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연중 제18주일 Faith and Doubt 믿음과 의심 - 칸탈라메사 추기경 - 지난 주에 우리는 보리빵과 물고기가 늘어나는 기적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바로 지금과 같이 복음을 이야기할 때와 같이 그러한 기적은 매일 반복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준비한 성찰은 그 아이의 보리빵 다섯 개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글도 똑같이 곱절로 늘어가는 기적을 일으키며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언어의 본질은 전달되는 과정에서 쪼개지거나 줄어들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말씀의 양식(빵)도 곱절로 늘어나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이후 각자 자기가 이해한 중요한 메시지가 자신의 마음속에 ‘남은 조각들’이 되어, 이 이야기를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지금부턴 오늘의 복음 말씀에 집중해 봅시다. 먼저 지리적인 맥락을 살펴봅시다. 빵을 나눈 기적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열광적인 관심을 피하기 위하여 사도들과 함께 호수의 반대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배를 빌려서 그들을 따라왔습니다. 이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기나긴 설교가 시작됩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이의 서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따라왔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그 안에 숨은 의미가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표징을 쫓았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고, 표징을 따랐던 것입니다. 지금부터 전개되는 모든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또 다른 종류의 빵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기 위한 인내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 즉, 그분의 말씀과 삶으로 증명되는 예수님 본인에 대해 말씀하시려는 겁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집중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말씀으로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본인에 대한 믿음’을, 이후 펼쳐질 긴 설교의 핵심요지로써 사람들에게 제시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보고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성찬례에 대해 아무리 이야기해 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성체성사는 신들을 기쁘게 하여 물질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주술적인 의식과 다를 바가 없으며, 그 가치는 신성한 존재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한 ‘엄숙한 공동체적인 식사’라는 의미로 격하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신성한 존재와 함께 모두가 일치되어 나누는 식사라는 진정한 성체성사의 의미는 사라지게 됩니다. 모든 미사에서 선포되듯이 성체성사는 ‘신앙의 신비’의 으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단위에서 진정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임재하십니다. 하지만 내가 믿지 않으면, 나에게는 그분이 거기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케스트라가 완전히 귀가 먹은 사람 앞에서 훌륭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믿음,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다는 오히려 믿음의 적인 ‘의심’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성체 기적 중 가장 잘 알려진 로마 근처의 볼세나(오르비에토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는)에서 일어난 기적을 통하여 우리는 그 의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로마로 돌아가던 한 보헤미안 사제가 중간에 머물던 볼세나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중에 빵과 포도주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의심의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성체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아있는 살덩어리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일으키셔서, 그 사제를 의심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 사제는 의심과 싸워야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사례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저는 55살이고 아이 때부터 항상 하느님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굳게 믿어왔습니다. 일생동안 저는 단 한 번도 주일 미사를 그리고 성체성사를 거른 적이 없습니다. 성체성사가 자주 있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저는 가족과 직장 그리고 사회에서 모두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미사 시간에 신경을 낭송할 때마다 저는 그것을 제 입 밖에 내는 것이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으며, 금세 다른 생각에 산만해지곤 했습니다. 이는 저에게 아주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현재 저는 정말 곤경에 처해 있고, 최근에는 급기야 영성체조차 전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저는 마치 그림자처럼 ‘믿음’에 붙어 따라다니는 이 ‘의심’이라고 하는 간단치 않는 이슈에 대해서 한 번 꼭 다루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심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애매모호한 단어입니다. 상황에 따라 굉장히 다르게, 긍정적으로도 그리고 부정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흔들어서 의심하게 만들어 아무 결정도 못 내리게 만들 때, 또, 의심에 취한 나머지 자기 말고는 아무도 믿을 수 없도록 만들 때, 의심은 부정적인 단어가 됩니다. 반대로, 의심이라는 것은 의로움과 지적인 정직함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직 확실하지 않거나 불확실한 것을 단정하지 않도록 유도하게 될 때에는 이것이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데카르트가 ‘방법론적 의심’에 대한 이론을 발표한 후 요즘 우리가 처하는 크나큰 위험은 의심을 이상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슈에 대해 확신을 가진 사람들을 독단적이라고 깎아내리고 비난하는 데 활용합니다. 