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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2021년 연중 제25주일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If anyone wishes to be first                                                                                                                      - 칸탈라메사 추기경 -
                                                                                                                          마태 9:30-37


어느 날, 그들이 길을 가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멀리서 제자들이 격렬히 논쟁하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 오는 길에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를 물었지만 그들은 부끄러워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오늘 길 내내 그들은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를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직접 읽어 보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누가 첫째가 되고 싶지 않겠습니까? 첫째가 되고자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능 중 하나입니다. 항해의 기본이 되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생각해 봅시다. 부력이 물에 잠긴 몸체에 가해지면 몸체가 크면 클수록 부피가 커지므로 더 많은 물을 밀어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우리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를 다르게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눈으로 인류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면, 하느님의 눈에 우리는 까치발을 하고 서있는 엄청난 무리일 것입니다. 서로 위로 올라가려고 주변 사람들을 짓밟기도 하고, 저마다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세상에 나도 있어요, 나도 여기에 있어요!’

오늘날 이러한 들어내거나 눈에 띄고자 하는 경향은 높아지고 열광적으로 변해, 사람들은 주목받기 위하여 기이하고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기도 합니다. 필요하다면 악과 범죄를 통해서라도 말입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형태가 아니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정상에 오르고 필사적으로 경쟁하려는 충동은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주요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웃과 동료 그리고 친구들보다 못하게 보이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해 왔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는 이러한 경향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고, 위대한 일을 하고,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을 비난하고 게으름과 나태함을 옹호하신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바로 니체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에서 세상에 심은 겸손과 체념의 종양과 맹렬히 싸워야할 의무를 느꼈습니다. 그의 작품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노라 통하여 그는 자신을 낮추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위대한 건강함을 지닌 초인간적인 존재인 권력의 의지에 반대하는 복음적 가치를 설정하기도 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종종 예수님의 생각을 잘못 해석하여 이러한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복음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첫째가 되고자 하는 것은 허락된 일입니다. 이는 금지된 것도 아니고 죄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금지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려하고 계십니다. 다만 그분은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새롭고도 다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다른 사람의 불이익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말입니다.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십니다.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위로 가는 길이 아래로 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시리즈의 마지막이 첫째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에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입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처음이든 마지막이든) 첫 번째가 되는 것의 열매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권력의 의지는 히틀러의 방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하더라도 어떤 결말을 맺게 됩니까? 이는 한 사람만이 우위에 있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받들어줘야 하는 상황을 만듭니다. 한 사람만이 행복(그 안에 행복이 있을 수 있다면요)’하게 되고 나머지 대다수는 불행해집니다. 승자는 단 한 명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패배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지배하고 나머지는 지배당하게 됩니다.


서로를 섬김으로써 모든 사람은 하나됨의 위대함으로부터 유익을 얻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개인적으로 위대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도 위대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한 사례 중 하나가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입니다. 그분은 분명히 프리마돈나였습니다. 그분의 장례식에는 국가 정상들을 비롯한 세계 VIP들이 참석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위대함은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위대함입니다. 첫째가 되는 것, 이 뛰어남은 전 세계에 축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스포츠 또는 비즈니스(사업)에서의 경쟁을 비난한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것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경쟁들)이 올바른 범위 내에서 공정하게 이루어질 때 공동선을 추구하는 기능을 하고, 성능이나 제품의 품질을 높이며, 신체적이고 창의적이며 전문적인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들만의 상황에서 그들은 아름답고도 긍정적인 가치를 창출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운동 선수들 간의 경쟁을 복음이 제안한 다른 경쟁에서 신자들이 해야할 일의 모범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1코린 9:24-25).”

