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사의 은혜/연중시기

<연중 제5주일>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평신도의 사명The Irreplaceable Mission of Lay People

2022년 연중 제5주일
                                               The Irreplaceable Mission of Lay People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평신도의 사명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이사 6:1-2, 3-8
2독서: 1코린 15:1-11
복음: 루카 5:1-11


고기잡이에서의 기적은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를 확신시키는 데 필요한 증거였습니다. 물가로 돌아와서 그는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이 이야기의 클라이막스(절정)을 이끌어 내시고, 이 이야기가 기록된 이유를 알려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협력자들의 사명을 설명하기 위하여 두 개의 이미지(비유)를 사용하셨는데, 이는 어부와 목자(양치기)의 이미지(비유)입니다. 이 두 가지 이미지를 오늘날 적용하기 위해서는 현대인으로서의 자신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하여 추가 설명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모든 이는 어떤 사람에게 잡히는사람이 되길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양 떼의 양이길 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첫째, 우리는 일반적인 낚시에서는 어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물고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의 낚시는 다르다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목자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인 양치기에서는 목자(양치기)는 양 떼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양 떼를 위해 양에게 풀을 먹이는데, 이는 양 떼가 젖과 양털과 어린 양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말씀에서는 이와는 다른 현상이 벌어집니다. 물고기를 섬기는 이는 어부이며 양을 위해 자신을 바칠 정도로 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는 목자입니다. 이에 낚시를 당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파도 속 추운 밤바다 난파선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물이나 구명보트가 그들을 구하는 것은 굴욕이 아니라 그들의 가장 큰 소원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부의 사명을 폭풍우가 치는 삶의 바다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는 구명보트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또 다른 문제(오늘날 현대인에게 적용하려고 할 때 생길 수도 있는 문제)도 나타납니다. 목자와 어부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때에 필연적으로 어부의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고 물고기의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고, 이와 마찬가지로 양치기와 양떼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양치기와 물고기의 관계처럼 어부와 물고기의 관계는 불평등과 우월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적 사상을 더했을 때, 양떼의 여러 양 중의 하나가 되고 그들의 우위에 서는 목자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그 누구도 어부나 목자의 역할만을 하는 이는 없으며, 그 누구도 물고기나 양의 역할만을 하는 이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자격을 지니고 있으며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물론 어부이자 목자일 뿐이지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전에 베드로 또한 두 번 이상 고기의 역할을 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물 위를 걷다 두려움에 빠져 익사할 위기에 놓였을 때 말 그대로 예수님에게 낚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배신 후에 다시 낚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몸소 경험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목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하게 배웠습니다. 그는 깊은 혼돈 속에 빠졌다 건져진 경험을 통하여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비록 자격은 다르지만 세례받은 모든 이가 잡히는 물고기이며 동시에 어부가 되기에 평신도들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제는 어부보다는 목자로서 일하는 데 더 자신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멀리 있는 사람을 찾는 것보다 자신이 원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말씀과 성사를 베풀게 됩니다. 이에 어부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에 사회 깊은 곳에서 활동하는 평신도의 역할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대체 불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던지자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주교와 사제들)이 다른 배에 있는 사람들(평신도)에게 손짓하여 도와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연중 제5주일>(2.6)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
'대박나는 길!'
오늘 복음(루카5,1-11)은 '고기잡이 기적'과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시몬 베드로에게 다가가셔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르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가 잡힙니다. 한마디로 대박이 납니다. 몹시 놀란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5,8)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몬에게 이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5,10)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시몬 베드로와 동료 어부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성경 말씀은 항상 나 자신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특히 복음은 예수님께서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와야 하고, 그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그리스도의 책' 또는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제2독서(1코린15,1-11)에서 사도 바오로는 '케리그마(kerygma)', 곧 우리가 믿어야 할 교리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케리그마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1코린15,3-5 참조)

케리그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늘 연결되어 있도록 합시다!
그것이 바로 '주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며,
또한 지금 여기에서 '대박나는 길'이라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과 독서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5주간 월요일>(2.7)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6,56)
'성전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 있는 겐네사렛 땅으로 가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이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예수님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입니다.
병든 이들이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기만 했는데도 그들의 병이 나았으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로 지금까지, 앞으로도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며 따라가고 있는 근본이유이며, 지금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할 기적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기적의 삶'입니다.
어제의 나약함과 고통을 이겨내고 '오늘 부활하는 삶'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는 구체적인 나의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에 닿아 있어야 하고,
나의 말이 예수님의 말에 닿아 있어야 하고,
나의 행위가 예수님의 행위에 닿아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서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1열왕8,1-7.9-13)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지은 솔로몬이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짙은 구름 속에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신을 위하여 웅장한 집을 지었습니다.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곳입니다."(8,12)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이 바로 우리의 성전, 나의 성전입니다.
기적을 낳고, 나를 부활하게 하는 성전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연중 제5주간 화요일>(2.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고 있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르7,6)
'진정한 코르반?'
오늘 복음(마르7,1-13)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언급하신 '코르반'이라는 말의 뜻은, 유다인들이 돈이나 재산 등 자신의 소유물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일종의 서약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코르반으로 바쳐진 재물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져 사람들이 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입술로만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이라고 하고, 자신이 가진 재물을 나누지 않으면서, 나눔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코르반을 이용했습니다.

