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BAR] 15주차 2021년 연중 제22주일 무엇이 사람을 더럽히는가 What defiles a person - 칸탈라메사 추기경 - 마태 7: 1-8. 14-15. 21-23. 이번 주일부터는 지난 5주간의 요한 복음 읽기를 마치고 마태오 복음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의 바리사이인들은 손을 팔꿈치까지 씻지 않고는 음식을 먹지 않았고, 장터에서 돌아왔을 때 절차에 따라 씻지 않고는 식탁에 앉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의례 즉 외적인 순결을 강조하여서 이에 의지하여 하느님 앞에 거룩함을 들어내려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이 씻는 의식을 치르지 않고 음식을 먹자, 선조들의 전통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가르침을 주실 수 있는 기회가 만들었습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태 7:14-15, 23).”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지배적인 사고 방식에 반대하는 진정한 종교 개혁을 이루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초점을 외부에서 내부로 옮기셨습니다.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근본적인 가르침은 항상 같습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경건하고 종교적이라는 사람들에게 내면의 마음보다 외적인 부분이나 의식을 더 중요시 여기는 위협적인 경향성을 끊어내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선한 것보다 남들에게 더 크게 보이고 싶어하는 욕망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바로 위선, 바리세이인들의 형식주의입니다. 언급했듯이, 전통적인 가르침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다만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복음에서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차원에서도 새로운 가르침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시대의 일부 바리세인들이 정결한 마음보다 외적인 정결함을 더 중시하는 것을 꾸짖으신 것처럼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대기, 물의 오염 그리고 오존층의 구명과 같은 물리적 오염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은 내부 도덕적 오염에 대한 침묵과 대조됩니다. 예를 들어, 왜곡된 정보로 인한 진실의 오염이나, 생명의 근원을 오염시킬 위험이 있는 성적 행동이나 유전자 조작에 대해 누가 신경을 씁니까? 우리는 타르로 뒤덮인 기름으로 오염되어 물 밖으로 날아가지 못하는 바다 새의 사진을 보며 분노하지만, 모든 면에서 악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우리 아이들의 유년기에 잘못된 행동에는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좀 더 가까이 살펴봅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들어오는 것(상한 음식이나 유통기한이 넘은 제품)’에 극도로 관심을 가지면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것(오만, 폭력, 거짓말)’에 똑같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이라고 책망하시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오염을 대조하는 데 관심을 가지자는 것은 아닙니다. 물리적 오염이나 위생을 위한 투쟁은 진보와 문명의 표징이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에도 예수님께서 손이나 안경 등을 씻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는 문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화재의 원인을 확인할 때에 화염이 발생한 지점을 확인하는 것과 같이 세상에 존대하는 모든 오염의 근원을 밝히기 위하여 투쟁해야 합니다. 이럴 경우에 우리의 탐색은 언제나 그 지점, 사람의 마음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자기 중심성, 탐욕적인 시기, 주의 산만이나 태만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마음의 생태를 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만원의 근원인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악’의 근원이고 세상을 ‘오염’시키는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에는 ‘악’이나 ‘죄’가 없었습니다. 야생 동물이나 자연 현상은 해로울 수 있지만, 그 자체로서 악하지 않습니다. 악함은 자유를 얻은 사람의 전유물입니다. 아담이 그의 죄로서 피조물을 오염시키기 전까지 모든 것은 선이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여태까지 배워왔습니다. 이쯤해서 우리는 복음의 가르침은 잠시 내려놓고, 멈춰서서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포괄적으로 비난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이러한 비난은 또한 위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 말씀을 세상에 적용하고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그럼 어디에서 시작해야할까요? 진실로 나에게만 ‘의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를 찾기 위해서는 생태학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생태학(eco-logy, 에코-로지)’이라는 단어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소리를 질렀을 때 응답으로 오는 그 메아리(eco, 에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에코’는 ‘집’이라는 의미의 ‘oikos’에서 온 것으로 넓게 생각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을 의미합니다. 만약 ‘생태학’이 환경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면, 가장 가까운 환경인 내 마음부터 그리고 내 가족의 마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 우리만이 유지 관리하고 청소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았습니다. 복음은 이 청소를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해 불분명하거나 모호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더럽히는 우리가 제거해야하는 것을 열거하셨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무엇이라고 하는지 다시 살펴봅시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태 7:21-23).” 