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연중 제26주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Whoever is not against us is for us- 칸탈라메사 추기경 - 민수 11:25-29 마태 9:38-43.45.47-48 오늘 복음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1독서의 에피소드를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는 말년에 일흔 명의 원로들을 임명하여 그를 도와 이스라엘 백성을 지도하게 합니다. 그러자 바로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은 예언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모세가 임명하지도 않은 두 사람에게도 똑같은 성령이 임했습니다. (모세의) 젊은 시종인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라고 말하지만, 모세는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반박합니다. 이제 복음 말씀을 살펴봅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러 측면에서 (1독서의 내용과) 비슷한 장면을 발견합니다. 사도 중 한 사람인 요한이 어떤 사람이 자기 무리에 속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는 것을 보고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고 그는 예수님에게 이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이르십니다. “막지 마라.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오늘의 복음 말씀에서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논할 것이 많지만, 오늘은 이 (매우 관련성이 높고 흥미로운) 이야기에만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선한 행동을 하고 성령의 징표를 나타내면서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일부 기독교 정통파의 사람들은 이 주제와 대상에 대해 최근의 공개된 내용을 보고 당황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무신론자들도 의로운 양심에 따라 생활한다면 영원한 구원을 열망할 수 있고, 만약 어떤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슬림이든 유대인이든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희망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신앙이 없이도 행실만 바르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왜 우리는 그리스도 교회가 하나되기 위하여 노력해야하는지 궁급합니다.’ 이로써 이 민감한 문제를 확실하게 밝힐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우선 이 교리가 소수의 고립된 신학자들만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공표된 교리임을 밝힙니다. (공의회에서는)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파스카 신비에 동참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기쁨과 희망: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22장 33절)’라고 말하며,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공의회를 통하여 처음으로 언급된 새로운 교리가 아닙니다. 신학자들은 언제나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나 세례와 교회 안의 소속됨과 같은 일반적인 방법 외에 특별한 방법으로도 사람들은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해 왔습니다. 이는 지리학적인 발견과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의 증가로 자신의 잘못없이 복음 선포를 들어본 적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점 그리고 들어봤다고 하더라고 파렴치한 정복자나 식민 지배자들로부터 부적절하게 들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후부터는 현대 사회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이제와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두 가지를 믿습니다. 하나는 예수님만이 객관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온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과 그분을 모르는 사람들 또한 구원되었다면 그분의 죽음으로 인하여 구원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사람들이 비록 가시적으로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그것을 지향하고 하느님만이 아시는 더 넓은 의미의 교회에 소속되어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불신자들이나 무신론자들은 구별해야 합니다. “구원은 아무나에게 값싸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듯이 “이기적이고 진리에 불순종하고 악에 순명하는 자들” 즉, 믿음과 도덕의 원리를 이용하며 세상에서 자기 만족만을 구하는 자들에게 맞갖은 유일한 약속은 사도 바오로가 다음과 말한 것뿐입니다. “그대는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와 격분, 환난과 고통을 쌓고 있습니다.”,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즉 이는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로마서2:5-9). 여기에서 우리는 (아마도 제가 위에서 언급한 이유들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지 않지만 다른 종교 안에서 하느님(신)을 믿고 그를 섬기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만약 그들이 하느님(신) 또한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교육이나 그들이 사는 환경이나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종속된 지적 영향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외부에 소속된’ 사람들에게도 두 가지는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반드시 그분에게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신앙과 가치들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며,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하느님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들이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적어도 하느님의 형상을 하고 있는 사람, 특별히 가난한 사람을 섬기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의 복음 말씀에서는 외부 사람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그들이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이들이기 때문’이라고 가정하고 있지만, 마지막 심판 날에 대한 그 유명한 말씀에는 이러한 제한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아. 