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유명하고 숭고한 사랑의 찬송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예레 1, 4-5.17-19 2독서: 1 코린 12, 31; 13, 13 복음: 루카 4, 21-30 오늘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제2독서를 묵상하도록 합시다. 이는 잘 알려진 성 바오로의 자선(사랑)의 찬가입니다. 자선이란 사랑의 종교적 용어입니다. 이는 아마도 가장 유명하고 숭고한 사랑의 찬송가일 것입니다. 기독교가 창시되었을 때, 사랑에 대한 찬송은 이미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저명한 사람은 이에 대해 장문의 논문을 쓴 플라톤입니다. 그 당시의 사랑에 대한 통칭은 에로스(에로티즘, 에로티시즘 등의 어근임)이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추구와 욕망에 대한 이 강렬한 사랑의 개념이 성경적인 개념을 표현하기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에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아가페’로 대체하였는데, 이가 지금과 같이 너무 좁은 의미인 ‘자선’과 ‘자선 활동’만으로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헌신’과 같은 단어로 번역되었어야 합니다. 두 종류의 사랑(에로스와 아가페)의 중요한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사랑, 또는 에로틱한 사랑은 배타적입니다. 이는 두 명의 관계에만 제한됩니다. 세 번째 등장인물이 있다면 이는 배신으로 끝이 납니다.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사랑의 위기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베푸는 사랑, 즉 아가페에 근거한 사랑은 모든 사람을 포용하며, 여기에선 원수조차 포용합니다. 첫사랑의 고전적인 공식은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의 비올렛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프레드, 내가 당신을 사랑한 만큼 나를 사랑해 주세요.’ 반면에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말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와 같은 사랑은 순환되고 확장됩니다. 또 다른 차이점은 에로틱한 사랑은 그 본성상 오래 지속되지 않거나 대상을 바꿔가면서, 즉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짐으로써만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 바오로가 말씀하신 사람은 ‘존재하는’ 사랑입니다. 이는 믿음과 희망이 사라진 후에도 영원히 지속되는 유일한 것입니다. 추구하는 사랑과 베푸는 사랑의 두 가지 사랑 사이에는 첨예한 분리와 대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상호 보완과 발전, 성장이 있습니다. 에로스는 우리에게 출발점을 제시하고 아가페는 종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둘 사이에는 사랑하고 성장하고 교육받는데 필요한 공간이 존재합니다. 가장 흔한 경우인 부부의 사랑을 예로 들어봅시다. 두 배우자 사이의 사랑에서 처음에는 에로스, 매력, 상호 욕망, 상대방을 정복하고자 하는 일종의 자기 중심성이 우세합니다. 하지만 사랑의 행로에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부드러운 관계,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잊고, 아이들에게 자신을 투신하는 능력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차원의 사랑으로 풍요로워지기까지는 서로의 노력이 절실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 길의 끝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적용 가능합니다. 우리 시대의 연예계와 광고계는 젊은이들의 마음에 사랑은 에로스에 국한되고, 에로스는 곧 성관계에만 집중된다는 개념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삶이란 아름답고 젊고 건강한 세상에서 지속되는 서사시와 같다는 환상을 심어줍니다. 늙음이나 질병이 없고 누구나 원하는 만큼 돈을 쓸 수 있는 곳이라는 환상은 거대한 거짓말이며, 이에 한 번 실망하면 좌절과 가족과 사회에 대한 빈항을 일으키고 범죄의 세계로 들어가게 합니다. 이런 때에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이 무엇이라 말하든 비판적인 감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1.31)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5,8) 오늘은 청소년들과 고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고 불리는 '성 요한 보스코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들과 주보축일을 맞이한 살레시오 가족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성 요한 보스코 사제는 청소년들을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살레시오 수도회(남자)와 살레시오 수녀회(여자)를 설립했고, 이 수도회는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의 복지와 복음화를 위한 사도직 활동을 해 오고 있습니다. 성 요한 보스코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나는 언제나 그들을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노력하고 또 사제 직분을 이행해 왔습니다." 오늘 복음(마르5,1-20)은 예수님께서 군대라는 이름을 지닌 아주 강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5,19) 더러운 영으로부터 해방된 그는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합니다. 복음 선포자로 대변신합니다. 날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를 바라시는 기적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더러운 영을 몰아내고, 성 요한 보스코 사제처럼 너를 살리는 하느님 구원 사업에 동참하도록 합시다! 특히 세상과 교회의 미래인 청소년들에게 깊은 관심과 따뜻한 사랑을 나누어 줍시다! "하느님, 복된 요한 사제를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도 똑같은 사랑의 불로 타올라, 오직 주님을 섬기며 형제들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게 하소서."