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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2021년 연중 제33주일 그 무렵 In those days

2021년 연중 제33주일
 
                                                               그 무렵
                                                            In those days

                                                        - 칸탈라메사 추기경 -
 
복음: 마르 13:24-32
 
전례력의 끝에서 두 번째 주일인 오늘의 복음은 세상의 종말에 관한 고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앞부분을 읽어봅시다.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마르 13:24-26).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읽어 주면서 사람들을 흔들고 두려움과 고뇌를 안기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천년을 맞이할 때와 같이 전환 시기에 더 맹렬히 나타납니다.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침착함을 유지하고 이러한 재앙적인 미래 예측에 동요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마지막 부분을 잘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2).’
 
천사도 아들도(분명히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신으로서) 종말의 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한다면, 어떤 종파나 종교적 광신도가 이를 알아채거나 이를 선포할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다시 오셔서 본인이 택한 자들을 모으실 거라고 우리를 안심시켜 주십니다. 그분이 언제 어떻게 오실 것인가(구름을 타고, 해가 어두워지고 별이 떨어지는 가운데)는 선포(미래 예측) 문학 장르의 전형적인 비유일 뿐입니다.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 아마도 이 복음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종말을 이야기할 때 보통은 절대적인 관점 또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세상의 종말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절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범주가 아니라 상대적이고 역사적인 범주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종말을 이야기할 때에는 특정 시대,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전체적인 관점에서의 세상의 종말이라기보다는 한 시대의 종말에 더 가깝습니다. 물론 두가지 관점은 얽혀 있기는 하지만요.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잘못 이해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시대의 유대인들은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비극적으로 경험한 것을 잊지 않았고, 410년 로마가 반달족에 의해 약탈되었을 때에도 그 시대의 지식인들은 이것이 세상이 종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세상의 종말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이 그들의 제국을 만들고 창조한 것들이 모두 끝난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기독교 정신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폭되었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걱정하는 이에게 오늘밤 본인 스스로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면 이는 우습지만 위안이 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끝맺습니다.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 13:33).’
 
세상의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복음을 듣는 우리의 마음이 기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희망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티토 2:13)을 일종의 형벌과 위협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생각 자체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종말에 대한 되풀이되는 이야기들은 왜곡된 종교적 감정을 가진 사람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화로 가득차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시는 이로 묘사하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시편)에 묘사되어 있는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는 분으로 끝까지 따지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됨됨이를 아시고 우리가 티끌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연중 제33주일>(11.14)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르13,32)

'두 번째 오심을 잘 준비하자!'

지금 우리의 때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다보니, 복음은 계속해서 종말에 관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인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최후의 심판이 내려지는 '세상 종말의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오셨을 때에는 악의 세력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두 번째 오실 때에는 결코 첫 번째처럼 그렇게 당하지 않고 강력한 힘으로 악의 세력을 처단하실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마르13,31-32)

'그러니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21,36 참조)

"늘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다락방 안으로 들어가 철야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일까? 

"늘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이 '나의 믿음과 기도가 죽지 않고 살아 있어야 한다.'는 의미, '행동하는 믿음과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 맞이하는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은 마음과 육신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예수님의 친구였고, '그들이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25,31-46 참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너를 위한 희생제물이 됩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의 것을 내어놓는 희생제물이 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33주간 월요일>(11.15)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18,41)

예리코의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얘기를 듣고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38)
사람들이 그를 제지하자,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치유사화'입니다.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야만 하는 아름다운 '구원이자 부활'입니다.

다시 보게 된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어둠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된 해방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예수님께서 지금 나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어떤 대답을 드리겠습니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가장 소중한 한 가지'를 청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청하겠습니까?

그 가장 소중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찾아보고, 그것을 주님께 청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청하기에 앞서 먼저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리코의 소경처럼 먼저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이렇게 청합시다.
"주님, 이 불쌍한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가장 소중한 한 가지'를 청합시다!

그리고,
가짜에 현혹되거나 가짜를 따라가지 말고,
진실을 볼 수 있고 따를 수 있는 눈을 청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성경의 자케오의 모습은 참 곱고 부럽고 행복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요 
자캐오 나무 ㅡ 성지순례때  돌무화과나무인데도 버즘 나무 처럼 느꼈었습니다 -차도 조심해야지 하구요

이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우리도 자캐오처럼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볼 수 없는 나의 결정적인 한계는 무엇인가?