우리는 종종 육상 경기에 대한 TV 보도를 봅니다. 이는 우리가 방금 말한 것에 대한 아주 좋은 사례이기에 한 번 생각해 봅시다. 100 미터 달리기가 끝나면 카메라맨은 우승자를 확대하여 보여 주기 위하여 달리고 그의 승리에 함께 기뻐합니다. 한 사람의 승리자가 있었다면 거기에는 실망한 여섯 또는 일곱의 패배자가 있었겠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이고, 스포츠 정신입니다. 그러나 이는 1등을 뽑는 방식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 모두는 경기를 뛰지만 오직 하나만이 상을 받습니다. 모든 경기에서 우리는 기준에 들거나 내쳐집니다.


하지만 사도는 육상 경기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보았습니다. 보십시오! 바오로 사도가 말합니다. 얼마나 많은 절제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을 경기자가 치러냈습니까!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또한 썩지 않는 화관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하지 않겠습니까?

, 복음이 모든 이의 꼴지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경기에 우리를 초대하였으니, 봉사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적어도 한번쯤은 이 길 위에 올라서려고 노력하고, 아니면 그 길 위에 있는 자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봅시다. 종이나 봉사(마치 빈곤과 고독과 같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과 긍정적인 의미로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단어로 받아들이면 종이라는 단어는 자유롭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서 종속되어 있는 사람과 같이 모두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종을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 종은 도움을 주는 사람, 남의 처분에 자신을 맡기고,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에 이는 실질적인 사랑, 도움, 이타주의 그리고 관대함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말하는 봉사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노예근성이라는 단어가 말하는 부정적인 의미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봉사는 그리스도의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 복음에서 제안한 경주, 즉 꼴찌가 첫째가 되는 경주에서 그분은 승리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자신이 모든 사람의 마지막이 되고 종이 되어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그분은 사도들의 발을 씻기고자 하셨고 이를 통하여 바로 그 생각을 그들의 마음에 새기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나는 섬기는 자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을 따르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자신의 승리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한 몇 가지 구체적인 노력사항을 점검해 보도록 합시다. 봉사 정신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문제는 자신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경향, 즉 권위주의입니다. 그런 경향이 있는 사람들(가족, 공동체, 회사, 사무실)은 자신이 초래하는 주변의 고통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열심과 노력을 배은망덕하게 감사할 줄 모른다고 치부합니다.


이것은 섬기는 것이 아니고 지배하려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어의 두 동사 ‘servire(봉사)’ ‘asservire(노예)’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을 의미하고 후자는 다른 사람들을 종이나 노예로 만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도 기꺼이 봉사하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행하는 사람들과 같은 범주에 들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는 하지만, 우리가 항상 하던 방식대로 일을 진행하고 있다면, 우리의 태도를 조금이라도 바꿔 예수님을 본받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종으로 거듭나도록 노력합시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연중 제25주간 월요일>(9.20) -창조시기 20일째- 


'등불과 빛'이 상징하는 것은 '구체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당신의 전 존재를 너를 위해 내어놓는 사랑으로,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셨고 빛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수많은 성인성녀들과 순교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고, 빛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늘진 세상,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착한 행실과 작은 관심들, 미소와 따뜻한 말 한마디와 인사가 그곳을 훤히 비추는 등불이요 빛입니다.

요즘 우리 안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입니다. 거기에 코로나 팬데믹이 더해져서 우리의 친교가 점점 더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너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극화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늘진 삶, 어두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그곳을 나의 착한 행실로 훤히 비추고 밝히는 등불이 됩시다!
제목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9.20) -창조시기 20일째-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루카8,17)

등불이신 예수님!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지만, 어제 주일로 이동해서 지냈기 때문에 연중 제25주간 월요일로 복음묵상글을 준비합니다.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 명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코로나와 함께하는 명절이지만, 우리의 마음만큼은 둥근 보름달처럼 넉넉하고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등불의 비유'입니다. 등불이신 예수님, 어둡고 그늘진 세상을 훤히 밝히시러 오신 예수님,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을 밝히는 등불, 빛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등불과 빛'이 상징하는 것은 '구체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당신의 전 존재를 너를 위해 내어놓는 사랑으로,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셨고 빛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수많은 성인성녀들과 순교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고, 빛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늘진 세상,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착한 행실과 작은 관심들, 미소와 따뜻한 말 한마디와 인사가 그곳을 훤히 비추는 등불이요 빛입니다.

