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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연중 제15주일>(7.10)"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자!'


<연중 제15주일>(7.10)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자!'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합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사랑의 이중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옳게 대답하자, 예수님께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가 자기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10,29-37)를 들려주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에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었을 때, 사제와 레위인이 그를 보고 길 반대쪽으로 피해 갔지만, 그들이 이방인 취급을 하며 무시했던 사마리아인은 그를 돌보아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등장하는 율법 교사나 사제나 사제 곁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은 율법과 율법에 나오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율법의 본질인 사랑을 실천한 사람은 율법과 사랑의 이중계명을 잘 모르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사제나 레위인은 말로만 사랑을 실천했지만, 사마리아인은 말이 아닌 구체적인 행동으로 곤경에 처한 이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는 물질적인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관심은 사랑'입니다.
관심을 갖고 우리 주위를 보면 우리의 이웃이 보일 것이고, 이웃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무관심 속에서 주위를 바라보지 않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큰 걸림돌인 죄입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병우 루카 신부

[최*명]  관심은 사랑'입니다.
관심을 갖고 우리 주위를 보면 우리의 이웃이 보일 것이고, 이웃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무관심 속에서 주위를 바라보지 않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큰 걸림돌인 죄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최*명]  기도로 시작하고 감사로 마치는 주일인 오늘이 특별합니다.
고모님의 축복이 기뻐요
그축복 더 많이 많이 고모님께로요 사랑합니다 하트뿅뿅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7.1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10,34)
'평화가 아니라 칼???'
오늘은 '유럽의 수호성인'이시고,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 불리는 '성 베네딕토 아빠스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과 베네딕토 수도회 가족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파견사화(마태10,1~11,1)의 마지막 부분인 오늘 복음은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단락, 그리고 '버림과 따름',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받을 상'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바라보면,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평화'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데...
평화가 아니라 칼이라니!

칼의 용도는 무엇인가를 자르는 것입니다. 이런 칼이 지니고 있는 '영적인 의미'는 바로 '단호함'입니다.
육적인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먼저 생각하고 사랑하는 단호함!
내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단호함!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지나가는 육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는 단호함!
가장 작은 이들에게 관심을 두는 단호함!
내 안에 있는 습관적인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리는 단호함!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악한 행실에 대명사인 소돔과 고모라의 지도자와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1,16-17)
'이 단호함이 바로 칼의 의미'이고,
'이 단호함 뒤에 참평화가 있다.'는 의미로 묵상되었습니다.
오늘도 '참평화'를 얻기 위해, 지금 여기에서 '단호함을 실행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5주간 화요일>(7.12)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11,20)
'예수님의 분노!'
예수님께서 기적을 많이 일으키신 곳은 예수님 활동의 주무대였던 가파르나움과 갈릴래아입니다. 코라진과 벳사이다도 온 갈릴래아에 포함되는 지역입니다.
예수님 활동의 주무대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지역에서 기적을 많이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강하게 꾸짖으십니다.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불행하여라."
"너 가파르나움! 불행하여라."

복음 안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분노는 '완고함',
곧 '회개하지 않는 모습'에 대한 분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죄)보다는 하느님의 자비를 망각하면서 돌아오지 않는 모습, 곧 회개하지 않는 모습에 대해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지난 주일 사도행전 필사를 마치고,
지금은 로마서를 필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필사하면서 더욱 더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내어맡긴 사도 바오로의 선교활동에도 불구하고 항상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과 이를 배척하면서 사도 바오로를 끝까지 죽이려고 했던 두 부류의 사람들이 늘 함께 공존했다는 사실입니다.

가만히 침묵 가운데 십자가 사랑 안에 머물며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은총이요 기적입니다.
이 은총과 기적은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어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이른 새벽에 깨어 복음묵상글을 전송할 수 있는 은총, 성경을 필사할 수 있는 은총, 거룩한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은총, 먹고 마시고 보고 걸을 수 있는 은총, 일할 수 있는 은총, 편안하게 잠잘 수 있는 은총 등등
저는 지금 은총과 기적 천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은총과 기적에 감사드리며,
오늘 더 회개하는 사제가 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5주간 수요일>(7.13)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11,26)
'철부지들이 되자!'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철부지들'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그들에게 드러났고, 그들이 하느님 아버지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11,2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헛똑똑이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런 '헛똑똑이들'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1코린8,2)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드러나 있는 철부지들!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알아보는 철부지들!
하느님 아버지를 아는 철부지들!

바로 이런 '철부지들'은 누구인가?
단순히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철부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악에 물들어 있지 않은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지극히 겸손한 사람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으로 단순하게 믿고, 믿는 것을 단순하게 실행하는 사람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철부지들'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 '헛똑똑이들'이 하느님 구원 사업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인 교회 공동체나 삶의 공동체 안에서도 바로 그런 '헛똑똑이들', 곧 무엇인가를 안다고 하면서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하면서 떠들어대는 '헛똑똑이들'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헛똑똑이들'이 되지 말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복음을 단순하게 믿고 단순하게 실행하는 '철부지들'이 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드러나 있는 철부지들!, 알아보는 철부지들!
하느님 아버지를 아는 철부지들!
바로 이런 '철부지들'은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철부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악에 물들어 있지 않은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지극히 겸손한 사람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으로 단순하게 믿고, 믿는 것을 단순하게 실행하는 사람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철부지들'이 아닐까요? 오늘도 철부지처럼 순수하고 가벼웁고 단순하게 찬양하며 살겠습니다 . 고모님 늘 감사드려요

