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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연중 제28주일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삶의 향기 

2021년 연중 제28주일
 
How hard it is for those who have wealth to enter the kingdom of God!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창세 2:18-24
마태 10:17-30
 
오늘 복음 말씀 전체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관심이 가는 몇 가지 구절에 집중하여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계명을 지키라!”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그에게 급진적인 제안을 하십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 말씀에 그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복음이 우리에게 부와 재물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잘 들을 때가 왔습니다. 다만, 먼저 근거를 명확히 하고 혹시 모를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사전적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와 물질적 선을 결코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친구 중에는 아리마태아 출신의 요셉, '부자'도 포함됩니다. 자캐오는 자기 소유의 절반을 소유했는데도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됩니다. 그분께서 단죄하고자 하는 것은 돈과 재물에 대한 지나친 사랑, 즉 자신의 생명을 '돈에 의존'하고 '재화를 쌓아 두는 것'입니다(루가 12:13-21).
 
이 복음은 두 가지 생각 거리를 던져줍니다.

첫 번째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면서 많은 집을 짓는 등, 부를 축적하는 것을 인생의 주된 목표로 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현명함의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가 12:20)’
두 번째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재화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어렵게 만듭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골로 3:5, 에페 5:5). 맘몬, 즉 돈은 여러 종류의 우상 중 하나로 볼 수는 없습니다. 이는 우상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부어 만든 신상'(탈출 34:17)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객관적으로(실제로, 또는 의도적으로) 이 세상에서 누가 하느님의 진정한 적이며 경쟁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탄입니까? 그 누구도 아무 이유 없이 사탄을 따르기로 결정할 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는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누가 적인지 분명히 알려(선언해)주셨습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맘몬()은 하느님의 적입니다. 신학적 미덕의 대상, 믿음, 소망, 사랑이 더 이상 신에게 있지 않고 돈에 있다는 일종의 대안적 세계상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돈은 모든 가치에 있어서 불경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께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돈을 가진 자에게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그 주장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탐욕은 우상 숭배의 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불행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탐욕스러운 자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 스스로를 고립시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과도 애정 어린 관계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그들 스스로가 무엇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 가지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상속을 받기 위하여 친척들이 빨리 죽기를 바랍니다. 탐욕스러운 자는 쌓기 위하여 노력하고 삶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아무 것도 버릴 수 없기에 이 세상도 하느님도 즐기지 못합니다. 그들은 안전과 만족 대신 돈에 인질이 됩니다.
 
돈에 대한 가장 철저한 분석 중 하나를 수행한 칼 마르크스는 '신으로서의 돈의 전능함'을 말합니다. 돈을 매개로 하여 내가 모든 것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을 대변해 준다고 합니다. 돈의 힘이 나의 힘을 확장시켜준다는 것입니다. ‘나는 못생겼지만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못생긴 것이 아닙니다. 나는 절뚝발이지만 돈으로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비판은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며 완전히 일관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필요가 경제적인 것에 제한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돈의 힘으로 인하여 소외되고 비인간적으로 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돈이 어떤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주장은 유명한 시인과 철학자의 돈의 대한 독설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버질이라는 작가는 금에 대한 지독한 갈구함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주받은 대지여, 흔한 창녀와 같은 인류애여, 당신들은 나라들이 가야할 길에 이상한 놈을 놓아버리는구려. 눈에 보이는 신이시여, 당신은 불가능을 땜질하고, 키스하게 하는구려!(아테네의 타이먼, 43장면)’ 이러한 불온한 외침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돈의 신'은 모든 것을 비웃습니다. 돈의 전능함에 기인한 소외는 부유함의 다른 측면을 이해할 경우에만, 즉 부유함을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고 이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경우에만 효과적으로 비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돈의 힘을 묘사하거나 비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대안이자 훨씬 더 가치 있는 자산인 하느님의 나라를 계시함으로써 이를 비판하셨습니다.
 
돈과 부유함에 매달리는 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어렵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청년이 추구했던 '영원한 생명'('제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까?')에 대해서는 답을 얻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보물'을 제시하셨습니다. 부유함이 무엇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요? 하느님일까요? 반대입니다. 부자 청년은 기존 질서와 재산에 대한 권리는 보장하되, 폭력에 반대하는 신이라면 하느님을 진심으로 환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가 예수님이 전파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나자로가 당신의 집 앞에서 죽지 않도록 요구한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이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청년은 아마도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했을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 티모 6:10).’ 이것은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성경 구절 중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악(마약 거래, 마피아, 납치, 정치적 부패, 무기 생산 및 거래, 매춘 착취) 뒤에는 돈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이 우상이고 부유함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부자라도 희망할 것 없이 버려두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낙타와 바늘귀에 관한 말씀을 듣고 놀라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이라고 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부자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부자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기독교 전통에서는 한 번도 이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적이 없음)가 아니라 '어떤 부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가 쟁점입니다.
 
