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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연중 제27주일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2021년 연중 제27주일
                           The two of them shell become one flesh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창세 2:18-24
마태 10:2-16


*이번 주일의 주제는 결혼입니다. 첫 번째 독서는 잘 알려진 구절로 시작됩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오늘날 우리는 이에 한 문장을 추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오늘날 결혼의 어두운 면이 별거와 이혼이라면, 예수님 당시에는 거절(이혼장을 써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악이 더 나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성에 대한 일종의 부당함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거부할 수 있지만, 아내들은 남편을 거부할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에서는 거절(이혼장을 써주는 것)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남편이 원하기만 하면 어떤 이유로든 아내를 거절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율법에 기반한 확실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합니다. 
그때에 그들(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한쪽을 찬성해 줄 것을 기대하고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상밖의 답을 들었습니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이유 없이 아내를 거절하거나 남편을 떠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다. 이쯤에서 저는 결혼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농담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신은 사제가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한 후 이들이 어떤 혼란에 빠질지를 생각하면서 웃을지를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재단에서 멀어질 때 사진 작가들이 사진을 찍고 쌀을 던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사제들)는 사제직 안의 부정(父情)으로 오히려 설렘과 애정을 느낍니다. 
이들 앞에 펼쳐질 여정이 쉽지 않을 것을 알기에 남몰래 마지막으로 축복을 더해줍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배우자(두 사람)를 비롯하여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직면하는 문제가 두 유형에서 거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들은 것은 이혼을 단죄하는 고전적인 내용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서 이혼에 대해 추가적으로 단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믿는 자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복음과 교회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혼을 단죄하는데 국한되지 않고, 이혼으로 귀결되는 경향 또는 이혼은 아니더라도 별거는 해야겠다는 결론을 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복음 말씀은 억압이 아니고 예방을 목적으로 합니다.



*여기에서 결혼이라는 제도가 겪고 있는 현대 사회의 위기에 대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 전체에서 고작 몇 개월 만에 위기에 빠진 결혼 생활에서는 첫 번째 문제에 봉착했을 때부터 '이 생이 지겹다', '나는 떠날 것이다', '그렇다면 각자 갈 길을 가자'와 같은 말들을 주고받게 됩니다. (사실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말을 한 번이라도 내뱉은 사람은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일치를 방해하고 심리적으로 매우 위험한 선례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결혼은 현재의 '사용하고 버리는'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기기나 기구가 손상되거나 약간의 흠집이 나면 수리(지금은 수리 작업이 사라졌습니다)를 생각하지 않고 즉시 교체합니다. 우리는 완전한 새 것을 원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혼에 적용되어 아주 잘못되고 파괴적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결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코 나아지지 않고, 깨지면 붙일 수는 있으나 가치를 잃어버리는 도자기 꽃병과 같지 않습니다. 이는 삶의 영역에 속하며 그 법칙을 따릅니다.
 
삶은 어떻게 유지되고 성장합니까? 삶을 부딪힘과 충돌, 변화, 그리고 외부로부터 보호되는 유리종(온실) 아래 보호할 수 있습니까?
 
삶은 지속적인 손상이 있어 매일 수리해야하고 모든 종류의 바이러스의 공격이 있어 이를 지혜롭게 예측하고 방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결혼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좋아지는 포도주와 같아야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이번에는 육적인 삶보다는 영적인 삶에서 찾아봅시다. 성공적인 결혼에 이르게 하는 과정은 거룩함에 이르는 과정과 같습니다. 거룩함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일에도 연루되지 않고, 이미 거룩하게 태어난 것과 같이, 마치 대리석이나 플라스틱 조각상과 같이 흠이 없이 얻어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삶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고, 때로는 잘못된 행동의 연속이고, 심지어는 끔찍한 죄를 짓고도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지속적인 회심과 성장에서 옵니다.