너희들은 나를 위해 그렇게 했다.” 믿음도 중요하지만 사랑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 믿음이 절대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선의를 가진 남녀”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 특별한 범주의 믿지 않는 자를 정의하였습니다. 이제 교리에 대해 명확히 하고 났으니, 다른 것들도 정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내적 태도와 심리 상태입니다. 1 독서의 여호수아와 모세의 태도와 복음 말씀의 요한과 예수님의 태도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두 경우에서 모두 제자들이 얼마나 질투가 많은지 그리고 배타적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의 논리는 “누구든지 우리와 함께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를 반대하는 자”입니다. 반대로 그들의 주인인 모세와 예수님은 그들과는 다른 논리에 따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해를 할 수는 있지만 동의하지 않는 것은, 여기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모든 특권과 혜택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숨겨지지 않은 실망이 있습니다. 그들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가톨릭 신학의 이러한 새로운 개방을 바로 기뻐해야합니다. 외부에 있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적어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무엇이 이것보다 더 하느님의 자유로움과 무한한 관용을 확인시켜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세의 바램과 같이 '주님께서 온 백성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이제 저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구원에 대한 이 넓고 긍정적인 시각이 받아들이는 데 장애물이 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흔히 종교에는 기본적으로 행해야 하는 의무와 획득해야할 공로와 보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종류의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에게 포도밭 주인이 마지막 시간에 들어와서 일한 사람들에게도 같은 품삯을 주는 것을 보고,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 20:12)’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는 수행해야할 의무와 짊어져야 할 짐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은총이고, 선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여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해 주신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 말씀, 그분의 사랑을 가까이에서 알게 된 것은 크나큰 은총이며 특권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특권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는 또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더 이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선포할 필요도, 교회에 들어오라고 권할 필요도 없고, 각자의 신념에 따라 살도록 사람들을 혼자 내버려 두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성 베드로가 '온유하고 공손하게'(1베드 3:16)라고 말했듯이 그렇게 해야겠지만, 여기서 ‘혼자’가 ‘무관심’을 의미한다면 아무도 ‘혼자’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서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면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를 믿지 않는 자는 영원히 단죄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왜냐하면 그분을 믿고, 그분을 알고, 삶과 죽음의 구원자로서 그분 곁에 있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엄청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
<연중 제26주일>(9.26) -창조시기 26일째-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9,40)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오늘은 '2021년 제107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는 "더욱더 넓은 '우리'를 향하여"라는 담화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모습,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당신 모습, 다양성 안에서 친교를 이루는 모습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폐쇄적이고 공격적인 민족주의 형태 그리고 철저한 개인주의로 무너지고 있는 '우리'를 살리자."고 호소하십니다.**** "세례 받은 모든 이는, 어디에 있더라도 마땅히 지역 교회 공동체 그리고 하나인 교회를 이루는 지체이고, 한 지붕 아래 사는 식구이며, 한 가정의 일원"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실존적 변방(우리 주변)에 사는 이주민들과 난민들과 실향민들, 인신매매의 피해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주님의 구원이 선포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더욱더 넓은 '우리'를 향한 여정에 '모든 이가 함께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마르9,40.42) 죄는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너에게 따뜻함과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지 않은 것'입니다. 너와 나누지 않으면서 나만의 이익을 앞세운 욕심과 탐욕의 죄를 과감하게 끊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야고5,1.3) 그들에게, 삶으로 하느님을 전하고,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예언자들이 됩시다! |