예수께서는 부자들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다음과 같이 알려 주십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한다(마태 6:20).”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가 16:9).”
 
예수님은 부자들이 해외로 돈을 송금하되 비밀 은행 계좌가 아닌 천국으로 송금하라고 제안하셨습니다. 성 아우구스틴은 많은 사람들이 돈을 지하에 묻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안전한 장소에 보관할 수만 있다면 평생 동안 돈을 보는 즐거움조차 포기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안전하고 최후에는 다시 찾을 수 있는 하늘나라에 직접 쌓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성자는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웃을 운반자로서 지정해 주셨습니다. 그들(가난한 이웃)은 당신이 최후에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것입니다. 하느님은 가난한 자들을 찾으실 것이고 하늘나라에서 당신이 가난한 이웃에게 준 것을 되돌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단순한 나눔과 자선은 분명히 공동선에 봉사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며 아마도 가장 권장할만한 방법도 아닐 것입니다. 정직하게 세금을 납부하거나, 상황이 허락할 때 직원들에게 후하게 월급을 주거나, 개발도상국에 현지 기업을 여는 방법도 있습니다. 요컨대, 그것은 그것을 유익하게 만들고 유익함을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물을 흘려보내는 수로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물을 머금고 있는 인공 호수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의 초상을 제시하였습니다. 구원받기 위하여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를 살펴보면서 오늘의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1 디모 6:17).”

<연중 제28주일>(10.10)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10,21)

나눔과 비움은 생명의 길!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합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10,17)

예수님께서 그에게 지켜야 할 계명들에 대해 말씀하시자,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10,21)

예수님의 이 말씀에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왜, 그랬을까?
진정 영원한 생명을 원했더라면, 미처 몰랐던 것을 알려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면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을텐데.
무엇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

집착!
재물에 대한 집착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는, '집착, 곧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말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 '너와 나누지 않고, 소유하고만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죽음 저 너머에서 만나게 될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인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원으로 이끄는 생명의 길은 소유와 집착이 아니라, '나눔과 비움의 길'이며, 모두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전 존재를 완전히 비우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나눔과 비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나눔과 비움으로,
영원한 생명에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합시다!



<연중 제28주간 월요일>(10.11)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11,29)

'회개의 표징!'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으로 가득 차 있었던 니네베가 요나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 곧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3,4)는 말씀을 듣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니네베 사람 모두가 완전히 '회개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시고,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딱 한번' 외쳤고, 그것이 그가 수행한 예언직에 전부였는데, 니네베 사람들 모두가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11,32)

'요나보다 더 큰 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지금 여기에 계시며, '말씀으로'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매일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 '성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매일 복음을 통해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말씀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체의 기적'과 '말씀의 기적'을 체험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도 니네베 사람들처럼 '회개하는 것'입니다.

'모령성체', 곧 '성체를 모독하는 행위'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 삼키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계시)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지금 회개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지금 우리 안에서 회개의 표징(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연중 제28주간 화요일>(10.12)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11,4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의 식사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는 바리사이를 예수님께서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히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11,39)

겉으로는 거룩한 척,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척 하지만, 마음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는 바리사이들, 율법의 겉(규정)은 중요시 하면서도,
율법의 본질(사랑)에 소홀했던 바리사이들의 거짓(위선)을 꾸짖으십니다.

이 꾸짖음이 지금 여기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 대한 꾸짖음이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은,
'또 하나의 바리사이들', 곧 열심히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도, 구체적인 사랑 실천에는 인색한 이들에 대한 꾸짖음입니다.

오늘 독서인 로마서 1장 16-25절의 말씀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을 지금 여기에서 살아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입니다.

어느 형제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제 돈 버는 일을 그만 접고, 남은 삶 여유를 갖고 즐기면서 살고 싶다."
이분은 불자이신데, 그래서 돈 버는 일을 접고, 귀촌해서 적게 쓰고 절약하면서 자연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부부가 함께 절에도 열심히 다니면서.

그렇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믿음 안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재림(다시오심)이 임박해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겉과 속을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결정적인 마지막 때를 위하여 겉과 속을 함께 깨끗하게 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8주간 수요일>(10.1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카11,42.46)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시 기득권 세력의 한 축이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위선과 악을 지적하십니다.

