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BAR] 14주차 연중 21주 Christ loved the Church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셨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2독서: 에페 5:21-32 복음: 요한 6:61-70 이번 주일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요한 복음 6장의 끝부분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전체 연설의 극적인 결말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방금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하고 떠나갑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도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요한 6:67)”라고 묻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 6:68).” 그 순간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영원히 따르기로 선택합니다. 그때까지 그들이 지상에서 자신들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분을 따랐다면, 이제 그들은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를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사도들의 영원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이 복음 내용은 우리 역시도 그리스도를 영원히 따르겠다고 했던 과거의 선택을 새로이 갱신하도록 초대합니다. 과거에 우리가 기독교인이 될 시점에는 아마도 교회의 전통이나 문화적 습관에 따라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개인적인 선택이 그렇게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았겠지만, 지금 여러분은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문제에 있어 오늘날 젊은이들이 부모가 결혼해야 할 사람을 정해주는 것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종교적인 문제에서도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선택을 강요한 것을 만족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분명 좋은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가장 나쁜 경우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선택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도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제 묵상은 제 2독서에 더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우리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주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부를 읽어 보겠습니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며,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도 이렇게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에페 5:25-32).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 부부들에게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데 이러한 주장의 가장 강력한 논거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비로운 신부였던 교회에 대한 사랑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결혼이란 그리스도와 교회간의 관계라는 이미지로 투영될 때 그 최고의 존엄성을 갖게 됩니다. 인간의 결혼이라는 주제는 잠시동안 제쳐두고(일전에 이미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와 교회라는 이슈에 집중해봅시다. 이것은 매우 필요한 일인데, 심지어 신자들 사이에서도 이 이슈에 대해 큰 혼란이 야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셨다'라는 바오로 사도 자신의 고백 안에는 하나의 질문이 숨어있습니다. 그 질문은 은근히 울려 퍼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떤가요?’ 묵상 후에 나오는 일반적인 대답은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교회는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일 것입니다. 세계의 일부 지역에는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신자들을 가르키는 특정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없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이런 태도를 비판하거나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러한 신자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기를 희망합니다. 이러한 오해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우리가 보통 '교회'라고 할 때 사실 거의 항상 '교황이나 주교, 사제'라고 하는 교회의 위계질서를 떠올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 점에서는 교회가 틀렸고, 저런 점에서도 교회가 틀렸다. 교회는 왜 이런 말을 했는가? 교회는 이 문제를 왜 이런 식으로 처리할까'라고 말할 때 이해될 수 있는 맥락입니다. 이것은 교회안의 위계질서 집단이 과거에 걸쳐 스스로 구축해온 일종의 접근방식인 데 이 방식은 모든 면에서 극복되어야만 하는 관행입니다. 어느 한 나라나 그 나라를 지배하는 상위계층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교회도 '교황, 주교, 사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백성', 즉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집합체라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것을 강력하게 선포했습니다. ‘교회는 우리 모두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집니다. 우리가 고대에 지어진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밖이나 거리에서 보게 되면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교회를 방문할 때 이런 점을 유념하십시오). 그저 어두운 줄무늬들로 이루어진 검은 유리창 조각들로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대성당 안에 들어서서 같은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내부에서 햇빛을 통해 바라보면 그 경이로운 색상과 모양에 숨이 턱 막히게 될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밖에서 비신자들이나 적대자들의 눈에 비치는 교회는 그저 수많은 결점 투성이 조각들의 집합체로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안으로부터 교회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신자들은 교회를 이루는 조각들을 하나하나 진정으로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즉 바오로 사도께서 보았던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위대하고도 오묘한 ’신비‘말입니다! 