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연중 제29주일 Their great ones make their authority over them felt 위대한 사람은 그들의 권력(힘)을 느끼게 한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이사 53:10-11 2독서: 히브 4:14-16 복음: 마르 10:35-45 이번 주일 복음은 평범하지 않지만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추천받지 못한 ‘추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야고보와 요한 두 사도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다가와 과감한 부탁을 드립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두 사도가 스스로 물었다고 하지만, 마태오 사가는 그들의 어머니가 그들 앞에 섰다고 전합니다.) 부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0:21).” 그들은 머지않아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인정받아 왕으로 선포될 것이라 확신하였기에 그들의 어머니는 아들 둘이 특별한 자리를 받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이었고 이후 내용을 보아도 그럼직한 것이었습니다. ‘형제 둘을 불쾌하게 여긴’ 다른 열 명의 사도의 반응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들 또한 같은 자리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요청에)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은 매우 놀랍습니다. 이는 우리도 알아두면 좋은 것이, 올바른 권고를 해야 할 때 매우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정치인에게 경호원으로 일하기 위하여 접근하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치인은 업무를 위해 할 일 목록과 그들이 처하게 될 위험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을 것입니다.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러면 그들은 답할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가 이렇게 반박합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 일자리를 줄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실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잠시도 생각하지 않고 그들은 답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농담하신 걸까요? 아니면 그분께서 그들은 조롱하시기라도 하신 걸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치의 새로운 위계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의 진정한 특권, 영예는 조금 다른 데 있습니다. 그의 몫을 함께 하는 것, 십자가 옆에 있는 것(‘그분의 잔을 마시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두 제자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옳습니다. 만약 그들이나 그들의 어머니가 그분의 나라에서 그분의 오른쪽과 왼쪽의 자리에 앉는 영예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들은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그리고 물론 우리 모두에게)에게 설명하신 내용을 살펴봅시다. 그분의 제자들이 열망해야 하는 진정한 위대함은 무엇이었을까요?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돈에 대한 그분의 판단(지난 주 말씀) 다음으로 세상의 또 다른 엄청난 우상인 권력(힘)에 대한 복음 말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돈이 악하지 않은 것처럼 권력도 그 자체로 악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 스스로를 ‘전능하신 분’으로 정의하고, ‘권력(능력)도 하느님께 있다(시편 62:12)’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강자의 지배와 약자의 압박으로 오용하였으니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그분께서는 그분의 전능함을 벗어버리셨습니다. ‘전능함’에서 ‘무능함’으로 스스로 내려오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필리 2:7)’, 그분께서는 권력을 봉사로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기에는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무능함이 얼마나 잔인한 현실로 나타났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 총독 관저에서 예수님께서는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어깨에 조롱의 망토를 두르고, 손목이 묶여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주변은 그분을 조롱하는 군사로 가득했습니다. 오늘의 1독서를 통하여 ‘무력한’ 구원자에 대한 예언적 묘사가 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만한 모습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이사 53:2~3). 그리하여 새로운 종류의 권력, 곧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 고린 1:24-27)’. 마니피캇의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 태어나심으로 인한 조용한 혁명을 미리 기뻐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권세 있는 자들을 그들의 왕좌에서 내치셨습니다.’ 권력에 대한 비난은 누구의 탓입니까? 정녕 폭군과 독재자만이 있습니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논의에서 몇 가지 예외사항만 고려하면 될 것입니다. 아니라면 우린 모든 것을 고려해야합니다. 권력에는 끝없이 많은 가지가 있고 이는 모든 곳으로 뻗어나갑니다. 마치 사하라 사막의 모래와 같이 바람이 불면 사방으로 퍼져나갑니다. 비슷한 일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교황의 ‘현세의 권력’도 직권남용으로 훼손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럼(교황의 권위가 떨어짐)으로써 교회가 크나큰 혜택을 누린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가톨릭 안에서의 권력 또한 누군가에겐 유혹거리가 되고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유혹에 넘어가기 십상입니다. 미리 언급하였듯이, 권력의 문제는 정치 세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이쯤에서 논의를 멈춘다면 본인 스스로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여 비난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집단의 또는 과거의 잘못을 비난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또는 현재의 잘못을 논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이에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루가 1:51).’ 성모님께서는 암묵적으로 '권력의 의지'와 싸워야 하는 곳은 바로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우리의 자만심')은 일종의 왕좌가 되어 우리 자신의 의제(관심)을 결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는 여전히 지붕 위에 낮은 탑이 있는 시골집이 많습니다.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이는 주인이 들에서 일하고 있는 일꾼들을 확인하는 곳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곳(반드시 나쁜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입니다. 우리에게는 마치 이런 집과 같은 장소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명령하는 탑이 있어, 여기에서는 명령을 내리고 판단을 하며 세상 것들에 대한 주장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 왕좌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이는 가정에서도 일어납니다. 불행하게도 가정 내에서도 우리의 타고난 지배와 패권의 의지가 들어나 희생자를 만들고 그들에게 고통을 줍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성이 희생자가 되는 경우가 여전히 많습니다. 복음이 권력에 반대(대조)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봉사입니다. 봉사에 의한 권력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입니다. 권력은 자신에게 권위를 주지만 봉사는 더 많은 것을 줍니다. 존중, 감사, 실제로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 이런 것들을 줍니다. 또한 복음은 권력(힘)과 비폭력을 대조하여 말합니다. 