율법 규정 자체 안에서만 보면, 그들의 행위는 율법 규정을 잘 지켰기 때문에 '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보면 그들의 행위는 하느님의 의로움과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은 '악'이었고,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힘겨운 짐을 지워 놓고,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은 악, 너의 구원을 위해 땀을 흘리지 않은 '악'이었습니다.

"불행 하여라!"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불행 선언'은, 그들을 구원에서 완전히 배제시키시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장 큰 기쁨인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포르투갈 작은 농촌 마을인 파티마에서 세 어린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나타나신 날'입니다. 성모님께서는 1917년 5월 13일에 '세 어린이', 곧 루치아와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에게 첫 번째로 나타나셨고, 그 후 10월 13일까지 매월 13일에 '여섯 번' 나타나셨습니다.

세 어린이들에게 남기신 성모님의 메시지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와 고행을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모습은 아닌지? 그래서 시급한 회개가 필요한 우리와 나는 아닌지?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로마2,6-8)

지금 나의 완고함을 내려놓고,
지금 구원으로 나아갑시다!



<연중 제28주간 목요일>(10.14)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었다."(루카11,53)

'독한 앙심!'

지난 화요일부터 오늘까지 우리는 복음을 통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면서 그들에게 각각 세 번씩, '여섯 가지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이 불행선언의 결론이 바로 '루카복음 11장 53절에서 54절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예수님께 독한 앙심을 품습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회개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면서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마음을 품습니다.

'왜, 그랬을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마음 안에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 앞에 계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고,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 인간의 말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대체적으로 사제들을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왜냐하면 사제를 한 인간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과 관련된 일, 하느님과 관련된 일을 하는 분들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강한 신자들은 사제를 힘들게 하거나, 사제를 두고 불평불만 하거나 나쁘게 말하지 않습니다. 설령 부족한 모습을 보더라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사제들을 존경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이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에 봉사하는 직분, 즉 자기 자신들도 이를 영하고 자신들만이 다른 이들에게 분배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기에, 이 직분은 다른 어느 직분보다 더 큰 것인 만큼,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람에게 짓는 죄보다 이분들에게 짓는 죄는 더 큰 것입니다."(권고 26)

오늘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주님께로 돌아갑시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 아름다운 만남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아름다운 마음으로 가득 채워지면 참 좋겠습니다.ㅡ

인생을 이렇게 명료하고 아름답게 
표현하신 분----프코 교황님 
얼굴의 미소 참 좋아용 
고모님 미소도요 
기쁨의 미소 보냅니다 ㅎ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10.15)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12,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12,1.4-5.7-8)

결론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두려워할까?'
'그것이 '죽음'이지 않을까?'

죽음의 일반적인 의미는 '영원한 끝'이요 '영원한 없음(무)'이고, '영원한 이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이 두려운 죽음이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새로운 시작'이요, '새로운 있음(유)'이고, '새로운 만남'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자매인 죽음이여, 어서 오세요."라고 말한 것처럼, 죽음을 기쁘게 맞이합니다.

'오두막'이라는 영화는 유괴범에게 납치되어 오두막 살해된 사랑하는 딸 미시를 잃어버린 아빠가 죽음의 상태에서 다시 부활하는 모습, 세 천사의 인도로 죽음 저 너머의 세상에서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 딸 미시를 보고, 다시 부활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죽음의 상태에서 부활하게 하고,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서, 참새들보다도 훨씬 더 귀한 존재들입니다.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로마4,7-8)

바로 이런 행복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영원한 생명'이고, 이런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이런 행복한 사람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기쁘게 맞이하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연중 제28주간 토요일>(10.16)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12,12)

'깨어 있자!'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과 한 단락을 이루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12,8)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얼마나 자신 있게 그리고 기쁘게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고 있는가?

성당 밖인 삶의 자리, 곧 믿지 않는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내가 하느님을 믿는 신자이며, 성당에 다니는 사람임을 얼마나 잘 드러내고 있는가?

혹시 부끄러워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십자성호도 잘 긋지 못하는 신자는 아닌지?

나는 얼마나 내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이는 매우 중요한 물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12,9)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이슈 앞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신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깨어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깨어 있는 자에게 성령께서 임하시고,
그 성령께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굳게 믿고 희망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지금 깨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 바로 '성령'입니다.

오늘도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합시다!
그래서 성령을 받고, 이 성령께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깁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