<성 빈첸시오 드 뽈 사제 기념일>(9.27) -창조시기 27일째-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9,48) 오늘은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이신, '성 빈첸시오 드 뽈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빈첸시오 드 뽈 신부님은 프랑스 랑드 지방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나 사제가 되셨습니다. 신부님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일생을 바치셨습니다. '자선'은 '하느님께 드리는 행위'이며,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신적행위'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회개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기사(마태25,31-46)에서 가장 작은 이들,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약한 이들이 바로 '당신 자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 질 것이다."(루카11,41)라는 말씀을 통해 자선이 바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회개행위'임을 밝히셨습니다. 오늘 독서는 주님께서 즈카르야 예언자를 통해 전하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이제 내가 내 백성을, 해 뜨는 땅과, 해 지는 땅에서 구해 내리라."(즈카8,7) 모두의 구원,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구원을 통해,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인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소명'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소명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소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가장 작은 사람'은, 주님을 모든 것의 첫째 자리에 놓아둔 사람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자선, 기쁘게 나누는 자선으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
함께하는 세상 함께. 같은공기를 호흡하는 기쁨 메멘토 모리 !!! 죽어야만 부활하는 것 !!! 여유롭게 묵상하고 깊은 사색을 해야하는 때인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신망애로 나아가는 인생의 갈무리를 잘할수 있는 은혜로운 시기로 지금부터 잘 시작하겠습니다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무장하고요 아름답고 은은한 달빛처럼 빛나는 매일매일 보내셔요 감사드려요 가끔 여기다 소식 주셔용♡ 자연의 신비 신비로운 피조물 들의 감동 고통없는 부활이 어디 있겠습니까? |
삶의 다짐 9가지 ㅡ하지말것 1.조급증 --- 급하면 실수가 많아짐 2.화 ---- 이성을 잃어 가슴 멍듬 3.시기 - -- 창조와 생산이 중단 4.낙심---절망이 눈덩이처럼 불어남 5.외로움---- 세상의 주인공은 당신 6.못남----그모습그대로 승리릏 보이라는것 7.속이기----몸에 종기를 키우며 사는것 8.게으름----스스로를 파괴 9.얼굴 찡그리기-- ---인생의 승패가 얼굴에서 시작 네 피할께요 ㅎ 네 고모님 ***종아리 맛사지 5분 *** 꼬~~~옥 실천하겠습니다 . |
<연중 제26주간 화요일>(9.28) -창조시기 28일째-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9,54) '마음의 가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십니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는데,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고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분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를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보고 분노하는 당신의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어느 누구도 구원에서 배제될 수 없다는 '구원의 보편성'과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을 보고 분노하는 야고보와 요한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종종 삶 속에서 야고보와 요한과 같이 쉽게 분노하고 판단하는 다혈질의 모습을 드러내곤 합니다. 우리는 종종 나에게 해가 될 듯한 말 한마디를 듣거나, 혹은 내가 무엇을 빼앗기기만 하면 내내 흥분하면서 너를 단죄하는 모습을 드러내곤 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이런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정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뺨을 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권고14 '마음의 가난')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삶의 자리에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너를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나와 뜻이 맞지 않는 다름에 대해 쉽게 불편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이 그런 모습은 아닌지요, 쉽게 불편해 하고, 쉽게 분노하고, 쉽게 판단하고, 쉽게 단죄하는 모습은 아닌지요? 나의 마음이 너를 살리기 위해 끝까지 인내하는 예수님의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9.29) -창조시기 29일째-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1,47) '천사'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하느님의 봉사자들'입니다. 하느님의 심부름을 하는 '영적 존재'입니다. '천사에 대한 분명한 교리'는, '천사는 존재한다'는 것과 우리의 감각을 초월한 '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례력으로 천사를 기념하는 날은 '오늘(9.29)과 10.2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세 대천사'에 대해 알아봅니다. '미카엘 대천사'는 '누가 하느님과 같으랴?'라는 뜻을 지닌 천사로서, 악과 맞서 싸우면서 우리를 보호해 주는 천사이며, 임종자들의 수호천사입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을 지닌 천사로서, 하느님의 전령, 곧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설명해 주는 일을 하는 천사입니다. '라파엘 대천사'는 '하느님께서 고쳐주셨다.'라는 뜻을 지닌 천사로서, 아픈 이들의 수호천사입니다. '천사가 되자!' 너를 악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천사! 임종 때 곁에서 지켜주는 천사! 너에게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의 뜻과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 영적 육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사랑으로 함께 해 주는 천사! 우리는 이렇게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천사가 될 수 있고, 이런 천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1,4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 쪽으로 다가오는 나타나엘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거짓이 없는 사람'은 '마음의 창고가 깨끗한 사람'입니다. '마음의 창고 안에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천사 같은 사람들이며 천사입니다. 