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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연중 제30주일 모든 대사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지정된 사람입니다.

2021년 연중 제30주일
 
모든 대사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지정된 사람입니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에례 31:7-9
2독서: 히브 5:1-6
복음: 마르 10:46-52
 
오늘 복음에서는 에리코의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이에 대해 전합니다. 바리티매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그것이 본인 인생일대의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빠르게 행동하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많은 이들을 그를 꾸짖으면서 조용히 하라고 하였습니다)은 바르티매오의 행동(시대를 넘어 아주 잘한 행동)과 대비하여 나타납니다. 불행은 숨겨져 있어 이미 많은 것을 갖은 자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고, 이에 그들은 그들의 시야를 방해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눈먼 이라는 용어는 꽤나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 오늘의 복음 말씀에서는 오늘날의 경향처럼 도덕적 측면에서의 무지와 둔감함이라고 한정하여 정의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바르태미오는 눈먼 이가 아닙니다. 그는 단지 신체적으로 볼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그는 믿음과 희망이 있었기에 마음의 눈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외양적 결함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내면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사제의 자격과 역할에 대한 2독서(히브 5:1-6)의 주제에 대해 논의하고 싶기에 이쯤해서 복음(마르 10:46-52)에 대한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첫째, 사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근본이 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어깨에 짊어진 사람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힌사제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소망, 감정, 갈등, 의심 그리고 약점을 느낍니다. 성경은 스캔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이익을 위하여 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해서 그 자신도 인간의 연약함을 기반으로 다른 이들을 동정할(자비로울)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대사제는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서 '사람을 위하여 기름 부어지고' 사람들에게 파견되어 봉사하게 됩니다. 이 봉사는 인간의 가장 깊은 염원인 영원한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제 성소를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요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1 코린 4:1).’ 사제는 인간의 필요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고, 사회학자나 정치가와는 다른 영성으로 사람의 일을 다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구(본당)는 사회적인 맥락에서도 마을과 그 고장의 중요한 공동체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제의 역할에 대해 긍정적인 면모를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뉴스 보도를 통하여 인간으로의 나약함과 부적정한 관계로 이루어진 또 다른 현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위안이 되는 것은 우리가 기억해야할 하나의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사제는 실수를 하지만 제단이나 고해소에서 사제로서 그의 행동은 무효화할 수 없습니다. 사제 한 명의 치욕(잘못)으로 하느님의 은총이 박탈되지는 않습니다. 세례를 베풀고, 축하하고, 용서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제는 도구일 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베르나노스어느 시골 본당신부의 일기에서 시골 신부가 죽기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은총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로서 그의 비참함조차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하여 그는 이웃에게 보다 자비로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지상 대표자들(사제들)이 완전해야하는 것을 자비로운 것보다 신경 쓰시진 않으십니다.
 

<연중 제30주일>(10.24) -전교 주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28,19)

'선교는 복음화!'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여기에서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야 할 이 모습들이 바로 '선교인 복음화의 아주 중요한 첫 단계'입니다.

내가 기쁘지 않고,
내가 기도하지 않고,
내가 감사하지 않는데...
내가 부활하지 않는데...
어떻게 너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기쁨과 감사와 부활의 원천'은 내 뜻이 이루어진 데에 있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끊임없는 영적 행위인 '기도와 미사와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습니다.

'기도와 미사와 말씀'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서 지금 여기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 목적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 바로 '영원한 부활이요 완전한 하느님의 나라'인 '영원한 생명'입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10,14)

내가 먼저 굳게 믿고,
내가 먼저 기뻐하고,
내가 먼저 감사하고,
내가 먼저 부활합시다!

내가 먼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 안에 머뭅시다!

'선교인 복음화'는 이것이 '너에게로 흘러 넘치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이 '선교인 복음화의 구체적인 모습'인 '코이노니아(koinonia 친교)'입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4,20)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10,15)



<연중 제30주간 월요일>(10.25)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루카13,12)

'주일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던 여자,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던 여자를 고쳐주십니다.

이 얼마나 기쁜일인가?
병이 나은 그 여자는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었던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셨다고 분개하면서 군중에게 말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루카13,14)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 때 하느님께서 창조사업을 마치시고 '이렛 날에 쉬신 날'에서 유래된 날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주님의 날'인 '주일'입니다.

회당장과 같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안식일을 단순히 육체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서 쉬는 날로 여겼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일지라도 사람들을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육체가 쉬는 날'만은 아닙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입니다.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날'입니다.
'다시 부활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지난 엿새 동안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은총을 받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되돌아보는 날'입니다.

그래서,
받은 은총과 성령의 힘으로 살아온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이고,
종살이의 영과 육에 따라 살아온 나약함에 대해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날'이고,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던 여자가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에 힘입어 다시 부활한 것처럼, '다시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날'입니다.