앞서 언급한 좋은 종류의 의심도 교묘하게 변질되어 더 이상 좋지 않게 될 수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는 것도,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도 모두 다 어리석음의 징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들은 당분간 내려놓고, 우리는 이제 믿음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의심이 나쁘게 작용할 때와 반대로 좋게 작용하게 되는 경우를 찾아보도록 합시다. 의심이 무시와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는 악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하고자 한다면 문제를 파고들어 정보를 얻어 그 의심을 해결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의심이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라면 그것은 악입니다. 진실을 알게 되면 그 진실은 당신으로 하여금 결정하고 실행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은 당신으로 하여금 해결책을 미루고 타협하도록 유도할 것입니다. 이럴 경우 의심하는 것은 당장 행동하지 않아도 될 좋은 변명거리가 될 것이고 당신의 게으름을 덮어버리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당신은 진정 믿기를 원했고 의심에서 벗어나고자 했음에도 의심의 공격을 받아서 의심하게 된 것이라면, 혹은, 의심하려 하지 않았는데도 의심에 빠지게 된 것이라면, 이때의 의심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 의심은 믿음을 완전히 쫓아 보내지 못하고, 오히려 믿음을 강화하고 정화시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바람이 촛불을 완전히 끄지 못하면 오히려 바람이 그 촛불을 더 세게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의심의 가능성에 노출되는 것은 믿음의 한 부분이며 믿음을 감싸고 있는 포장지와도 같습니다. 이는 오히려 인간적이고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위대한 성인들조차 의심과 유혹에 맞서 싸워야만 했습니다.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는 ‘믿음의 어둔 밤’이라고 불리는 끔찍한 믿음의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녀가 말하길, ‘내가 천상의 기쁨과 하느님의 영원한 소유함을 노래하는 것은, 내가 느낀 것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기를 원하는 것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믿음이 아마도 우리에게 허락되는 유일한 믿음의 형태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헤아리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의심을 키워나가고 있는지 의심을 떨쳐버리려 하는 지를 분별하는 방법과, 그 의심이 믿음의 부족 때문에 생긴 것이지 아니면 당신의 믿음을 꺾으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 것인지를 분별하는 방법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보헤미안 사제를 위해 성체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그 사제가 진심으로 진실을 찾기를 원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기적으로 하느님께서는 그 불쌍한 사제를 돕고 그를 비롯한 더 많은 비슷한 사람들을 도우시려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이 바로 그 다음해인 1264년에 제정된 것만 보더라도 우리는 ‘오, 우리에게 그토록 좋은 것을 준 행복한 의심이여!’라고 외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앞서 소개한 사례에서) 의심하는 것만이 성체성사에 참여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성 토마스조차도 자신의 의심을 극복하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 자신의 손가락을 예수님의 상처에 직접 넣어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당신이 신경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아무런 의심과 주저함이 없이 암송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고, 또는 당신이 바라는 온전한 믿음을 지니고 성체 성사에 참여하는 게 힘들더라도 낙심하지 말기 바랍니다. 오히려 복음에 나오는 어떤 사람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오 주님)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 23).’ 제 말을 끝마치기 전에, 우리의 ‘믿음’과 관련하여 누구나 던질 수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자 합니다. 신경에 왜 ‘유일한 세례를 믿습니다’라는 문구는 있는데, ‘성체성사를 믿습니다’라는 문구가 없는지, 성체성사가 그렇게 중요한데 왜 (우리의 믿음이 요약된) 신경에는 언급되지 않는지를 물을 수 있습니다. 이는 아주 간단한 이유인데 신경이 완성될 당시에는 성체에 대한 어떤 거부감이나 이단이 존재하지 않은 반면 세례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어떤 이들은 교회의 일반적인 관행과는 반대로 소위 ‘분리주의자들’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교회가 다시 세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경은 당시에 만연했던 모든 오류들을 바로잡기 위해 구성된 것이었습니다. 분명 여러분은 성체성사에 대한 문구가 신경에 포함되어 있는지 애써 찾으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체성사가 신경 본문에 직접 적혀있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를 우리 마음의 신경에 믿음으로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연중 제18주일>(8.1)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7) '죽음의 의미'는 창조 이전의 모습인 '무(없음)의 상태'입니다. 너와 내가 없고, 좋고 싫음이 없고, 소유가 없는 '완전한 무의 상태'가 바로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죽음을 영원한 것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바라보고, 영원한 것과 연결시켜주는 '다리로' 바라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인 영원한 것은, 죽음의 다리 그 건너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영원한 것에 이르게 하는 양식이 바로 '예수님'이시며, 이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그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는 일이 바로 '하느님의 일'인데,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말 양식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그런 우리들은 아닌지?' 그런 우리들이 되지 말고, 영원한 것에 더 관심을 갖고 참된 빵이신 예수님,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잘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에 이렇게 권고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에페4,17) 그리고 '옛 인간'을 벗어버리고, 영과 마음이 새로워진 '새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피할 수 없는 자매인 죽음을 기쁘게 맞이하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빵'이시며,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로 우리의 마음이 더 향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예수님 |