오해는 또한 교회의 개념에서 영혼과 몸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교회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와 마찬가지로 나이와 그 매력이 제각각인 몸과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몸은 사람들과 예식, 전통, 규정과 역사(때로는 흠잡을 만한)로 이루어진 우리 눈에 보이는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한편, 교회의 영혼은 그것이 인도하는 하느님의 왕국, 즉 성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의인들과 성인들을 함께 초대하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만남(또는 잔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자기 육신을 죽이고 영혼만 살아있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교회 역시 그 역사와 가시적인 실체적 존재를 부정하고 보이지 않는 영적인 부분만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과 교회에서 선과 악은 오로지 마지막 때에 영원히 분리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설명해주신 대로 그 전에 그렇게 하는 것은 알곡과 쭉정이를 함께 불에 태워버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악만 존재한다면 그 누가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 선만이 존재한다면, 그 누가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귀스타브 티봉, 프랑스 철학자). 우리 모두는 겸손하고 가난하고 복음주의적인 교회, 권력에서 분리되어 순전히 인류를 섬기는 일에만 전적으로 헌신하는 교회를 꿈꿉니다. 그러나 교회가 살아서 그 동안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오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꿈을 키울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만날 수 있었을까요? 너무도 단단한 나무 껍질을 욕하고 부정하면서, 동시에 그 단단한 나무 껍질 때문에 보호되고 간직되는 달콤한 수액을 실컷 빨아먹기를 바래서는 안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교회가 그렇게 위선적일 수가 있습니까? 도대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심지어는 교황과도 연관된, 스캔들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러한 것들은 사실이며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가장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신의 영광과 전능하심을 가장 확실히 실현하기 위해, '교인'들을 포함한 남자 여자들의 불완전함을 활용하시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작가 브루스 마샬이 말하길,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솜씨 좋은 목수로서 자신이 찾을 수 있는 가장 뒤죽박죽이고 엉성한 판자들을 찾으셨고, 그 판자들로 큰 배를, 즉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이 배는 그 모든 부족함과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이천 년 동안이나 바다에 잘 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어떤 사람들을 사도로 택하셨는지 (유다, 베드로 등), 그런 그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이 완벽한 자격을 가졌는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교회의 모든 '오점과 주름들'을 찾아 지적하려 애쓰지 맙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이 바로 그것들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만약 내 삶에서 내가 죄를 덜 지었다면 교회의 주름도 덜했을 것임을. 온갖 '부패'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을 비난한 한 개신교 개혁가에게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가톨릭 교회가 개선되기를 기다리면서 이 교회를 감내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역시도 제가 더 나아지기를 기다리면서 저를 참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는 고국인 프랑스의 역사에 있어 모호했던 순간인 나치 점령하의 시기에 신자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교회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과 관련하여 몇 가지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하나의 교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나의 교회를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낯선 사람들앞에서 굳이 그들을 대적하여 설교하려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들을 변호할 수 있다면, 저는 그들을 변호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나의 흠을 덮어준다면 나는 그 부끄러움을 마음 속 한 켠으로 숨겨버리고 그저 잠자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다른 사람 앞에 나서서 그들에 관해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인이 창녀인 남편은 스스로 이집 저집 다니면서 자신의 부인이 창녀라고 떠벌리고 다니지 않습니다. 자신의 명예를 지킬 목적으로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의 아내가 바로 자신의 가정에 속하기 때문에 남편은 그녀의 흠을 밖으로 드러낼수가 없습니다. 대신 집안에 돌아오고 나서야 화를 내는 법입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에서 항상 침묵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목소리를 높일 때에는 과연 어떠한 맥락에서 행해져야 하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교회의 한 일부라고 느낄 때,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해 교회와 공감하게 되는 때에 (앞서 생텍쥐페리의 표현대로라면 남편이 "집으로 돌아온 후에", ), 그 때 비로서 하느님께서는 안토니오 밀라니(Antonio Rosmini , 이탈리아 사제/철학자)나 프리모 마졸라리(Primo Mazzolari, 이탈리아 사제/작가), 또 로렌조 밀라니(Lorenzo Milani, 이탈리아 사제/교육학자)와 기타 다른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서처럼, 교회내의 가장 온순한 어린이에게조차 그 '아픈 상처들'과 ‘교회의 위선적인 부분들’에 대해 목소리를 크게 높이라고 명령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필요하다면 교회가 이에 대해 금전적으로 보상을 하면서까지 말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주저하지 말고 바로 교회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가능하다면 우리의 발로 스스로 돌아오도록 합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생 동안 철저히 무관심한 생활을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야 교회로 돌아와서는 소위 '최후의 인사'를 하곤 합니까? 이것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경우 교회의 유일한 용도는 여러분의 영혼이 아니라 여러분 체면을 살리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 셈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처음에 물었던 질문을 기억해 봅시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