(본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설>(2.1)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12,40) 오늘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 민족의 큰 명절인 '설'입니다. 설명절을 맞이하여, 오늘 제1독서(민수6,22-27)가 전하는 '아론의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안에 충만히 내리길 청하면서 기도드립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6,24-26) 설명절에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 살다가 저 세상으로 떠나가신 조상님과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어른께 세배를 드리고 덕담과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눕니다. 우리도 언젠가 때가되면 반드시 떠나갑니다. 오늘 복음(루카12,35-40)은 그 때가 언제일지 모르니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12,35-36) 그리고 오늘 제2독서(야고4,13-15)에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네 인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4,14) 이 세상으로 소풍 왔다가 때가 되면 한 줌의 흙(재)으로 돌아가는 우리네 인생,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우물 안에 갇혀 있는 개구리처럼 살지 말고, 조금만 더 진지하게, 더 넓고 깊게 삶을 바라보면서 그 결정적인 때를 잘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
<주님 봉헌 축일>(2.2) -축성 생활의 날-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2,22) '봉헌의 삶!' 오늘은 아기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주님봉헌축일'입니다. 그리고 '수도자들의 날'인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 기쁘게 봉헌의 삶, 증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수도자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봉헌되십니다. 예수님께서 봉헌의 삶을 사십니다. 이 봉헌은 당신 뜻대로가 아닌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사시겠다는 의미이며, 그리고 그 결정체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희생제물인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 열두 제자들로부터 시작된 수많은 제자들, 성인성녀들, 예수님 봉헌의 순간을 목격한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와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많은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과 오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사람들입니다.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 완전하게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을 지금 여기에서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봉헌축일을 맞이해서 하느님께 봉헌한 나의 약속을 기억하고, 이 약속을 잘 실행하고 있는지 한번 조용히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부족함을 하느님 자비에 맡겨드리고, 다시 '봉헌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느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비오니, 사람이 되신 외아드님께서 오늘 성전에서 봉헌되셨듯이, 저희도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저희 자신을 봉헌하게 하소서. 아멘."(본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봉헌하는 아녜스와 꽃다발로 하늘로 올려 분향같은향으로 예수님께서 기쁘시면 좋겠습니다 아멘 |
<연중 제4주간 목요일>(2.3)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6,7)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면서,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그러면서 떠날 때에는 지팡이 외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파견된 그곳에 잘 머물고,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은 더러운 영들인 마귀를 쫓아내는 일인데, 어떻게 해야 마귀를 쫓아낼까?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무당이 굿을 할 때, 그곳에 어떤 사람이 묵주나 목걸이 등으로 예수님 십자가를 지니고 있으면 굿이 잘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더러운 영인 마귀를 쫓아내려면 내 몸과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깨끗한 영인 성령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다는 것은, 열두 제자들을 그렇게 무장시켜 파견하셨다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는 것은, 위험으로부터의 대비 측면도 있겠지만, 함께 힘을 모아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의미로... 성직자들을 포함한 모든 믿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라는 '전체를 위한 각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것이 그만큼 시급한 과제이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 건설될 수 있다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 안으로 파견된 제자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봉헌하는 아녜스와 꽃다발로 하늘로 올려 분향같은향으로 예수님께서 기쁘시면 좋겠습니다 아멘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