<연중 제18주간 월요일>(8.2)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14,1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배고픈 이들의 배를 채워주신 '빵의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작은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 측은지심의 기적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주님께서는 언제나 작은 곳, 낮은 곳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그 이유는 큰 곳,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그들이 소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주변에는 작은 곳,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도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작은 곳, 낮은 곳을 좋아했고 사랑했습니다. 오늘은 이태리 아씨시에 있는 포르치운쿨라 성당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포르치운쿨라'는 '작은 몫'이라는 뜻인데, 프란치스코가 초창기 형제들과 함께 살았던 곳이고, 작은 형제회가 태동된 곳입니다. 이 성당은 실제적으로 아주 작은 성당이며, 지금의 성당은 그 작은 성당 위에 지어진 성당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 성당을 아주 좋아했고, 형제들에게 이 자리를 결코 빼앗기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그 작은 성당을 작은 형제회 형제들이 맡고 있습니다. 포스트 코로나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분명 코로나 이후의 삶을 위해 지금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준비해야 할 것들이 참 많아 보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 작은 곳,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드러내셨던 가엾은 마음, 측은지심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곳, 높은 곳만을 향해 있었던 우리의 관심을 작은 곳, 낮은 곳에 머물고 있는 형제자매들에게로 향하게 해서, 점점 더 심해져 가고 있는 양극화를 허물고, 하느님의 모든 창조물들이 함께 잘 사는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노력해 봅시다! 아멘!!! |
<연중 제18주간 화요일>(8.3)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십니다. 제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댑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 역시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지 않을까?'에 마음이 머물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 안에 머물러 보았습니다. 거센 풍랑이 이는 삶의 자리로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두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나는 아닌지? 정말 예수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시길 바라고, 나와 함께 하시길 원하고 있는지? "제가 지금 이런 저런 일로 바쁘니, 천천히 오시고, 다음에 예수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을 자꾸만 뒤로 미루는 나는 아닌지? 나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고,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는가? 두려워하지 말고 물 위를 걸어 "오너라"는 예수님 말씀에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갑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이라는 두려움 앞에서 넘어집니다. 그리고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14,31) '예수님의 손'을 맞잡읍시다! 언제나 나를 향해 손을 내밀고 계시는 '구원의 손'을 맞잡읍시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 어떠한 풍랑도 우리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지금 거세게 일고 있는 '코로나 풍랑'이 우리에게 던지는 외침은, "얼른 내 손을 잡으라."는 주님의 외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손을 잡으려면, 낮아지고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낮은 곳에 계시고, 모세의 모습처럼, 주님께서는 겸손한 이들 안에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일로, 지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나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8.4)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15,25) 예수님께서 방문하신 티로와 시돈 지방은 이방인 지역입니다. 그 고장에서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가나안 여인의 첫 번째 굴욕입니다. 제자들이 그 여인에 대해 언급하자, 그제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15,24) 가나안 여인의 두 번째 굴욕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절하며 말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15,26) 가나안 여인의 세 번째 굴욕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 굴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15,28)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믿음이란 어떠한 굴욕에도 넘어지지 않는 것, 믿음의 대상에게 끈질지게 매달리는 것이라는 것을 가나안 여인을 통해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자존심은 강하고, 인내심은 약한 우리들 안에서 일어나기를 바라시는 믿음이라는 것도 깨닫습니다. 오늘은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이신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작은 시골 본당에서 본당 사목을 하셨고, 겸손한 사제, 충실한 사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특히 정성을 다해 가나안 여인과 같은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런 본당 사제들이 많아지기를 청하고, (기도합니다) 어떠한 굴욕에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의 믿음을 청합니다! (기도를 청합니다) |