<연중 제21주일>(8.22)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7) 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에 관한 긴 말씀(요한6,22-69)의 끝부분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6,60) 그러면서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렇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적인 것에만 갇혀 있으면, 예수님의 말씀이 달콤한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오질 않습니다. 듣기 거북한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6,66) 그러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6,68-69) '복음을 통해' 들려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사제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듣기에 거북한 말씀으로 다가옵니까? 아니면 나를 일깨우고 회개로 이끄는 영적 양식으로 다가옵니까? 믿음을 통해, 말씀을 통해, 미사를 통해, 기도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썩어 없어질 육적인 양식입니까? 아니면 길이 남아 내게 생명을 주는 영적인 양식입니까? "너도 떠나고 싶으냐?" 지금 예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물으신다면, 어떤 대답을 내놓겠습니까?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여호24,16.18) 세례 때 하느님께 드린 나의 약속을 기억하고, 사랑과 순종의 삶으로, 나의 회개로 그 약속을 새롭게 합시다! 아멘! <연중 제21주간 월요일>(8.2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23,13) 유다교에서 율법은 철저하게 지켜져야 할 하나의 규범, 계명이었습니다. 삶을 이해하는 길로써의 지침 또는 표지판이었습니다. 이러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들이 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습니다. 율법은 잘 지켰지만, 율법의 본질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위선을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기도에 대한 고민을 말했습니다. "신부님, 기도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 우리가 '기도의 본질'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바치던 기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기도의 본질'이 '기억과 머뭄'이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사제입니다. 때문에, 기도는 쉽게 바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쉽게 바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처럼 교회가 만들어 놓은 '율법과도 같은 기도'를 바치는 것에만 급급하고, 그것이 기도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도 위선자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하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는 새 계명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불행한 위선자들이 되지 말고, 행복한 신자들,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
깨어 기도할수있는 큰 지혜를 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며 죽어도 죽지않는 영원한 생명을 지키기위한 삶이 되기를 빌어봅니다 빗소리가 참 정겹게 느껴집니다. |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8.24)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1,47) "와서 보시오."(요한1,46)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인도를 받아 예수님께 나아가자, 예수님께서는 당신 쪽으로 오는 나타나엘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1,47) 나타나엘은 '바르톨로메오 사도'로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극찬을 들은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1,49)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보고 "거짓이 없다"고 칭찬하십니다. 왜 그렇게 칭찬하셨을까??? 아마도 나타나엘이 말씀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습니다. 당시 유다교의 지식인들은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서 토라(모세오경)를 공부했다고 합니다. 말씀 안에 머무는 사람! 그래서 거짓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앞으로 "더 큰 일을 보게 되고,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독서는 요한 묵시록이 전하는 '거룩한 도성',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에 관한 말씀입니다. '천상 예루살렘'은 '우리의 희망'이며,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견디게 하는 힘'입니다. 거짓이 없는 사람! 지금 여기에서 천상 예루살렘의 삶을 앞당겨 사는 사람! 나타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한 필립보처럼, 나도 너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람! 오늘도 이런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네~~~ |
<연중 제21주간 수요일>(8.25)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23,28) '회개하자!'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위선'은, 겉과 속이 다른 모습입니다. 겉으로만 의인처럼 행동하고, 속은 의인이 아닌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정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 오늘 복음은, 지금 우리의 위선, 나의 위선에 대한 강한 책망***이기도 합니다.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강한 책망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회개'라고 묵상했습니다. '위선은 죄'입니다. 