여기에서 비폭력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힘(권력)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열두 군단의 천사들을 불러 십자가에 못 박을 원수들을 흩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마태 26:53),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택하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그분은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나 봉사가 항상 침묵을 지키고 권력에 복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봉사가 지배와 부적절한 남용에 대해 소리를 높일 수 있습니다. 제 2독서에서는 다음과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권력 남용은 예수님의 전생애에서도 가장 슬픈 일 중 하나였습니다. 그분은 당대의 정치적, 종교적 세력인 헤로데, 최고의회, 그리고 빌라도에게 가혹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어떤 환경(가정, 공동체, 사회)에서든 악의적인 권력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도움으로 우리는 그분이 하신 것과 같이 ‘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이기는(로마 12:21)’ 것이 가능합니다.아멘 |
<연중 제29주일>(10.17) "사람의 아들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5) '우리도 죽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청탁을 합니다.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10,37) 이 청탁에 예수님의 대답은 그런 영광을 얻으려면 역설적이게도 낮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하고, 너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5)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오늘 제1독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신 예수님에 대한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인데, 이 노래에서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이사53,10)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위대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어야 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낮아지셨고, 희생 제물이 되셨는데도,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처럼 높아지려고만 하고, 죽지 않으려고만 하고, 주인이 되려고만 합니다. 우리의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과 문제의 근본적인 답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부부와의 관계,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나와 너와의 관계, 본당 신부님과 신자들과의 관계 등 모든 관계 안에서 참행복을 누리려면 예수님 말씀처럼 너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의 종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내가 죽어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인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한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히브4,16) 이병우 루카 신부 |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10.18)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10,2) 오늘은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성 루카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2티모4,11) 루카 복음사가는 오늘 독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사도 바오로의 선교 여행 때 함께했는데, 그것도 루카를 상징하는 '소'처럼 우직하게 사도 바오로와 끝까지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루카의 직업은 의사이고 화가였다고 전해집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말씀'과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에 관한 말씀'과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다른 복음보다 더 상세하게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당신에 앞서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 제64대 교황(590-604년)인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복음서에 대한 강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들이 적습니다. 나는 이 말을 할 때 서글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기쁜 소식을 듣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그것을 전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보십시오. 세상은 사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밀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찾아내기란 너무도 힘듭니다. 우리가 사제의 직분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직분을 완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고 있는 모두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잘 간직한 사제들과 이를 위해 땀 흘리는 일꾼들이 우리 안에 많아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나 자신부터 먼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이병우 루카 신부---루카신부님 축일 축하드립니다 늘감사합니다 |
<연중 제29주간 화요일>(10.19)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12,37) '깨어 있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12,35-36)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려면, 예수님 말씀처럼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밤중에 올지, 새벽에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지금 깨어 있어야 하고, 그리고 바로 그런 종들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음이란?' 늘 자기 신분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이고, 늘 자기 신분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자기 신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를 주인으로 모시는 신분이며,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종들이라는 신분입니다. 하느님의 종으로서 믿는 이들이 충실하게 해야 할 일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늘 잊지 않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아담의 불순종과 예수님의 순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로마5,19) '순종'은 늘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고, 겸손하고 기쁘게 이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화답송 후렴) 하느님의 종이요, 사제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나 자신은 얼마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늘 찾고 있고, 이 뜻을 이루려고 애쓰고 있는가?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5,20)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큰 힘으로, 큰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어제의 부족함인 나의 불충실과 불순종의 죄를 하느님의 자비에 내맡겨드리고, 하느님의 용서인 은총을 입고, 언제나 지금 다시 태어나는 하느님의 종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연중 제29주간 수요일>(10.20)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8) '많이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어제 복음은 '깨어있어라.'