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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연중 제23주일 Ephphatha 에페타, 열려라

[DABAR] 16주차 2021년 연중 제23주일
 
                                                                     Ephphatha
                                                                   에페타, 열려라
                                                                                                                             - 칸탈라메사 추기경 -
                                                                     마태 7:31-37.
 
이번 주 복음 말씀은 친절한 예수님의 치유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마르 7:32-35).’
 
예수님은 요술 지팡이를 사용하거나 손가락을 튕겨서 하는 마술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듣지 못하는 이의 귀를 만지니 내뱉어진 그 '신음 소리'를 통하여 그분께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깊이 공감했고, 그들의 불행을 얼마나 깊이 나누었고, 그들을 그분께서 스스로 짊어지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을 두고 복음 사자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마태 8:17).’
 
듣지 못하는 이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대부분 아이러니를 느끼지만 예수님께서는 연대와 연민을 느끼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첫 번째 가르침은 이미 여기(연대와 연민)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살거나 만나는 귀먹은 사람들에게 '에파타, 열려라!'라고 말하여 기적적으로 그들이 다시 들을 수 있게 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을 덜어주고, 어떤 장애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존중과 섬세한 태도로 대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교육하는 것입니다.
 
귀먹은 이를 조롱을 하거나 농담을 하는 것은 세상의 오래된 태도인 것 같습니다. 구약성서에 이미 이런 행동에 대해 훈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 된다. 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레위 19:14).’ 한 청각 장애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귀머거리는 동정심을 바로 불러일으키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성가신 일을 만들고 한 번 이상 말하게 하여 사람들을 곤경에 빠트립니다. 분리와 소외를 야기하고 다음과 같이 끔직한 말을 하게끔 만듭니다. 알아들었어요, 못 알아들었어요?’ 사실 이 말은 아주 위협적으로 느껴집니다. 귀머거리는 세상의 관계에서 격리되어 있습니다.’
 
듣지 못하는 이를 기쁘게 하거나 불쾌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심리학 학위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또렷하게 말을 하고, 일관된 목소리 톤으로, 그 사람을 향해 서서, 입술 모양과 몸짓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다시 말을 해야할 경우에는 화를 내지 않고 친절히 말해야하며, 처음에 말했을 때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에 더하자면, 듣지 못하는 이와 같이 있을 때에 다른 사람과 너무 낮은 목소리로 말하지 않고, 그들 뒤에서 (다른 사람과) 윙크(듣지 못하는 이를 빼고 다른 사람과 몸짓)를 하지 않습니다.
 
듣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일어난 일인데, (이런 행동을 하면) 듣지 못하는 이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험담하거나 조롱한다고 의심하게 합니다. 들을 수 없어서 오해를 불러 일으켰을 때에 이를 가지고 웃거나 하여 듣지 못하는 이를 더 굴욕적으로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이는 배려심을 지닌 인간이거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정도에 차이가 있다고 해도 가족이나 지인들 중에 이런 장애가 있는 사람, 특히 노인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듣지 못함에 대한 것만은 아닙니다. 왜 복음 사가들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원어(아람어)로 이 사건에 대해 말하였을까요? 에파타라는 단어는 아람어로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던 언어, 즉 방언입니다. 아빠, 아멘와 함께 역사가들이 언급하는 이러한 단어는 예수님의 본인의 목소리를 담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유물입니다. 이 단어에 대한 설명은 초대 교회로부터 육체적인 귀먹음이 아니라 영적인 귀먹음까지도 가르키고 있습니다. 이에 그 말씀이 오늘날까지 세례식 전례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고 나서 사제는 아이의 귀와 입술을 만진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에파다, 열러라!’ 이 말은 즉, 하느님의 말씀과 믿음과 찬양과 삶에 열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복음 말씀이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뿐만 아니라 들을 수 있는 귀머거리,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는(시편 115:6)’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이는 보편적인 우리의 믿음이며, 일반적인 관용구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열린또는 들을 수 없는또는 연민에 닫힌’(연민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까?
 