여기에서 성인들도 감각의 어둔 밤이라고 불리는 과정을 겪게 되고, 이 과정에서 그들은 아무런 감정도 동기도 느낄 수 없고, 메마르고 공허하고, 모든 일에서 고통과 수고를 느끼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영혼의 어둔 밤이라는 더 어려운 과정을 겪게 되는데, 감각뿐 아니라 지성과 의지에서도 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를 의심하게 되며, 모든 것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완전한 어두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끝일까요? 아닙니다. 이는 더 큰 빛, 더 순수한 사랑의 서막입니다. 완전함은 시작이 아니라 마지막에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고통의 위기 후에 성인들은 그들의 첫사랑이 얼마나 불순하였는지, 그들은 얼마나 그들이 한 일에서 의미를 찾았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보상이 없는 하느님도 사랑했지만 사실은 위로를 주시는 하느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실로 하느님과의 관계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것과 같이 첫 은총 다시 말해 위로와 달콤한 감정과 끌림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마치 하늘나라를 맛본 것처럼 느끼지만 이는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많은 기혼 부부들이, 적어도 진작에 포기하지 않을 용기를 가졌던 이들이라면, 이과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신혼초에 가졌던 모든 감정과 열정이 많은 일을 같이 겪으며 성숙해진 지금의 진정한 사랑에 비해 얼마나 작은 것이었는지 알 것입니다. 신혼초에 사랑은 서로에게서 얻은 만족감이었다면 지금은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제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남편이나 부인)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지켜야 하는 약속으로 가득한 이 험난한 길을 그래도 가보겠다고 하는 부부에게 저는 어떻게 하라고 하면 좋을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가 잘 하시던 잊혀진 아름다움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수선하고 꿰매고 바느질하는 것입니다. ‘사용하고 버리는 사고방식을 사용하고 고치는 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우리 할머니들이 최고였던 것은 소위 말해 눈에 띄지 않게 꿰매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워진 양말이나 신발 그리고 스웨터는 그 누구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옷을 기워 입지 않는다고 해도 이제 우리는 이 기술을 우리의 결혼 생활에서 연습해야 합니다. 찢어진 옷을 꿰매십시오. 즉시 그렇게 하십시오. 꿰매는 것을 잘 하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즉시 실행해야한다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구멍이 커지고 넓어지고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대에도 이에 대한 속담이 있었습니다. 시작부터 저항하라(Principiis obsta)’ 초기 증상에 반응해야한다는 뜻입니다. 병이 커지고 나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집니다. 초기 감기는 아스피린 한 알로 멈출 수 있지만, 병이 커지고 나면 일주일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부부 생활에서 눈물을 꿰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성 바오로는 이에 대해 아주 잘 지적해 주었습니다.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에페 4:26-27; 콜로 3:13; 갈라 6:2).” 적이 사람들(부부) 사이에 쐐기를 박아 넣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외부에서 쐐기가 들어오기도 합니다. 이는 다른 남자나 여자에 대한 불분명한 감정으로 시작하여 위험하게 작용하게 됩니다. 이럴 때에 속담을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작부터 저항하라(Principiis obsta).’ 시작되려고 할 때부터 즉시 행하십시오. 그를, 그녀를 끊어내십시오. 곧 너무 늦어질 수 있습니다. 열정은 스며들어 당신을 조종하고 끌고 다닐 것입니다. 당신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이혼과 불명예까지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 다른 이들에게 거짓된 삶을 안길 것입니다.

 
이는 기혼 부부들뿐 아니고 우리와 같은 사제에게도 필요한 조언입니다. 미디어 보도가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것과 같이 이 부분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취약하기에 미혼인 개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눈물과 계속하여 꿰매는 이 과정에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결혼은 해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하고 정제되고 개선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정확하게 삶은 거룩함과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비밀은 항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이 매일 아침 매초마다 다시 시작되는 것처럼.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둘이 원하기만 하면 처음부터 시작하고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레아 가나에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여 부부의 행복을 기원하셨습니다. 그분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고, 결국 마지막에 나온 포도주가 가장 좋은 것이었다고 모두가 동의하였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당신이 지금 당신의 결혼 생활에 그분을 초대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그때의 기적을 일으키셔서 마지막에 나온 포도주 – 성숙함과 노년의 사랑과 일치 를 그 무엇보다도 좋은 것으로 바꿔주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10.3) -창조시기 33일째-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르10,8)

10월의 첫 주일인 오늘은 '연중 제27주일'이자,
'제54회 군인주일'입니다.

전 후방 각지에서 국토수호를 위해 땀 흘리고 있는 군인들과 그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군종신부님들을 기억하는 날이고, 군 사목을 위한 '2차 헌금을 하는 날'입니다.

