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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2021년 성모승천대축일 내 영이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

                                           

                                                    내 영이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

                                                            My spirit rejoices in God                                                                                                                                  - 칸탈라메사 추기경 -
                                                                                                                                     루카 1:39-56
 
오늘 우리는 동정녀 마리아의 축일 중 가장 아름다운 축일인 성모 승천 대축일을 축하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루카 사가가 성모 마리아의 마니피캇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정교회에서도 인정된 전통으로(후자에 의해 독단적으로 정의된 것은 아니나), 성모 마리아는 영뿐 아니라 인성 전체로, 그리스도 이후 (처음으로) 부활의 열매로서, 천상 영광에 들어가셨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 인류의 빛(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68절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께서는 어느 모로든 하늘에서 영혼과 육신으로 이미 영광을 받으시어 내세에 완성될 교회의 표상이 되시고 그 시작이 되시는 것처럼, 이 지상에서 주님의 날이 올 때까지(2베드 3,10 참조)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로서 빛나고 계신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다른 모든 축일에는 성모님을 현재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나타내는 표징으로 나타내지만, 오늘만큼은 성모님을 미래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나타내는 표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특별히 관련이 있는 성모님의 면모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정녀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에게 생명을 준 특권을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리가 성체성사에서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성모님의 살이며 그분의 피로서, 오로지 그분 태중의 열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매번 성모송을 암송할 때 선포하는 사실입니다;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창조의 때에, 여자인 이브는 여자의 개입 없이 남자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때에, 남자의 개입 없이 여자에게서 태어난 분은 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평등의 지고한 조건(오늘날 우리는 평등한 기회라고 말합니다)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입니다. 아담의 갈비뼈에서 첫 여자가 태어났다는 성경 이야기가 때로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열등의식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새로운 창조 이야기에서 남자인 그리스도께서, 여자가 있기 전부터 존재하셨던 하느님께서, 여성의 태를 통하여 태어났다는 사실은 기억한다면 이러한 혼란은 사라집니다.
 
성 바오로가 말씀하셨듯이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갈라 4:4).’ 만약 그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라고 하였다면, 이는 단순히 전기적인 기술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인에게서 태어나라고 표현함으로써 보편적이면서도 엄청나게 큰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리아 안에서 모든 여성의 지위는 놀랍도록 높여졌습니다. 마리아는 오늘날의 여성 모두가 되는 것입니다. 현시대의 가장 명예로운 표징 중 하나로 여성(지위)의 발전을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에 비하면 얼마나 뒤처져 있습니까! 단테 알리기에리(이탈리아 시인) 또한 동정녀의 고유한 이름인 마리아가 아니라 보편적 이름인 여인/숙녀로 부르며 노래합니다.
 
                                    여인이여, 당신이 하신 일은 정말 위대하고, 탁월합니다.
                                    은총을 바라는 자는 누구라도 당신께 뛰어갑니다.
                                    날개가 없는 자의 열망도 높이 날아갈 것입니다.
 
일 년 중 가장 세속적인 기간인 여름 휴가철 중 815일에 마리아의 축일을 기념하는 것인 말이 되는가 하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저는 아주 아름다운 의미를 발견합니다. 오늘날 관광객들을 산과 해변 또는 미술품으로 가득한 도시로 몰려들게 하는 것은 자연이나 인간의 천재성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를 매개로 시간이나 자연이 상대할 수 없는 숭고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름 휴가 기간에 마리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를 우울함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창조된 아름다움으로부터 눈을 감았을 때, 절대로 시들지 않는 또 다른 아름다움인 성모 승천에 눈이 열려 새로운 비전을 보게 될 것입니다.
[DABAR] 13주차 2021년 성모승천대축일
 
                                                              My spirit rejoices in God
                                                         내 영이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루카 1:39-56
 
Today we celebrate one of the most beautiful Feast of the Virgin Mary: her glorification in body and soul in Heaven. The Gospel reading is the passage from Luke recording Mary’s own Magnificat.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the Catholic Church, which is based on a tradition also accepted by the Orthodox Church (albeit not dogmatically defined by the latter), Mary entered heavenly glory not only with her spirit, but also with the whole of her person, as a firstfruit after Christ of the future resurrection. The Second Vatican Council constitution Lumen Gentium [§ 68] says: ‘the Mother of Jesus, glorified in body and soul in heaven, is the image and beginning of the Church as it is to be perfected is the world to come, so too does she shine forth on earth, until the day of the Lord shall come (2Pt 3:10) as a sign of sure hope and solace to the people of God during its sojourn on earth.”. On all other Feasts we contemplate Mary as a sign of what the Church is to be; in today’s feast we contemplate her as a sign of what the Church will be like.