오늘날, 복음 자체와는 상반되는 것을 가르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언급한다고 주장하는 ‘새로운 종교’가 확산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 중에서도 매우 공격적이고 고위층의 지지를 받는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는 모든 메시지를 ‘청소’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고통스러움 과거의 경험에 대한 무의식적 기억에 대해 말합니다. 다이어네틱스(dianetics)라는 기술로 전생의 기억을 되살려, 나쁜 기억은 모두 지워 ‘청소’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면(그동안 수백만 달러를 조직에 지불하고 나면), 텔레파시 능력을 갖게 되어 모든 전생의 기억을 갖게되고, 모든 신체적 악을 제거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의 경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깨끗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수백만 달러를 쏟아부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덕을 쌓고,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보다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가능해집니다. 다이어네틱스를 통하지 않고, 양심 성찰을 통하여 가능합니다. 전생에 겪은 가상의 상처와 잘못을 찾으려고 하면서 이생에서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열거하신 우리를 더럽히는 것 중에 하나를 실천적으로 살펴봅시다. 비방 그리고 이와 어원이 같은 악들-이웃에 대해 악의적인 말을 하는 것-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정말로 마음이 깨끗하길 원합니까? 그렇다면 험담하고, 비난을 전하고,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뒷통수를 치고, 너무 쉽게 판단하는 버릇을 고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합시다. 한번 퍼지기 시작한 독은 중화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탈리안 시인인 메타스타시오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말을 되돌리려 애쓸 가치가 없다. 그것이 당신의 화음에서 벗어나면, 화살을 멈출 수 없다. 활을 떠나면.’ 거리 청소부(요즘 이들을 ‘생태계 운영자’라고도 부름)는 쓰레기를 버리러 갈 곳이 있습니다. 바로 소각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음의 생태를 위하여 소각로를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정한 회개를 기반으로 하는 화해의 성사인 고백성사입니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소각장은 그분 자신이시며, 그분은 언제나 기꺼이 우리 죄를 자신의 피로 씻겨주십니다. 그분의 피는 위대한 ‘세제’이며 우리의 양심을 굳게 하는 악의 덩어리를 녹이는 ‘용매제’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깨끗하게 합니다(히브 9:14).” 또 다른 ‘환경’인 가족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봅시다. 이 경우에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양심을 대할 때의 중요한 키워드는 폭로, 즉 사악한 마음과 행동을 드러내고 공개적으로 맞서는 것이었다면, 가족을 비롯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가려주는 것입니다. 약점을 덮어주고, 변명을 기다려주고,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것을 강조하며,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발견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였듯이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7).’ 물론 그것이 사랑으로 이루어진 대화와 상호 교정까지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 생태학을 위한 소각로도 있습니다. 쓰레기에서 유독 성분이 나오기 전에 모든 쓰레기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과하십시오. 이 일상적인 행동이 주변의 공기를 얼마나 상쾌하게 하는지, 신뢰와 용기를 주는지, 이전보다 더 큰 사랑과 존경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지 보고도 믿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진심을 다하여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용기를 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미안하다고 말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시겠습니까? 메타스타시오가 말한 것은 완벽하게 사실은 아닙니다. ‘우리의 화음에서 벗어났을 때’ 이를 다시 불러올 수 있습니다. 사과함으로써 말입니다. 마무리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에게 하신 위대한 말씀을 다시 새겨봅시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태 7:15).” |
향기롭고 고운 마음 가득히 채워주시면 참 좋겠습니다.고맙습니다. 순간순간 행복하게 살고 . 치매 예방 진단 교육이 중요함을 배웠습니다 오픈 . |
<연중 제22주일>(8.29)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르7,6) 8월의 마지막 주일인 연중 제22주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안 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신명4,2.6) 그리고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기를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1-22)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상들의 전통에만 머물러 있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헛된 믿음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르7,6)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루카 복음10장 29절에서 37절의 말씀인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 사제와 사제들의 봉사자인 레위인은 그를 그냥 지나쳐 갔지만,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가고 있었던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다가가 지극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이런 울림으로 제게 다가 왔습니다. ***"척하는 모습을 벗어버려라. '믿는 척', '거룩한 척'하지 말고, 몸과 마음이 함께 믿고, 함께 거룩해져라."