우리에게 안식일인 '주님의 날(주일)'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회당장과 같은 그런 위선자들이 되지 말고 안식일의 본질인 '나의 부활을 만들어 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30주간 화요일>(10.26)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루카13,18)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음을 던지시면서,
우리에게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먼저,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일들이 아주 작아 보이지만,
장차 큰 위력을 펼치시게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곧, 예수님의 육화와 땀과 수난이 '부활에 이르게 하는 길'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메시지는,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행하고 있는 작은 행위들이 결코 작지 않다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8,18)

또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8,24-25)

우리는 내 나라가 아닌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의 부활을 희망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희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마음에 간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
곧 무심코 던지는 말 한마디와 너에게로 향한 사랑의 마음과 손길과 미소와 같은 작은 사랑에 충실합니다.

예수님께서 작은 사랑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행위로부터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작은 것에 충실합시다!
작은 사랑을 합시다!
장차 나에게 계시될 영광을 생각하면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시련들을 이겨냅시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입당송)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30주간 수요일>(10.27)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13,24)

'좁은 문!'

오늘 복음은 '구원과 멸망'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은 문'이고, 그 구원의 문은 유다인들에게만 열려있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의 나라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13,29)

'구원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보라, 지금은 꼴지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13,30)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모두에게 열려져 있는 구원의 좁은 문은 '언제나 지금 깨어 있는 자들에게 열려져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은 어떤 문일까?

이 좁은 문은 예수님께서 삶으로 직접 보여주신 다음과 같은 문입니다.

내가 더 낮아지고 져야하는 좁은 문!
내가 더 죽어야 하는 좁은 문!
내가 더 희생해야 하는 좁은 문!
내가 더 사랑해야 하는 좁은 문!

그래서 이곳으로 들어가려는 이들이 많지 않고,
이곳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불의를 일삼지 않고,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8,28)

사도 바오로는 모두의 구원이라는 공동선(공동이익)에 대해 말하고 있고, 이것이 믿는 이들이 지금 여기에서 함께 해야 할 일이라는 권고입니다.

모두의 구원이라는 공동선(공동이익)을 위해,
오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10.28)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6,13)

오늘은 열두 사도 가운데에서 열혈당원이었던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를 기억하는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십니다.

제자와 사도의 차이는 무엇일까?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시고 뽑으신 열두 사도는 어떤 사람들일까?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한 부르심과 특별한 임무를 부여 받고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로 얘기하자면 '많은 신자들이 제자들'이고, '성직자들이 사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에페2,20)

교회와 교회의 구성원들인 우리는 열두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기초인 열두 초석을 바라보면 정말 이해가 힘들 정도로 너무 평범하고 소박합니다.
직업 면에서나 성격 면에서나 그리고 믿음 면에서 보더라도. 직업은 어부들이 많았고, 당시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아온 세관장인 마태오도 있습니다. 열정이 넘치는 열혈 당원인 '시몬'도 있고,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모른다고 한 '베드로'도 있고, 예수님을 은전 삼십 냥에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습니다.

그런 주님께서 부족함이 많은 나를, 또한 제자로 부르셨고, 사도로 뽑으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높은 자존감 안에서 주어진 본분에 충실합시다!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10.29)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루카14,3)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하실 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고 예수님을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하지 않는 그들인데, 예수님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이 두 모습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마음을 아시고 그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런 다음 수종을 앓는 사람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14,5)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믿음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믿음을 뛰어 넘는 믿음, 곧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주님께 드리는 기도와 미사가 생각과 말로만 드리는 기도와 미사, 계명 안에 갇혀 있는 기도와 미사가 되어서는 안 되고, 그것을 뛰어 넘는 기도와 미사, 곧 구체적인 사랑 실천을 통해서 드러나는 살아있는 기도와 미사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구체적인 메시지이며,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의 싸움에서 지켜내신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시고 지켜내신 이 소중한 메시지를 항상 기억하면서, 나의 믿음과 기도와 미사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살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나와 너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고모님 내일 저희들 결혼기념일입니다(10.30) 처음으로토요일 일치하네요! 주님께 감사하고 가장 가까운이웃을 사랑할깨요 ㅎㅎ
***결혼기념일진심으로축하드려요.

주님께서함께하시어축복받는성가정을이루어주셨으니감사드립시다
.교회의평신도대표선교사입니다.내조도들어나지않게잘하셔야지요.기쁘게지내셔요.^^♡♡♡

네 고모님 명심명심할께요!!!



와~~~~~~아!!!  크신축복 감사드려요 느무 사랑해요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10.30 )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4,11)

'역설의 신앙인이 되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드러내시고 선포하신 하느님은 '역설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또한 그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불가능한 것들의 나라', '말도 안 되는 것들의 나라',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논리가 적용되는 나라'인 '역설의 나라'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 진리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곧 '커지고자 하는 사람은 가장 작아져서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하고',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고', '높아지고 싶으면 낮아져야 하는' '역설'(paradox)을 전하고 있습니다.

"누가 너를 초대하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는
오늘 복음도 이 역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체요 완전체가 바로 '패배를 통한 승리'라는 커다란 역설이 숨겨져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신앙생활이 어려운 이유,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힘든 이유가 바로 이 '역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높아지고 싶으면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이 역설로 인해, 내가 생각하는 반대로 살아야 하고, 그 반대의 것을 선택해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진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1,27-29)

'역설의 진리'를 늘 기억하고, '겸손의 덕'을 지니고 살아가는 '역설의 신앙인'이 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