그러니 얼른 '위선의 죄에서 돌아서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호소'라고 묵상했습니다. ^^^'회개'는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고, 또한 나를 참으로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고백성사의 은총 듬뿍 받고 싶은 오늘입니다 오늘 '화답송'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은 항상 우리를 살펴보고 계시고, 주님을 피해 달아나 숨을 곳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당신 숨결을 피해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얼굴을 피해 어디로 달아나리이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당신이 계시고, 저승에 누워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화답송)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순종의 죄를 짓고 달아나 숨어버린 아담을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신 그 하느님께서 우리를 늘 찾고 계십니다. 그러니 얼른 회개합시다! 그러니 얼른 자비로우신 주님께로 돌아가 우리도 이런 시편 기도를 드립시다! "주님,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 종을 구해주소서.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입당송) '오늘이 회개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오늘이 회개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연중 제21주간 목요일>(8.26)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4,42)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삶의 자리에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요지는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그 때'(Kairos), 곧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일지 모르니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어 준비함의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자기 성소에 충실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보편 성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의 성소***입니다. 곧, 주님 안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고, 기쁜 소식인 복음을 전하고, 함께 더불어 잘 사는 공동체를 위해 희생과 봉사하는 성소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특별한 성소'를 주셨습니다. 사제와 수도자의 성소, 부모와 자녀의 성소, 남편과 아내의 성소, 선생과 학생의 성소 등등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보편 성소와 특별한 성소에 기쁘게 충실하는 것이 바로 깨어 준비하고 있는 자의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마태24,46) 요즘 우리는 독서로 사도 바오로가 전하는 테살로니카 1서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는 테살로니카 공동체의 모습과 그들의 믿음이 더욱 굳건해지기를 바라면서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사도 바오로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 준비하고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종말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우리를 찾아옵니다. 이 결정적인 종말의 때가 나에게 희망과 기쁨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오늘도 깨어 준비하고 있는 충실한 종이 됩시다! 아멘 |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8.28)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25,29) '은총에 은총을 입자!' 하느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은총을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자격이나 능력을 보시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조건 없이 주어진 은총입니다. 이를*** '생명은총(상존은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상존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또 하나의 은총이 있는데, ****도움의 은총(조력은총)****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조력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인 '탈렌트의 비유'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 조건 없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이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공동선과 공동이익을 위해 더 쓰여지고 활용되어져서 은총에 은총을 더 입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고, 이 은총이 나만을 위한 은총에 머물러 있지 않고, 너를 위한 은총,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은총으로 머물러 있는지 한번 각자의 모습을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한 때 방탕한 죄인의 모습으로 살다가, 어머니 모니카와 암브로시오 주교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완전한 회개로 돌아선 성 아우구스티노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고백록)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늦게서야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다시 태어났습니다. 33세 때 세례를 받고, 이후 사제와 주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에 충실했습니다. 우리도 그를 본받아 주어진 은총에 충실합시다! |
<성녀 모니카 기념일>(8.27)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열 처녀의 비유!' '마지막 때' '열 처녀의 비유'는 다시 오시는 신랑이신 예수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 '등과 기름을 함께 잘 준비하고 있는 신자들', '깨어 있는 신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등과 기름의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저는 마태오복음 7장 21절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등'은 '믿음과 말씀'이고, '기름'은 '믿음의 삶과 말씀의 삶'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여기에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깨어 준비하고 있음의 큰 모범을 보여주신'성녀 모니카'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로서, 한 때 마니교 이단과 방탕한 생활에 깊이 빠져 있었던 아들 아우구스티노를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어머니이십니다. 성녀 모니카는 아들의 회개를 위해 무려 18년 동안 끊임없이 정성을 다해 기도하셨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모든 어머님들을 함께 기억하면서, 오늘도 깨어준비 하고 있는 신자들이 됩시다! 세상의 모든 엄마 화이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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