'현대판 코르반?'
교회가, 사목자가, 그리고 믿는 이들이,
사회적 약자들인 가난한 이들과 고통 받는 이들과 온 존재로 함께 하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

말로만 서약하고,
행동으로는 서약하지 않는 것!

입으로는 "아멘, 아멘!" 하면서,
삶으로는 아멘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

나는 오늘 미사했고, 기도했고, 말씀을 묵상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면서도,
구체적인 이슈나 문제 앞에서는 예수님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현대판 코르반'입니다.

'진정한 코르반'은 규정과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로마12,1 참조)

'우리의 믿음', '나의 믿음'이 입술로만 외치는 구호나, 보여주는 행위에 그쳐서는 안 되고,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습과 하나가 되는 '참 믿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7,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
비와 바람을 견디며 크는 나무처럼 단단하고 용감하게 ♡주님과 함께 말씀따라♡ 살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연중 제5주간 수요일>(2.9)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르7,20)
'본질의 드러남!'
유다인들의 율법 규정에 따르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정한 음식과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음식에 대한 규정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규정이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 3-21의 규정입니다. 그리고 부정한 음식으로 규정된 대표적인 음식이 '돼지고기'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이어지는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조상들의 전통인 율법 규정들도 소중한 것이지만,
더 소중한 것은 '율법 규정들의 본질'이고, '이 본질의 드러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십니다. 그리고 율법에 규정된 부정한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입에서 나가는 말이 너와 나 그리고 우리를 더럽힌다고 말씀하십니다.
더럽혀진 마음의 창고에서 나오는 것들, 곧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마르7,21-22)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십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의 친교가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생각을 하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가 의미하고 있는 것처럼,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는 '내 마음의 드러남'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규정에 얽매이지 말고, 하느님의 법 자체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 담도록 끊임없이 노력합시다!
그래서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를 살리는 착한 생각, 착한 말, 착한 행동을 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바빌론 강가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짖는 포로들의 모습이랑 겹쳐 보입니다
사막에 뜨는 해
정말 아름다운데요

고통과 시련의 순간이 오면 눈감고 울어서는 안됩니다
그때 하느님의 선물도 같이 오기에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봐야 합니다.
울때가 아니라 선물을 찾아야 할때 입니다 .
아~



****손-나눔
발-건강
얼굴-미소
마음-좋은생각
가득하다못해 넘치는 멋진 하루
고모님께로 좋음 가득하실거예요
싸랑해용. ♡♡♡ .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2.10)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7,28)
'견딤의 믿음!'
오늘은 성 베네딕도의 여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녀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 안에서 상스러운 욕으로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 개(강아지)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개'는 부정한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오늘 복음(마르7,24-30)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지역인 티로 지역으로 가셨을 때,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여자가 마귀 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간청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간절히 매달리는 이방인 여인의 간청을 묵살해 버리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7,27)
이스라엘 백성을 자녀라고 하시고, 이방인 여인을 강아지라고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녀에게는 대단한 모욕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모욕 앞에서 이방인 여인은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께 재차 간청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7,28)
자기에게 해가 될 듯한 말 한마디만 듣거나, 무엇인가 빼앗기기만 하면 내내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예수님께 대한 이방인 여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여인의 큰 믿음을 보시고, 마귀 들린 그녀의 딸을 고쳐주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마르7,29)
고통이나 모욕을 잘 견디어 내는 것은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연중 제5주간 금요일>(2.11) -세계 병자의 날-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7,37)
오늘 복음(마르7,31-37)은,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데려온 병자를 예수님께서는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됩니다.
오늘은 1858년 2월 11일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인 루르드에서 성모님께서 베르나데트(벨라뎃다)에게 첫 번째로 발현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 날을 '세계 병자의 날'로 제정하셔서,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돌보고 있는 많은 의료진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권고 하신 날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로 몰려왔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지금 우리 안에도 많은 병자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이들과 영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올 세계 병자의 날은 더 의미 있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시골 처녀 베르나데트에게 발현하시고, 자신을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 라고 소개하신 성모님께서 온 인류에게 던지신 메시지는 "회개하고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라."입니다.
지금 회개하지 않는 이들, 그래서 아직도 죄 중에 있는 이들이 바로 치유받아야 할 진정한 병자들이 아닐까요?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의 영과 육이 돌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연중 제5주간 토요일>(2.12)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마르8,2)
'공정과 정의!'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에 지쳐있는 당신의 군중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제자들이 갖고 있었던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가량이 배불리 먹고도 일곱 바구니가 남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뜻'입니다.
한 쪽으로 치우쳐있는 모습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잘 사는 하느님의 나라인 '고루 살이의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인, '진정한 의미의 공정과 정의'입니다.
요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좋은 말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공정과 정의'를 모든 후보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가 함께 잘 사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다짐입니다.
이 다짐을 단순히 구호로만 외치는 후보가 아니라,
이 공정과 정의를 보다 더 잘 실현해 낼 수 있는 후보가 대통령으로 뽑혔으면 좋겠습니다.

성경과 복음이 우리에게 재촉하고 있는 바는,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하고 배고픈 이들, 사회적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마르8,5)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땀 흘려 얻게 된 내 것을 가지고 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단 말인가?'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 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은 모든 것의 원주인이신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는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내 이웃을 통해 하느님께 내 드려야 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 성호경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