오늘 우리는 동정녀 마리아의 축일 중 가장 아름다운 축일인 성모 승천 대축일을 축하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루카 사가가 성모 마리아의 마니피캇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정교회에서도 인정된 전통으로(후자에 의해 독단적으로 정의된 것은 아니나), 성모 마리아는 영뿐 아니라 인성 전체로, 그리스도 이후 (처음으로) 부활의 열매로서, 천상 영광에 들어가셨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 인류의 빛(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68절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께서는 어느 모로든 하늘에서 영혼과 육신으로 이미 영광을 받으시어 내세에 완성될 교회의 표상이 되시고 그 시작이 되시는 것처럼, 이 지상에서 주님의 날이 올 때까지(2베드 3,10 참조)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로서 빛나고 계신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다른 모든 축일에는 성모님을 현재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나타내는 표징으로 나타내지만, 오늘만큼은 성모님을 미래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나타내는 표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I would like to underline an aspect of Mary which is particularly relevant for the times we live in. Jesus is born of the ‘Virgin.’ Mary. Mary therefore does not share with anyone, not even a single human being, the privilege of having given life to the Son of God. The flesh and blood of Christ which we receive in the Eucharist is flesh of her own flesh and blood of her own blood, an exclusive fruit of her womb. This is what we proclaim every time we pray the Hail, Mary: ‘...and blessed is the fruit of thy womb, Jesus.’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특별히 관련이 있는 성모님의 면모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정녀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에게 생명을 준 특권을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성체성사에서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성모님의 살이며 그분의 피로서, 오로지 그분 태중의 열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매번 성모송을 암송할 때 선포하는 사실입니다;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In the creation, the woman, Eve, is born of man without the intervention of a woman; in redemption it is man, Christ, who is born of a woman without the intervention of a man. A sublime condition of gender equality today we would say ‘equal opportunities’ put in place by God. The biblical story of the birth of the first woman from Adam’s rib has sometimes been seen as a sign of female inferiority against man. That perplexity disappears if we bear in mind that in the new creation it is man, Christ, who is born of the womb of a woman, despite preexisting her, as God.

창조의 때에, 여자인 이브는 여자의 개입 없이 남자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때에, 남자의 개입 없이 여자에게서 태어난 분은 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평등의 지고한 조건(오늘날 우리는 평등한 기회라고 말합니다)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입니다. 아담의 갈비뼈에서 첫 여자가 태어났다는 성경 이야기가 때로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열등의식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새로운 창조 이야기에서 남자인 그리스도께서, 여자가 있기 전부터 존재하셨던 하느님께서, 여성의 태를 통하여 태어났다는 사실은 기억한다면 이러한 혼란은 사라집니다.
 
As saint Paul puts it: ‘But when the fullness of time had come, God sent his Son, born of a woman, born under the law” (Gal 4,4). If he had said: ‘born of Mary’, it would have been a mere biographical detail; by saying ‘born of a woman’ he gave his statement a universal and immense importance. It is woman herself, every woman, who has been raised, in Mary, to such an incredible height. Maria is the woman of today. There is a lot of talking today about the advancement of women, which is certainly one of the most honorable signs of times, but how far behind we are from God! Dante Alighieri also addresses the Virgin, calling her not with her proper name Mary, but the universal name ‘Woman / Lady’:

성 바오로가 말씀하셨듯이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갈라 4:4).’ 만약 그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라고 하였다면, 이는 단순히 전기적인 기술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인에게서 태어나라고 표현함으로써 보편적이면서도 엄청나게 큰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리아 안에서 모든 여성의 지위는 놀랍도록 높여졌습니다. 마리아는 오늘날의 여성 모두가 되는 것입니다. 현시대의 가장 명예로운 표징 중 하나로 여성(지위)의 발전을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에 비하면 얼마나 뒤처져 있습니까! 단테 알리기에리(이탈리아 시인) 또한 동정녀의 고유한 이름인 마리아가 아니라 보편적 이름인 여인/숙녀로 부르며 노래합니다.
 
Lady, thou art so great, and so prevailing,
That he who wishes grace, nor runs to thee,
His aspirations without wings would fly.
                                                      여인이여, 당신이 하신 일은 정말 위대하고, 탁월합니다.
                                                              은총을 바라는 자는 누구라도 당신께 뛰어갑니다.
                                                                날개가 없는 자의 열망도 높이 날아갈 것입니다.
 