요즘 우리 안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입니다. 거기에 코로나 팬데믹이 더해져서 우리의 친교가 점점 더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너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극화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늘진 삶, 어두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그곳을 나의 착한 행실로 훤히 비추고 밝히는 등불이 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한가위>(9.21) -창조시기 21일째-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12,15)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한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 명절'입니다.
오늘은 풍성한 오곡 백과를 내게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앞서 사시다가 먼저 저 세상으로 가신 조상님들과 부모님과 가족 친지들의 영혼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는 날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용서하여라! 욕심과 탐욕을 경계하여라!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어라!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오늘 제2독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 들려오는 죽음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요한묵시록14,13)
 
우리도 머지 않아 우리 조상님들이 계신 곳,
우리 부모와 가족 친지들이 계신 곳으로 가게 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루카12,20)
그 때가 임박해 있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통해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말씀에 늘 귀를 기울이면서, 날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은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연중 제25주간 수요일>(9.22) -창조시기 22일째-
 
"길을 떠날 때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루카9,3)
'제자들의 파견!'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세상 안으로 파견하십니다. 두 가지 파견목적을 제시하십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병자들을 고쳐 주는 것'입니다.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줍니다.
 
열두 제자들에게 부여된 두 가지 일은 지금 여기에 있는 '또 하나의 제자들'인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도 내가 머무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니 내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9,3)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한마디로 오직 주님께만 의지하면서 전도에 헌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주님께만 의지하는 '무소유의 삶', 이에 대한 역설인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충만함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 '하느님의 나라'이고, 나의 성령의 충만함이 너에게로 전해질 때 너의 아픔까지도 낫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듣고 있는 '에즈라기의 말씀''2의 출애굽 사건'이라고 불리는 '바빌론 유배에서의 귀환(해방)'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에즈라는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먼저 자신의 잘못을 하느님께 깊이 고백*****합니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에즈9,6)
 
우리도 에즈라처럼 하느님 앞에서 나의 연약함을 자랑하도록 합시다! 그래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또 하나의 제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
 
 
와우. 밤 ♡
1시간 찬물 담그고 20분 찌고 
10분 뜸들이고 다시 찬물로~~~
꼭 해볼께요 
고모님 쵝오!!!---손으로 깔수있는 방법 

추석의 달빛가득 받으시고 송편드시고 행복하세요 감사드립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경축이동)>(9.19) -창조시기 19일째-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9,24)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5.37-38)※※※

우리도 이겨냅시다!

화를 이겨내고, 분노를 이겨내고, 유혹을 이겨내고,
시기와 질투와 이기심과 교만을 이겨냅시다!

이 '이겨냄'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순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 놓은 장한 순교자들이 간직했던 믿음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이 믿음을 청하고,
이 믿음 안에서 우리도 장하게 순교합시다!

'이겨내자!'


<연중 제25주간 금요일>(9.24)
-창조시기 24일째-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9,22)
고통 그 자체만을 바라보거나, 고통 그 자체에만 머물러 있으면 고통은 결코 하느님의 선물이 될 수 없습니다.
 
50년 동안 오상의 고통을 겪으신 비오 신부님께서 고통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신 것은, 고통의 결과요 *****고통 그 너머에 있는 더 큰 영광인 부활을 믿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되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신원''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입니다.
 
고통을 짊어지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 오상의 비오 신부님과 죽음으로 신앙을 지켜낸 장한 순교자들을 함께 기억하면서, 우리도 나를 찾아오는 고통을 기꺼이 짊어지고, 고통의 결과인 *****부활을 향해 나아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