날마다 나를 지켜주고 보호 해주는 천사들에게 먼저 깊은 감사를 드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천사가 되어 봅시다! |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9.30) -창조시기 30일째-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10,2) '일흔두 제자의 파견!'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고 말씀하시면서,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이 말씀에 더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얼마 전에 묵상할 때에는 '지금 우리 주변이나 교회에는 일꾼들이 참 많은데...'하는 묵상을 했었는데, 오늘은 예수님 말씀처럼, '일꾼들이 참으로 적다.'라는 묵상을 합니다. 신성과 인성을 두루 갖추시고 우리가 사는 세상 안으로 오신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은 '모두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느님 말씀 안에 사는 것', '모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과 함께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 삶의 자리의 모습을 바라보니 참으로 많은 일꾼들이 필요함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적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더 그렇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그러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비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죽은 믿음, 죽은 신앙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9월 순교자 성월의 마지막 날이자, 성경을 대중 라틴말로 번역하여 쉽게 하느님의 말씀을 대할 수 있도록 하신 '예로니모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 번역하신 '대중 라틴말 성경'이 바로 '불가타(Vulgata) 성경'입니다. 감사와 함께 9월 순교자 성월을 잘 마무리하고,10월 묵주기도 성월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그리고 예로니모 성인께 특별한 감사를 드리면서,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
아기예수의 작은꽃 예수아기의 데레사 장미비로 은총의비를 내려주소서 아멘 !!!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10.1) -창조시기 31일째-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너 벳사이다야, 너 가파르나움아!"(루카10,13.15) '회개하자!' 소화 데레사 성녀는 동정을 간직하셨고, 교회로부터 '선교의 수호자'로,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습니다. 열다섯 살의 나이로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가신 데레사 성녀는 결핵을 앓다가 스물네 살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셨습니다. 그런 성녀를 교회는 선교의 수호자와 교회 학자로 선포했는데, 단순하게 생각하면 데레사 성녀에게 그러한 선포는 잘 어울리지 않는 옷 같아보입니다. 하지만 데레사 성녀는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죄인들의 회개와 사제들을 위해서, 특히 선교지역에서 사목하는 사제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고, 회개로 이끌었습니다. 비록 선교지역에 가서 땀을 흘리는 복음선포는 하지 못했지만, 끊임없는 기도로 함께하셨고, 유명하고 권위있는 신학대학은 나오지 않았지만, 데레사 성녀의 삶과 글이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올바른 길로 이끌었으니, 교회 학자로 선포되고,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됨은 마땅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인격적인 대화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에 감사와 찬미를 드렸을 것이고, 보다 더 충실하지 못한 죄를 고백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바빌론으로 유배된 이들이 주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면서 참회의 기도를 바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은 세 고을, 곧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감사와 찬미의 기도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끊임없이 바치면서 회개의 길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
<수호천사 기념일>(10.2) -창조시기 32일째-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18,10)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고,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수호천사'는 말 그대로 '우리를 선으로 이끌며 악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천사'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수호천사를 정해 주시어 그를 지키고 도와주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미사 '감사송'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천사들과 대천사들에게, 더없는 사랑과 존경을 드립니다. 그리고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탈출23,20-21) 누가 나의 수호천사이고, 나는 누구의 수호천사인가? 모두가 서로서로에게 수호천사가 될 수가 있습니다. 분명 내 주위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수호천사가 있고, 나도 누군가에게 수호천사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지금 여기에서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수호천사, 나의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 주는 수호천사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도 너에게 수호천사가 될 수 있고, 수호천사가 되어주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또한 누구의 수호천사인가? 매일 복음묵상글을 통해 만나는 저의 영적 동반자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여러분들이 바로 나의 수호천사들이고, 나도 여러분들의 수호천사입니다. 나도 여러분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서로서로에게 수호천사가 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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