Some wonder whether it makes sense to celebrate a Marian Feast on August 15th, in the middle of the tourist summer holiday in the most profane period of the year, as it were. In that I see a very beautiful sense and meaning. What pushes tourists nowadays to the mountains and the seaside, or to cities full of art treasures, is the search for beauty, be it in nature or in human genius. The feast of the Assumption is not meant to build a hurdle to such beauty or to diminish our marvel. Yet it invites us not to stop there, but to use it as a ladder to reach an even more sublime beauty, which neither time nor the forces of nature can threaten. Contemplating Mary during the summer holidays saves us, in a certain sense, from our blues. It tells that when our eyes are closed to these created beauties, they will open to the vision of another beauty that does not fade, the beauty Mary has accessed in her Assumption into Heaven.

일 년 중 가장 세속적인 기간인 여름 휴가철 중 815일에 마리아의 축일을 기념하는 것인 말이 되는가 하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저는 아주 아름다운 의미를 발견합니다. 오늘날 관광객들을 산과 해변 또는 미술품으로 가득한 도시로 몰려들게 하는 것은 자연이나 인간의 천재성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를 매개로 시간이나 자연이 상대할 수 없는 숭고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름 휴가 기간에 마리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를 우울함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창조된 아름다움으로부터 눈을 감았을 때, 절대로 시들지 않는 또 다른 아름다움인 성모 승천에 눈이 열려 새로운 비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연중 제20주간 월요일>(8.16)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19,16)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십계명에서 이웃 사랑과 관련된 계명들을 언급하십니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태19,22)

젊은 부자는 정말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말로 원했다면, 슬퍼하며 떠나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가 몰랐던 부분을 알려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면서, "예, 가지고 있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하고 말했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매일매일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이고, 그 말씀에 순명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움켜쥐고 있는 그 소중한 것을 너를 위해, 주님을 위해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내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때가 되면 내려놓고 싶지 않아도 내려놓아야 하고, 꼭 움켜쥐고 있는 것까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네 인생은,*** '채움의 여정에서 비움의 여정으로 나아가는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의 다리 건너편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오늘이라는 선물을 내게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어제보다 '조금만 더' 내려놓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감사해요~~

울 고모님은  성모님처럼 참으로 온유하고 사랑 가득하시고 따뜻한 분이셔요

저도 성모님처럼, 고모님 처럼 겸손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도록 하고
주님 이끄시는대로 건강하게 영복이 가득하면 참 좋겠습니다 ^__^*

아녜스가 저는. 영성적이라부러워요.그리고.근면하고 ,학구적이고,열심하고, 손색이없는 나의조카야..
그래서내가행복하다구요.하느님안에서행복하셔요.우리는값진보화를찿았어요..^~^♡♡♡♡♡---------울티모 수녀님 -힘들때 꺼내어 힘내볼께요 마음에 새겨 둘께요--------감사합니다 

<연중 제20주간 화요일>(8.17)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19,26)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19,23.24)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하는 제자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19,26)
 
오늘 복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단순한 믿음'에서 나온다는 '묵시적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
 
내가 변하는 회개, 그것도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하는 회개는 정말 불가능해 보입니다.
내 힘,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하실 수 있고,
하느님의 힘으로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19,30)
 
그러니 늘 깨어 있자!
 
<연중 제20주간 수요일>(8.18)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20,16)
 
오늘 복음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로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이 일꾼들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그것도 모두에게 같은 자비, 합의된 자비, 약속된 자비를 베풉니다.
 
그런데 다른 일꾼보다 좀 더 땀 흘리고 수고한 일꾼 하나가 주인이 베푸는 자비에 못마땅해 합니다.
주인이 그에게 말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20,15)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꼴찌가 첫째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20,16)라는 말씀으로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끝맺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오늘 깨어 있는 사람, 곧 오늘 첫째가 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이요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세례를 더 먼저 받았다고 해서 구원에 더 가깝게 있지 않고, 내가 성직자나 수도자라고 해서 구원에 더 가깝게 있지 않고, 오늘 깨어 있는 사람, 지금 첫째가 되는 사람에게 구원은 가깝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라가야 할 하느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그 앎이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는 앎'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앎이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지 않으면 꼴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오늘 나의 모습이 첫째였는지에 대한 성찰을 해야 합니다.
 
***만약 첫째였다면,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림으로써 그 첫째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만약 꼴찌였다면, 그 부족함을 하느님 자비에 내어 맡김으로써 또한 그 꼴찌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하고,
오늘 내게 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도 첫째가 되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8.21)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금 우리 가운데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일까?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위선에 대한 책망이고, 더 넓게는 믿음과 삶이 다른 우리의 위선에 대한 책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꼭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살아내신 예수님의 삶 앞에서 우리는 결코 교만을 드러낼 수도 없고, 드러내서도 안 되지만...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을 지금 여기에서 겸손하게 살아내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