로를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으며 따라가고 있는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이시자,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런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야고2,1)
모두를 위해 모든 것이 되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늘 기억하면서, 사람을 차별하는 '악한 심판자'가 되지 말고, 모두를 사랑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6주간 목요일>(2.18)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
오늘 복음(마르8,34-9,1)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구원의 길은 이렇습니다.

첫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못한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깨달음의 지혜를 청해야 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오늘 실천하지 못한 나의 죄, 어제보다 더 실천하지 못한 나의 죄,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부끄럽게 여긴 나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야고2,14-24.26)에서 야고보 사도는 '실천있는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2,14.17.24-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삶과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몸소 짊어지시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완전하게 걸어가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시고, 당신께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 아버지를 따르셨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8,35)
오늘도 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의 부끄러움을 내려놓고,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갑시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삶는 이!"(화답송 후렴)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제목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2.18)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
오늘 복음(마르8,34-9,1)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구원의 길은 이렇습니다.

첫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못한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깨달음의 지혜를 청해야 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오늘 실천하지 못한 나의 죄, 어제보다 더 실천하지 못한 나의 죄,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부끄럽게 여긴 나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야고2,14-24.26)에서 야고보 사도는 '실천있는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2,14.17.24-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삶과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몸소 짊어지시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완전하게 걸어가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시고, 당신께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 아버지를 따르셨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8,35)
오늘도 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의 부끄러움을 내려놓고,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갑시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삶는 이!"(화답송 후렴)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 ? ? ?  ✍소노 아야코.계로록.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
저자 소노 아야코는 1931년 생이며, 이 저자는 나이 40세가 되던 해부터 노년에 경계해야 할 것들을 메모 형식으로 기록하여 계로록(戒老錄) 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일본에서 큰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발췌한 내용을 보면...!
1.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보다 자신에게 더욱 더 엄격해져야 한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귀찮아도 많이 걷고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2. 생활의 외로움은 아무도 해결해 줄 수 없다. 외로움은 노인에게는 공통의 운명이자 최대의 고통일 것이다. 매일 함께 놀아주거나 말동무를 해 줄 사람을 늘 곁에 둘 수는 없다. 목표를 설정해서 노후에 즐거움을 주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3.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거짓으로 표현하지 말아야 한다. "됐어" 라고 사양하면 젊은 세대는 주지 않는다. "나도 먹고 싶은데 하나씩 돌아가나?" 라고 말 해야 한다.
4. 같은 연배끼리 사귀는 것이 노후를 충실하게 하는 원동력 이다. 노인에 있어서 정말로 상대가 되어 줄 수 있는 상대는 노인뿐이다.
5. 즐거움을 얻고 싶다면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무엇인가를 얻고 싶으면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6. 혼자서 즐기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나이가 들면 친구도 한 사람 한 사람 줄어 든다.
아무도 없어도 어느날 낯선 동네를 혼자서 산책할 수 있는 고독에 강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7. 돈이면 다라는 생각은 천박한 생각이다. 돈은 노후에 중요 하지만 돈이면 다라는 생각은 세상을 너무 황량하고 냉정하게 만든다.
8. 노인들은 어떠한 일에도 감사의 표현을 할 줄 알아야 한다. 훈훈한 노후를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것 중의 하나는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감사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인생이란 없다.
9. 노인들은 새로운 기계 사용법을 적극적으로 익혀야 한다.
10. 노인들은 몸가짐과 차림새를 단정히 해야 한다.체력이 떨어지고 건강이 약화되면 누가 뭐라하지 않아도 자세가 흐트러진다.
11. 노인들은 매일 적당한 운동을 일과로 해야 한다.몸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12. 여행은 많이 할수록 좋다.여행지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디서 죽든 마찬가지이다.
고향에서 죽는다해서 무엇이 좋은가? 자필의 화장승낙서만 휴대하고 다니면 된다.

13. 관혼상제, 병문안 등의 외출은 일정 시기부터 결례해도 된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부터 기도하는 것이다.

14.재미있는 인생을 보내었으므로, 나는 언제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정도로 늘 심리적 결재를 해 둔다.
15. 유언장 등은 편안한 마음으로 미리 준비해 둔다.사후에 유산을 둘러싸고 남은 가족들이 다투는 것보다 비참한 일은 없다.
16. 죽음은 두려운 것이지만 죽는 것은 한 번 뿐인 것이고,대부분의 병은 잘 낫지 않는다. 병을 친구로 삼는다.
17. 늙어가는 과정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자연스레 주어진 늙음의 모습에 저항할 필요는 없다.
18. 혈육 이외에 끝까지 돌봐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19. 죽는 날까지 활동할 수 있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20. 행복한 일생도 불행한 일생도 일장춘몽이다.
21. 노년의 가장 멋진 일은 사람들과의 화해이다.

깊이 새겨 실천하셔서
늘 건강하고 행복한 노후를 즐기시길 바랍니다


? 참된 삶 ?
조금 손해 본 듯 살아야 관계가 좋아지고,
조금 져주는 듯 살아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조금 모자란 듯 살아야 삶이 활기차지고,
조금 부족한 듯 살아야 인생이 깊어집니다.
조금 부족하고 모자란 듯 살아야
좋은 것들이 채워져 인생이 풍성해 집니다.

삭막한 인생길에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는 마음이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내가 잘난 것이 아니라 조금 부족한 듯 모자란 듯
여유를 두는 삶을 영위하십시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들어와
함께 행복을 엮어 즐길 수 있는 삶이 지속되시기를 빕니다

웃지 못한 날은 실패한 날이다.
★☆멋있는 교황님
종교와 상관없이 좋은 내용! 멋진 글입니다.
♤내것은 하나도 없다♤
<연중 제6주간 토요일>(2.19)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마르9,2)
오늘 복음(마르9,2-13)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화'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타볼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화'는 장차 맞이하게 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라는 '희망'과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예수님의 신원'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반드시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습니다."(마르9,9)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그분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우리의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져야 하기에,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화는 곧 '우리의 희망'임과 동시에 '우리가 드러내야 하는 사화(기적)'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화는 지금 여기에서 '나의 회개와 부활'이라는 '거룩한 변화'를 통해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 거룩한 변화가 쉽지 않습니다.
내 앞에 놓여 진 걸림돌 앞에서, 나 자신을 깊이 바라보기보다는, 너를 바라보면서 네 탓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독서(야고3,1-10)가 전하고 있는 것처럼, 달린 입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기보다는 너를 저주하거나 험담하기를 좋아하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 결정적으로는 나의 약한 믿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거룩한 변화'는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Imago Dei)'인 '신성의 드러남'입니다.
내가 하느님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입니다.

오늘도 겨자씨 한 알 만 한 믿음을 청하고,
십자가 너머에 있는 부활과 승천을 향해 나아갑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