에파타! 열러라! 이는 육체적인 귀먹음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말씀입니다. 닫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요구)에 둔감하게 대하지 말하는 초대입니다. 긍정적으로 사람들과 자유롭고도 훌륭하며 건설적인 관계를 맺고 주고받음으로서 자신 스스로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초대입니다. 이를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적용하면, ’에파타! 열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이라는 초대이고,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들어오게 하라는 초청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에파타라는 말씀은 요한바오로2세 교황님의 취임식에서도 그리스도에게 문을 활짝 엽시다!‘라는 말씀을 통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성 바오로는 믿음은 들음에서(로마 10:17)’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 깊이 듣지 않고서는 어떤 믿음도 불가능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은 선물이고 이러한 선물을 받지 못하여 믿지 못한다고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정말 그런 것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도록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도록 기회를 준 적이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무엘이 한 것과 같이 말한 것이 있습니까?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
 
때로는 육체의 귀를 닫음으로써 영혼의 귀를 열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그 청각 장애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격렬하게 삶을 살아가고 영원을 추구하기 위하여 외딴 수도원을 선택하는 소녀들이 있습니다. 나의 수도원은 귀먹음입니다. 침묵 속에 일상을 살아가는 것은, 외부 세상과 그 소음과 정해진 시간으로부터 고립된 것은, 나의 삶을 만족함과 성숙함으로 이끌어줍니다. 예수님의 에파타!는 나의 삶 안에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마음과 생각이 그분의 세상에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귀먹음은 기쁨으로 가득찬 수도원 생활의 진수가 되었습니다. (수도원 생활) 안에서의 귀먹음은 현대 생활의 소동으로부터의 안식처가 되어, 보다 진실되고 아름다운 세상을 찾게 해 준 것입니다. 다른 차원이기는 하지만, 귀머거리 중 가장 유명한 베토벤에게 일어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의 가장 아름다운 선율인 환희의 송가를 포함하는 교향곡 9번은 그가 완전히 청력을 잃고 난 후에 작곡한 것입니다.
 
이 다른 세상을 발견하기 위하여 육체적인 귀먹음을 꼭 겪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선택적으로 귀머거리가 될 수가 있습니다. 선택적 귀머거리라 함은 들을 것과 듣지 않을 것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대의 성자인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한다면 귀를 막으십시오.’ 우리는 여기에 한 가지 사항을 더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이웃에 대해 나쁜 말을 하면 귀를 막으십시오. 누군가 당신에게 아첨하거나 부정한 돈을 약속하면서 타락하게 하면 귀를 막으십시오. 라디오나 음악을 통하여 천박하고 저속한 언어로 음란하고 신성 모독적인 노래를 전하면 귀를 막으십시오.
 
또한 때때로 우리는 누군가 우리를 학대하거나 우리 자신에 대해 악의있는 말을 할 때, 하나하나 되받아치기보다는 그 말이 아무 의미없이 바닥에 떨어지도록 내버려 둬야 합니다. 시편의 필자는 교회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한 것과 같이 다음처럼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학대 받았지만 학대로 답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귀머거리처럼 듣지 못하고 벙어리처럼 입을 열지 못합니다(시편 38:14).’ 화가 났을 때 내뱉은 말을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흘러보냄으로써, 특히 가정에서, 얼마나 많은 악한 결과를 피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청각 장애인 자매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리 자신을 위한 작은 수도원을 만들도록 합시다. 더 잘 들을 수 있기 위하여, 귀머거리가 됩시다. 우리를 사방에서 포위하는 무의미한 말의 소동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이것(선택적으로 귀머거리가 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는 어쩌면 생리적 욕구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소음 공해는 이미 다른 환경 공해와 같습니다. 어느 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아, 조용히 하고 들어라(신명 27:9)!’ 우리는 이렇게 말합시다. 그리스도인이여, 조용히 하고 들어라!’
 
오늘 복음 말씀은 군중이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열정적으로 찬양하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태 7:37).’
 
(한 번은, 아이고! 한 강사가 헷갈리는 바람에 '저분은 귀먹은 사람이 말하게 하고 말못하는 이들은 듣게 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분명히 큰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진부하게 말한 것에 이어 그 찬양의 말은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습니다.
***'
복음은 모든 것을 휼륭하게 한다. 귀머거리가 들었을 때에 좋은 것을 (선별하여) 들을 수 있게 하고, 들어서 좋을 것이 없을 때에는 들을 수 있는 자도 귀머거리로 만든다.‘***

 
 <연중 제23주일>(9.5)
-창조시기 5일째-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7,37)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십니다.

그를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시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 제1독서(이사35,4-7)는 메시아의 출현 예고에 대한 말씀인데, 오늘 복음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이사35,5-7)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하실 일과 예수님과 온전하게 함께 할 때 일어나는 기적에 대해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이 예언을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그들이 율법으로 사람들을 차별하면서 갈라놓았던, 가난한 사람들과 많은 병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셨고, 그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나의 마음이,
얼마나 메시아이신 예수님께로 향해 있는가?           