[sr.티모테아] [오후 1:20] ??? ?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삶? 소설가 박경리씨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 다음은 박완서씨가 썼던 글이다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 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어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살아오면서 볼꼴, 못 볼꼴 충분히 봤다 한번 본거 두번 보고 싶지 않다 한겹 두겹 책임을 벗고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소설도 써지면 쓰겠지만 안 써져도 그만이다 두 분은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여류 소설가였다 그러면서도 조용한 시골집에서 삶을 마감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물처럼 사는 것(若水... 상선약수 물처럼 사는 것 아아~ 편안하다 ! 돐이 되었어요 1년동안 사랑받고 사랑하며 잘커서 감사하고 물 흐르듯 잘 크면 참 좋겠습니다. 고모님기도 덕분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사랑 감사합니다 |
<연중 제18주간 목요일>(8.5)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입니다"(마태16,1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의 신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묻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마태16,14)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반석(베드로) 위에 내 교회를 세우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복음인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베드로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16,16)@ 베드로의 완전한 신앙고백과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베드로의 두 모습을 바라보면서... '십자가 없는 부활을 바라고 있는 나는 아닌지?' '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이 두 물음이 오늘의 화두(묵상)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쩌자고 당신들은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고약한 곳으로 데려왔소?"(민수20,5)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찾아오는 고통과 시련 앞에서 계속해서 불평불만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것', '십자가는 부활의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것'이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부활은 십자가 그 너머에 있고, 그 십자가를 넘어가게 하시는 분이 바로 베드로가 고백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그리스도(구세주)이신 예수님 손잡고, 십자가를 넘어갑시다! 넵! 참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인내심의 은총을 주소서 *** |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8.6)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마르9,3) 오늘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타볼산에 오르시어, 그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며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신성과 인성을 두루 갖추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믿은 이들이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며 영광스러운 부활을 희망하면서 조금만 참고 힘내면서 십자가의 길을 잘 걸어가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사건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장차 일어날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지만,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거룩하게 변해야 하는 '현재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와 삶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신 당신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예수님 부활의 필수전제요, 필요충분인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자리는 나의 죽음과 나의 부활이 함께 일어나야 할 곳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크고 작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바로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통해 보여주신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죽고 부활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주님의 말을 듣고 회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죽는 사람, 회개하는 사람, 거룩하게 변하는 사람, 부활하는 사람, 그렇게 되기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됩시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9,7) |
<연중 제18주간 토요일>(8.7)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17,20)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간질병은 뇌 기능의 일시적 마비 증상이 만성적,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뇌질환입니다 "예수님께서 호통을 치시자 아이에게서 마귀가 나갔다. 바로 그 시간에 아이가 나았다."(마태17,18)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태17,19) 우리 인간은 '영의 움직임'에 지배를 받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의 창고 안에 어떤 영이 자리 잡고 있느냐에 따라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코로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수도권은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가 연장되었고, 4단계로 격상되어 가는 곳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쉐마 이스라엘!"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6,4)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작은 믿음을 원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작은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십니다. 온 마음으로 우리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작은 믿음 안에서 나오는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곧 양심과 보편적 가치가 존중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믿음과 거룩한 영 안에서 올바르게 살아갑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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