각 본당에서 봉헌해 주신 2차 헌금은 군종교구의 1년 예산으로써 군 사목을 위해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정성을 담아 봉헌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생활비에서 얼마를 봉헌하려고 합니다.

연중 제27주일에 들려오는 복음은 '혼인에 관한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혼인한 부부는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고,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혼인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혼인의 중요성과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혼인성사로 맺어진 가정은 '가장 작은 단위의 교회'이고, '가장 소중한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가정교회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세례성사를 받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루는 '혼인은 성사'가 됩니다. 따라서 부부의 '혼인생활은 성사생활'입니다.

세례성사를 받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루는 '혼인은 성사'가 됩니다. 따라서 부부의 '혼인생활은 성사생활'입니다.

'가정의 사랑에 관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두 번째 권고문'인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에서 교황은 가정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권고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생명을 낳는 부부는,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느님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참되고 살아 있는 조각품입니다. 열매를 맺는 사랑은 하느님의 내적 본질을 상징합니다."(11항)

10월은 '전교의 달'이자, '묵주기도 성월'입니다.
묵주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신비) 전체를 성모님과 함께 묵상하는 기도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을 모아 묵주기도를 바치고,
이 기도로 전교의 시작인 가정교회가 새롭게 다시 태어나 세상 복음화의 초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나의 물이 숙성된 포도주로 된것처럽  우리의 결혼생활에  예수님을 초대한다면 무엇보다 좋은것으로 바꿔주실것을 믿습니다  우리삶의 비밀은 항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둘이 한몸이될것이다.아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10.4)
-창조시기 마지막 날-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
 
오늘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생태계의 주보성인'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왜, 사람들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좋아하고 사랑할까?
 
저는 프란치스코가 단순성과 겸손과 기쁨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걸어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요 형제인 첼라노는 그런 사부의 모습에 대해 그의 전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장 높은 지향과 주된 바람과 최고의 결심은 복음을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하여 실행하는 것이었고,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열의를 다하여 애타게 갈망하는 온전한 정신과 뜨겁게 타오르는 온전한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었다."(1첼라84)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사셨고, 그렇게 사는 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합일의 표지인 오상을 받으셨고, 후대의 사람들로부터 '또 하나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라고도 불리셨습니다.
 
오늘 옆지기 프란치스코 축일입니다 매우기쁜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어떤 율법 교사에게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지금 너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나병환자와의 만남을 통해 결정적인 회개의 길을 걷기 시작한 프란치스코는 이후 "어디에서나 늘 예수께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마음에도 예수를 품고 있었고, 입에도 예수, 귀에도 예수, 눈에도 예수, 손에도 예수, 나머지 지체들도 늘 예수를 모시고 다녔습니다."(1첼라115)
 
지금이 바로 성 프란치스코가 끝까지 간직했고 형제들도 간직하기를 바랬던 '단순성과 겸손과 열정'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단순성과 겸손과 열정으로 돌아가야 할 '회개의 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한 것이 없으니, 다시 시작합시다!아멘 네 아멘 !!!


코스모스 
좋아요 저두 안부를 전합니다
♡해요

무더기로 피어 있으면 훨씬. 예뻐요 
모두다 하나같이 예쁘지만 다 다르게  매력적이예요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귀한 하루 보내고 있답니다 ♡



와 날아가겠어요 
행복해서요 ㅎ
울 고모님두요 ㅎ

<연중 제27주간 화요일>(10.5)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10,42)

'필요한 한가지와 좋은 몫!'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부했는데, 아마도 예수님께 드릴 음식 장만하는 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자기 동생이 자신을 도우라고 청합니다. 그런 마르타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1-42)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
지금 여기에서의 구원과 하느님 나라 안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는 무엇일까?
그리고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첫째 계명이 아닐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22,37)

마리아처럼, 나의 삶의 첫째 자리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것!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것!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완전한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 나에게 필요한 한 가지이며,
내가 선택한 좋은 몫이 아닐까요?

이 필요한 한 가지에 머물러 있고, 이 좋은 몫을 선택한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참행복으로부터 모든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는 힘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요나처럼 회개하고,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처럼 회개하여,
오늘 기뻐하고, 오늘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화이팅 합시다!