제대로 듣지 못하고,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그래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갈등이나 문제들은 나의 마음이 예수님께로 온전하게 향해 있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9월 순교자 성월입니다.
모진 박해를 이겨내고 소중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켜내고 전해준 장한 순교자들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장한 순교자들처럼, 나의 마음이 온전하게 예수님께로 향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3주간 월요일>(9.6) -창조시기 6일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루카6,7)

'나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살릴 수 있을까?'에 온 마음을 담습니다.
사제와 너를 통해 이루시는 하느님의 구원행위에 나는 얼마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마음으로 함께 하고 있는가? 혹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콜로2,3)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을 간직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의 마음이 향해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잘 사는 길(well  being)'이고, '치유되는 길(healing)'이고, '선종하는 길(well dying)'이라는 것을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온 마음으로 함께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나와 너 그리고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을 살리는 일에 더 마음을 담는 '순교자 성월', '창조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연중 제23주간 화요일>(9.7) -창조시기 7일째-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6,12)
공생활 시작을 앞두고, 광야에 나가 단식기도를 하신 예수님!
 
*거룩한 변모 때나 열두 제자를 뽑으실 때, 잡히시기 전에, 산에 올라 홀로 기도하신 예수님!
 
*열두 제자들을 뽑으실 때에는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셨고,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신 예수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산으로 나가셔서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후에 열두 제자들을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신 말씀입니다.
열두 사도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가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고, 놀랍게도 당신을 배반할 배신자 유다 이스카리옷도 뽑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도의 결과인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와 대화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고, 이 뜻 안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예수님!
 
그러니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도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도 사도 바오로의 권고처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앞서 기도해야 하고, 기도의 힘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특히 힘들고 어려울 때, 너와의 관계가 불편할 때, 더 기도해야 하고, 기도의 힘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그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내가 될 수 있도록, 오늘도 시간을 내어 '나의 작은 기도방(war room)'에 머물러 있도록 합시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
***'기도하신 예수님!'과 나 아녜스와의 우정의 관계 ***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9.8)
-창조시기 8일째-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1,23)

오늘은 성모님의 탄생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탄생이 큰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그 탄생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태를 통해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곧 예수님의 뿌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인성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고, 예수님을 낳으신 마리아에게서 끝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탄생을 기억하면서 '뿌리'에 대한 묵상을 해 봅니다.
모든 것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원 뿌리'(제일원인.causa prima)는 '창조주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뿌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이어온 뿌리, 곧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육신의 뿌리'와 영혼의 뿌리인 '신앙의 뿌리'입니다.

어제 밤에 어느 분이 보내주신 '찔레꽃' 노래를 들으면서 어머님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제 방에 걸려있는 어머님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면서, 지금의 나를 있게 하신 어머님의 사랑과 나의 부족함을 함께 떠올려 보았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주신 육신의 뿌리인 부모님을 떠올려 보면서, 부모님께 무조건 감사드리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뿌리인 신앙의 영적 부모님이신 대부님과 대모님들도 기억하고 전화 안부라도 꼭 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대부와 대모님들은 신앙의 영적 자식들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신앙생활은 잘 하고 있는지 안부 전화나 문자라도 꼭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태풍 하이선이 곳곳에 많은 피해를 주고 떠나갔습니다.
큰 피해를 입으신 분들에게 위로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 고통 중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억하면서 오늘 하루를 힘차게 시작합시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탄생을 기억하면서 '뿌리'에 대한 묵상을 해 봅니다.

모든 것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원 뿌리'(제일원인.causa prima)는 '창조주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뿌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이어온 뿌리, 곧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육신의 뿌리'와 영혼의 뿌리인 '신앙의 뿌리'입니다.

뿌리가. 감사하고  든든합니다 
고모님 고요속의 평화로움이 감싸이시면 참 좋겠습니다
싸랑합니다 
<연중 제23주간  목요일>(9.9)
-창조시기 9일째-
-자비로움 

사도 바오로는 이 세상 형체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때와 종말의 때!'
인간적으로 정말 마주하고 싶지 않은 때이지만, 이는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모두에게 주어진 '결정적인 때'입니다.

이 결정적인 때 앞에서,
지금 부유하고,
지금 배부르고,
지금 웃고,
지금 칭찬 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마지막 때에 기뻐할 수 있도록
오늘도 화이팅 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