울 세연이  딸 잘 키워서 미국에서도  잘 지내고 아빠도 신앙생활 열심히하는 성가정 입니다  고모님 저에게 주신사랑처럼 저두 조카에게 많은 사랑 으로 기도하며 살겠습니다. 주신 많은 사랑 가슴깊이 간직하여 필요할때마다 내어보일께요  예비자 교리 너무 즐겁고 행복해요  신바람 나요 ㅎㅎㅎ
*****아녜스! 좋아요,저도본당있을때 교리가르쳐 그들이 영세받을때보람느꼈어요.
아녜스! 축복이고 ,행복이고,신나게 하느님 전하셔요.♡♡♡

<연중 제15주간 목요일>(7.14)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예수님의 멍에!'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짊어진 무거운 짐은 율법이라는 짐이었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모든 유다인들이 짊어진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지켜야 할 율법 조항은 613개나 되었는데, 그중에서 "~하라." 라는 조항은 248개, "~하지 마라." 라는 조항은 365개나 되었습니다.

그런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

이 말씀의 요지는 유다교의 수많은 율법 규정에 얽매여 살기보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자유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란 무엇일까?
'멍에'는 달구지나 쟁기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소나 말의 목에 가로얹는 구부러진 막대로써 하나의 도구입니다.
예수님의 멍에 역시 도구입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나아가게 하는 도구입니다.
그 도구는 예수님께서 짊어지셨던 십자나무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멍에는 율법의 본질인 우리를 살리기 위한 예수님의 순종이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순종과 사랑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제와 영원한 생명이라는 안식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 교회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법전이라는 옛 방식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새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로마7,6)

교회가 만들어 놓은 법전이나 가르침 그 자체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에 마음을 두고 집중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경우 본질이 아닌 글자에 대한 집착으로 갈등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본질은 사랑이며, 이것이 예수님의 멍에 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7.15)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12,8)
'안식일의 참 의미는?'
오늘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요 주교요 교회 학자인 성 보나벤투라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뜻깊은 영명축일을 맞이한 형제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날마다 주님 안에서 '좋은 소식'을 간직하시길 빕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이 어렸을 적에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보나벤투라의 어머니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를 찾아가 기도를 부탁했는데, 프란치스코의 중재기도로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프란치스코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좋은 소식이로구나!"(Bona Ventura!)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조반니'에서 '보나벤투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복음(마태12,1-8)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윗 일행이 제사 빵을 먹은 일과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 특권을 지닌 사제들을 언급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큰 사람'이고,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의 참 의미는?'
'안식일'은 오늘로 얘기하면 '주님의 날인 주일'입니다.
곧 '구원의 날'이요 '생명의 날'입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죽음의 상황에서 '다시 부활하는 날'입니다.

매일 드려지는 '미사'(Missa)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재현하는 영적인 구원행위'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성체를 받아 모시고 부활해야 합니다.
이것이 '미사의 참 의미'이며, '안식일(주일)의 참 의미'입니다.

성당에 나오는 이유,
미사에 참례하는 이유는,
이것 외에 그 어떠한 이유가 없어야 합니다.

오늘도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먹고,
다시 부활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 인간의 성품이란?

링컨은 "사람의 성품은 역경을 이겨낼 때가 아니라, 권력이 주어졌을 때 가장 잘 드러난다."고 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위치에 올랐을 때, 자유의지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성품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권력을 쥐게 되면, 성품이 좋은 사람은 그 권력을 약자를 보호하는 데 쓰는 반면, 성품이 좋지 않은 사람은 남들을 학대하고 자기 지위를 누리는데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권력을 쥐어주면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얘기다.


물가에 서 있던 전갈이 개구리에게 자신을 업고 강 건너편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개구리가 물었다.
"네가 나를 독침으로 찌르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믿지?"
전갈이 말했다.
"너를 찌르면 나도 익사할 텐데 내가 왜 그렇게 하겠어?"
전갈의 말이 옳다고 판단한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 중간쯤에서 전갈이 개구리의 등에 독침을 박았다.

둘 다 물속으로 가라앉는 와중에 개구리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왜 나를 찔렀지? 너도 죽을 텐데."
전갈도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것이 내 본능이니까."
타고난 성품, 인성을 천성이라 부르고, 타고난 직종이나 직업 등을 천직이라 부른다.
사람은 무엇보다 타고난 성품이 좋아야 한다.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이렇게 말했다.
"인재를 논할 때 반드시 덕을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사람을 볼 때 반드시 심보를 본 다음 학식을 본다.

심보가 선량하지 않으면 학식과 재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학식, 경력, 학벌, 지위, 환경 등 그 어느 것도 타고난 성품을 대신할 수 없다.
나라나 어느 단체나 조직의 지도자는 일단 성품이 진실하고 좋아야 합니다.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걸레이기 때문입니다.
- 옮겨온 글 -

<연중 제15주간 토요일>(7.16)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태12,14)
'예수님을 따라가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십니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십니다.
예수님의 물러가심과 함구령은 예수님의 박해자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분의 결정적인 때'(죽음과 부활)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마태12,18)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선택된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좋은 일을 많이 하시며 올바름(정의)을 선포하셨는데,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던 토박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토박이들로부터 죄인으로 낙인 찍혀 살아가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릅니다.

'죽이려는 사람과 따르려는 사람!'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 사람인가?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인가?


이천 여 년 전에 계셨던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제들을 통해, 그리고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예수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는 이들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주위에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과 죽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사람들,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거나 탄압하는 사람들, 너무 불쌍하게 희생된 조유나 어린이의 부모처럼 너를 죽이는 사람들, 창조주 하느님의 걸작품인 피조물들을 마구 파괴하는 사람들, ...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