<연중 제27주간 수요일>(10.6)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여라."(루카11,2)

'올바른 기도!'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11,1)

이 간청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가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유일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는 '올바르게 기도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가 이렇게 다가왔습니다.

'먼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라'는 말씀으로, 그리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고, 그러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지금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기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기도하고 있는가?

시간경 기도인 성무일도의 순서를 보면 '찬미가와 시편과 찬가, 그리고 성경소구, 청원기도, 주님의 기도와 마침기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기도를 바치고 나서 우리의 바람인 청원기도를 바치는 순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완전한 선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구체적으로 청하지 않아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마태6,25-34 참조)

그러니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완전한 하느님 사랑의 표지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큰 사랑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 안에 깊이 머물러 있는 사람은 어떤 모습이며, 그 사람이 곁들여 받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바로,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고, 너의 죄를 용서하고, 나의 죄에 대해 자비하신 주님께 용서를 청하고,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고 묵상했습니다.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10.7)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11,9)

오늘은 성 비오 5세 교황께서 이슬람제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레판토 해전 기념일'(1571년 10월 7일)을 맞아 제정된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그리스도인 군사들은 그 당시 자신들이 거둔 승리가 묵주기도를 바침으로써 받은 천주의 거룩한 모친이신 성모님의 도움 때문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지금 '묵주기도의 성월'을 보내고 있고,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신비, 전체, 곧 예수님의 육화와 땀과 수난과 부활의 신비 전체를 성모님과 함께 묵상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기도보다도 큰 기도입니다.

저도 매일 아침 바닷가 산책을 할 때나 오후에 적석산을 산책 할 때 그리고 사제관에서 성당으로 걸어서 오고갈 때 항상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예수님 삶 전체를 믿게 하는 '믿음의 기도'이며, 성모님의 손을 잡고 바치는 '전구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간청하라'고 이르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11,9)

그런데 이에 앞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께 대한 '믿음'(신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믿음 안에서 청하기만 할 뿐입니다.
'받고 얻고 열리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기에, 청하는 것을 지금 주시든 다음에 주시든 상관하지 않고, 단지 굳게 믿으면서 청할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시는 분께 대한 믿음(신뢰) 없이 청하기만 하거나, 그리고 청하는 것이 당장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청하기만 한다면 쉽게 낙담하거나 넘어지게  되고, 결국 떠나가게 될 겁니다.

먼저,
주시는 분을 굳게 믿고,
그리고 끊임없이 간청합시다!

<연중 제27주간 금요일>(10.8)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루카11,15)

'성령을 따라가자!'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와 우리의 나약함 때문에 우리 안에는 늘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성령과 악령이 함께 공존합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선의 지배를 받는 사람과 악의 지배를 받는 사람, 성령을 따라가는 사람과 악령을 따라가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어 그를 해방시켜주시는 선한 일을 하셨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선으로 보지 않고 악으로 봅니다. '악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예수님께 막말을 해댑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표징(기적)을 보고서도 예수님께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더러운 영들이 하는 일이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느님의 선, 하느님의 기적들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느님의 선과 하느님의 기적들을 바라보게 합니다.

성령의 눈으로 너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면 여기저기가 기적 천지입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기뻐하면서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삶을 삽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6,45)

'끊임없이 간청하라'는 어제 복음 끝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11,13)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성령을 청하고,
그래서 성령을 받고,
받은 성령의 불을 끄지 않으면서,
성령의 이끄심에 나를 내어맡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연중 제27주간 토요일>(10.9)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행복!'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은 친척 엘리사벳이 칭송하고 있는 것처럼,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이십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신 예수님을 태에 품으셨고, 젖을 먹이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주님의 어머니가 되신 이후, 한 생을 주님이신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참으로 행복한 사람, 참 행복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는,
'참 행복'은 보이는 것 안에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가시적인 재물이나 권력과 명예에 있지 않고, 하느님 말씀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실행해야 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그분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분의 삶과 말씀을 통해서 계시되었습니다.

어제와 오늘 독서는 요엘 예언자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어제는 주님의 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으니 '얼른 회개하라'는 말씀이고,
오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잘 지킨 이들에게 '주님께서 피난처와 요새가 되어주신다'는 희망의 메시지인 주님의 축복입니다.

오늘도 달콤함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가짜 행복을 쫓아가지 말고, 참 행복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더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