는 말씀이었는데,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루카12,41)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루카12,42-43) 오늘 복음은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루카12,39-48)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집사에게, 주님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 주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은 사람, 주님의 일을 많이 맡은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 대상은 우선적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이미 오래 전에 세례를 받아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신자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재물이든 그 외에 다른 어떤 것이든 주시는 분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충실한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고,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충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충실한 종은 주님이신 주인의 뜻을 잘 알고, 이 뜻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종입니다. 주인의 뜻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하게 드러났는데, 그 결정체가 바로 너와 모두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육화'이고, '예수님의 땀흘림'이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고,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묵주기도는 이 신비 전체를 기억하는 기도이고, 이 신비 안에 머무는 기도입니다. 이 신비 안에 들어있는 주님의 뜻을 잘 이행하는 충실한 종, 슬기로운 종이 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29주간 목요일>(10.21)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12,49.51) '불과 분열의 의미!' '불과 분열'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받아들이면 왠지 예수님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성령의 열매들', 곧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12,49.51) '불과 분열의 의미'가 이런 의미로 묵상되었습니다. '정화의 의미', '죽음의 의미', '다시 태어남의 의미'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12,50)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세례는 예수님 부활의 절대적 전제인 죽음, 곧 '죽음의 세례'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참모습인 성령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정화와 회개'를 통해 '나의 육의 행실들을 끊어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로마6,19.23) 그러니 오늘 복음은, '성령의 불'로 나의 죄를 태워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싸워야 할 '이 세상 것과 육적인 것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죽음의 길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함께 나아갑시다! |
<연중 제29주간 금요일>(10.22)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12,56) '이 시대?'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날씨의 변화에 대해서는 민감하면서도 이 시대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둔감한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위선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시대'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해 둔감한 위선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의 시대인 21세기이자, 삶의 자리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카이로스(kairos), 곧 '예수님의 시간(시대)'을 의미합니다. 흐르는 물과 같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유한한 존재로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시간'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소중한 시간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마태7,23)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불법을 일삼는 자들, 예수님의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만약, 마지막 때인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보며 심판을 받아야 할 그 때에 내가 이런 말씀을 듣는다면 얼마나 서글퍼질까? 그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 갇혀 있고, '대장동에' 갇혀 있고, '대통령 선거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두가 '부동산 전문가' 같고, 모두가 '정치 평론가'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복음의 기쁨'을 통해 정치와 선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권고하셨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 건설'과 '하느님의 정의 실현'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7,19)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에 너무 관심을 두지 말고,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것에 더 관심을 두면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29주간 토요일>(10.23)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13,5) '회개의 기적!' 며칠 전 함께 공유했던 두 냉담 자매님들께서 이번 목요일 저녁에 오셔서 면담성사하고 기쁘게 미사 참례를 하셨다고 합니다. 한 분은 10년 냉담하셨고, 한 분은 1년 냉담하신 분이신데, 미사시간 내내 울면서 미사를 드리셨다고 하네요. 예수님도 기뻐서 함께 우시지 않으셨을까 ㅎㅎ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회개의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의 기적'을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회개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갈릴래아 사람들과 실로암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을 언급하시면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독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 하느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모시고 있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에 관한 사도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전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죽지 않고 살게 될 것이고, 생명과 평화를 얻을 것이라고 말씀입니다. '회개의 기적'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며, 예수님과 우리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를 보면 포도밭 주인이 삼 년째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를 잘라버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주인님께 이렇게 사정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13,8-9) 이 말씀은 나 자신의 회개와 너의 회개를 위해서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살리시기 위해 한번 더 회개의 기회를 주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갑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
오늘 잘들어가셨습니까? 오늘 같이 좋은날(어여쁘더라구요)고모님 요셉삼촌 그리고 오빠들 조카 만나뵈어서 기뻤습니다. 싸랑해요 고모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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