성령의 힘과 성모님의 도움으로 이 한계를 극복하고,
지금 예수님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꼬옥요  예수님 어서. 오셔요  아멘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11.17)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루카19,13)

'믿음으로 순종하자!'

오늘은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이시고,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이신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과 주보 축일을 맞이한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축하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인 '미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는 줄로 생각하자, 예수님께서 미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루카19,12)

이 비유 말씀에서 '어떤 귀족'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이시고, '먼 고장으로 떠났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승천'을 뜻합니다.

'미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한 미나씩 주시고 하늘로 오르셨고, 왕권을 받고 돌아와(그리스도의 재림)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가 예수님으로부터 공평하게 받은 '한 미나'는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이요 선물'인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루카19,13)

이 말씀은 믿음을 잘 키워나가야하고, 우리 모두의 사명인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애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한 미나를 받고, 벌이를 잘하여 열 미나를 더 벌고, 다섯 미나를 더 번 종은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받은 한 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하였다가 그대로 돌려드린 종은 주인으로부터 호되게 야단 맞습니다.

주인이 벌이를 하라고 맡긴 돈을 '수건에 싸두었다는 것'은 주인의 명령에 '불순종' 했음을 뜻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33주간 목요일>(11.18)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19,42)

'예수님의 눈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십니다.

예수님께서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으로서 예루살렘을 찾아오시는데, 예루살렘은 그런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우십니다.

복음 안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눈물은 친구 라자로가 죽었을 때(요한11,35)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실 때에만 나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십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당신에게 닥쳐올 운명, 곧 십자가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당할 멸망 때문이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고 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울고 계시지 않을까?
예루살렘 도성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울고 계시지 않을까?
예루살렘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삶과 멀어져 있기 때문에 울고 계시지 않을까?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아직도 죄악 속에서 허덕이고 있기 때문에 울고 계시지 않을까?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복음환호송/시편95,7.8)

예수님께서 흘리셨던 아픔의 눈물을 '나의 회개로' 기쁨의 눈물로 바꾸어 드립시다!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시는 '예수님 안에 머무는 우리들', 그래서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기뻐 즐거워하시는 예수님이 되게 합시다!

오늘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는 날입니다.
오늘을 위해 그동안 수고를 다한 우리 수험생들이 최선을 다해 그리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수능시험에 임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마라나 타 !!!
**** 마라나 타 !!! 오소서 예수님****
고모님 36.5도의 응원-오늘 만나는 모든분을  따뜻하게 안아주셔요 따스한 난로같은  삶으로요!!!사랑합니다.

<연중 제33주간 금요일>(11.19)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19,46)

'예수님의 분노!'

어제는 '예수님의 눈물'을 묵상했고,
오늘은 '예수님의 분노'에 대해서 묵상합니다.

자비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며 분노하십니다.

복음에 드러난 예수님의 분노도 예수님의 눈물처럼 두 군데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에 대한 책망을 하실 때'이고,
또 하나는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실 때'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성전은 '가르침의 집'입니다.
성전은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는 집'입니다.
성전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집'입니다.
성전은 '구원의 집이며, 부활하는 집'입니다.

이런 성전이 성전으로써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장사하는 집인 강도의 소굴로 변해버린 것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메시아이신 주님으로 바라보지를 못합니다.
부족한 인간의 모습으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전(성당)과 나의 성전(몸)은 괜찮은가?
성전으로써의 기능을 다하고 있는가?
아니면 정화가 필요한 더럽혀진 성전은 아닌지?

그리고 나는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가?
나의 분노가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나라 때문인가?

우리의 성전과 나의 성전이 예수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시는 멋진 성전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분노가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지금부터 부활의 자격을 갖춘 이들의 하느님',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아있고, 저 세상에서도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믿고 올바르게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큰 은총이 바로 '이제와 영원한 생명과 부활'입니다.

이 큰 은총을 얻기 위해서 얼른 '필요한 자격을' 갖춥시다!
그것은 바로,
'생명과 부활이신 하느님을 굳게 믿고', 
'이제와 영원한 부활을 굳게 희망하면서',
'예수님께서 사셨던 그 방식대로 지금 여기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방식대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이제와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위하여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