*** . 머리와 입술로만 하느님을 믿지 말고, 삶으로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라는 외침! 참되게 믿고, 참되게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또 하나의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고모님 희년 선포시죠? ㅎㅎ 하늘에 핀꽃 (별) 마음에 핀꽃 (사랑)---별과 사랑의 꽃이 화알짝 피면 참 좋겠습니다 <연중 제22주간 월요일>(8.30)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루카4,18) 희년을 선포하자! 기름 부음을 받으시고, 하느님의 영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잡혀간 이들에게, 눈먼 이들에게, 억압받는 이들에게 희년, 곧 기쁨과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희년 선포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이유이며, 예수님 공생활 시작의 알림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희년을 선포하자!'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사람이 된 사람들은 '축성 성유의 도유(기름바름)'를 통해 '주님의 영'을 받았습니다.***예수님의 사람***,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은, 예수님처럼 희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기쁨과 자유와 해방을 주는 것입니다. 먼저 ***가장 가까운 이웃인 나 자신과 나의 가족에게 희년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면 희년 선포의 대상들이 보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삶을 사는 사회적 약자들, 아픈 이들, 독거노인들이 보입니다. 그들에게 희년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기쁨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힘들어 하는 아프카니스탄의 고통이 보입니다. 그들 또한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 이번에 이프카니스탄 형제자매들을 기쁘게 받아 준 진천군 군민들의 사랑이 크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말 못하는 자연의 피조물들,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핍박받고 있는 자연의 피조물들도 우리와 함께 잘 살아야 하는 동반자입니다. 그들을 핍박한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들에게도 희년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이 코로나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희년 선포를 위해 땀 흘리는 하느님의 딸 아네스가 될께요 |
? 매미의 오덕(五德) ?♂️ 입추가 지나면 매미는 더 정열적으로 울어댑니다. 빨리 짝을 만나 이승에서의 사랑을 나누고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매미의 일생을 살펴보니 매미는 땅속에서 7년을 기다렸다가 성충이 되어 이 세상에 나와서 10여일 정도로 살다 생을 마친다고 하네요. 짧고 굵은 매미의 삶을 선비들은 군자의 다섯 가지 덕을 겸비한 것으로 여겼답니다. 1. 매미의 곧게 뻗은 입이 갓끈과 같아서 학문(學問)에 뜻을 둔 선비와 같고, 2. 사람이 힘들게 지은 곡식을 해치지 않으니 염치(廉恥)가 있으며, 3. 집을 짓지 않으니 욕심이 없이 검소(儉素)하고, 4. 죽을 때를 알고 스스로 지키니 신의(信義)가 있고, 5. 깨끗한 이슬과 수액만 먹고 사니 청렴(淸廉)하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임금이 정사를 볼 때 머리에 쓰던 익선관(翼蟬冠)은 매미의 날개를 본 뜬 것이며 매미의 오덕(五德)을 생각하며 백성을 다스리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다 합니다. 매미의 마지막 울음 소리를 소음으로 듣지 말고 매미의 오덕(五德)을 떠올리면서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해봅시다. ?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사랑함니다. ??♂️ |
루까 신부님께 감사드리고 또 고모님 티모테아 고모님께도 깊은 사랑 드립니다. 성경의 티모테오 전서 읽을때마다 티모테아전서라고 예쁜 실수하며 고모님 사랑 새긴답니다 8월의 마지막 날을 잘 마무리하고, 기쁘게 새로운 '9월 순교자 성월'을 9월을 맞이하는 좋은하루 보낼께요 <연중 제22주간 화요일>(8.31)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4,32)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신 다음, 갈릴래아의 가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랍니다. 예수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권위'는 '사람들을 이끄는 힘'을 의미하는데,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권위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더러운 영들이 내 주위를 맴돌면서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또한 ***내가 항상 간직하고 있어야 할 권위***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직하고 계셨고, 또 내가 간직해야 할 권위와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재물이나 지식과 같은 세상 것으로부터 오지를 않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예수님의 권위는 성령 안에 머무는 사람들,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들, 말씀 안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나 자신의 모습을 먼저 성찰해 봅니다. 나는 얼마나 하느님의 사랑과 말씀 안에 머물러 있는가? 하루의 삶 속에서 이 시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가? 8월의 마지막 날 복음묵상글을 준비하면서, 부족한 모습을 하느님 자비에 맡겨드리면서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다짐,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권위와 힘으로 말을 하고, 사목을 하고, 세상을 바라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5,2-5)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이제 가을입니다. 독서하기에도 좋고, 묵상하기에도 참 좋은 계절입니다. **8월의 마지막 날을 잘 정리하고, 기쁘게 새로운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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