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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2021년 연중 제17주일 Gather the fragments left over 남은 조각을 모아라

[DABAR] 10주차 2021년 연중 제17주일

 

남은 조각을 모아라

Gather the fragments left over

- 칸탈라메사 추기경 -

 

오늘부터 5주 동안, 사도 요한을 통해 전한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행하신 생명의 빵에 관한 긴 연설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성체성사의 신비를 더 깊이 성찰하도록 만들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시고자 하는 가르침을 더 확실하게 비추어 알려줍니다.

곧바로 오늘 말씀의 핵심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복음 말씀은 성체성사를 이루는 빵과 물고기가 곱절로 불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한 번 읽어봅시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그분에게 몰려드는 주위의 군중을 보면서, 누군가 그분에게 일깨워주기 전에, 그분께서는 그 군중들을 먹이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혼란에 빠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 가운데 하나가 그분께 일깨워주었듯이, 그들이 가진 200개의 동전으로 살 수 있는 빵이 그 지역에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으로는 몰려든 군중 각자에게 조그만 빵조각조차도 나누어줄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 (그 어머니의 선견지명 덕분에)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던 아이를 발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오라고 하셨고 축복을 하신 후에 군중에게 음식을 즐길수 있도록 편안히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시고 모든 이가 그들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먹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겐 원하는 만큼 배불리 먹었던 적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이 빵이 곱절로 불어나는 사건으로 시작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여기에 인간에게는 종교적인 차원과 물질적인 차원을 분리할 수 없는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세속적이고도 물질적인 필요를 함께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예수님이 주는 영적이고 영원한 필요 또한 채우기 어렵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이러한 상황은 바로 잠시였겠지만 사도들을 유혹했습니다. 복음의 다른 구절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에게 군중들에게 흩어져 각자 음식을 알아서 구해 먹게 하도록 하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기적을 일으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산수에서 곱셈과 나눗셈은 서로 반대의 연산이지만, 이 경우에는 그 둘이 같아집니다. 나누지 않고는 불어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가진 것을 함께 공유하는 것은 그것을 다시 서로 나누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복음이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나누어지는 그 추가분(불어난 부분)’에 대해 말해 봅시다. 복음 말씀과 1독서의 말씀을 비교하면 우리는 그 추가분의 의미를 엿볼 수 있습니다. 1독서 또한 기적적인 곱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엔 구약의 예언자 엘리사가 등장합니다. 이를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어떤 이가 바알 살리사에서 처음 추수한 것으로 만든 보리떡 20 개를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엘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그러나 그의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대했습니다. 엘리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 다시 말하였습니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그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내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습니다.

두 이야기는 매우 유사하지만, 분명한 차이도 있습니다. 엘리사의 이야기는 딱 여기에서 끝이 납니다. 보리빵이 전부입니다. 복음에서는 빵 다섯 개의 곱절이 표징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다음 주일에 들을 또 다른 빵의 곱절에 대한 이야기의 전조입니다. 여기의 교훈은 매우 명확합니다. 물질적인 빵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그리스도 안의 영적 빵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쪽도 다른 쪽을 빼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사람에게는 채울 배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갈구하는 마음을 만족시켜줘야 하고, 사랑에 대한 목마름을 채워줘야만 합니다. 이 모두는 하늘로부터 내려진 빵, 즉 성체성사를 통하여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체성사는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추가분'의 의미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신자들이 직면한 사회적인 곤궁(빈곤함)에서 구제해줌으로써 그 절박함을 잊어버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절박함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이 처한 물질적인 양식에 대해 더 걱정하도록 촉구할 수 있는 추가적인 이유를 제공하게 됩니다. 물질적 빵과 영적인 빵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초기 교회에서 성찬례를 거행하는 방식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아가페라고 불리던 주님의 만찬은 물질적인 양식인 빵과 영적인 빵을 동시에 나누는 형제적인 식사라는 전례 안에서 거행되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과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 간에 존재하는 엄청난 차이를 단번에 부끄럽고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바오로 성인께서는 이러한 측면에서 타락했다고 보여지는 고린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코린 1, 11:20-22).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된 혐의는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당신이 행하는 성체성사는 더 이상 진정한 성찬례가 아닙니다. 오늘날 성체는 더 이상 함께 나누는 식사의 맥락에서 축복되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것들까지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과 생활필수품조차 가지지 못한 사람들 간의 불평등은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은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현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점에서 떼어진 빵 조각이 끝없이 불어나는 이야기의 끝은 그저 그 자체가 지닌 기적적인 일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저는 지금 예수님께서 직접 명령하셨던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은 조각을 모아서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하여라.”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반성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낭비가 익숙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불과 50년 사이에 우리는 학교나 주일미사에 참여할 때 행여나 신발이 닳을까봐 손에 들고 다니던 상황에서, 최신 유행을 따라가기 위해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신발도 쉽게 버리고 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음식물을 낭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날 예수께서는 먹고 남은 것들을 모두 처리해서 시장에서 빵과 생선값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고 지시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미국 농무부가 실시한 한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1610억 킬로그램의 식료품 중 430, 즉 약 4분의 1이 쓰레기로 버려집니다. 버려지는 이 식량 중 정말로 원한다면 약 20억 킬로그램을 쉽게 회수할 수 있는데, 이는 400만 명이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다행히 제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에서는 버려지는 양이 이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이탈리아에서는 아끼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질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그래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낭비의 모습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무차별적으로 퍼부어대는 광고 속에서 오늘날 저축보다는 소비하도록 하는 것이 경제학의 핵심 과제가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저축만으로는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디즈니의 도널드 덕은 (인류를 경제 대공황에서 벗어나게 만든) 위대한 구원자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복음이 우리에게 추구하도록 가르치는 이상은 아닙니다. 저축이라는 것은 부유한 국가의 개인과 사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있어 더 관대하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저축이 아니라 탐욕일 뿐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희생하도록 가르치지 않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대신에 텔레비전만 쳐다보면서 먹을 것이 없어서 너무도 깡마른 자기 또래의 아이들에게 무언가라도 기부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은 어떨까요? 나아가 우리 아이들이 자기 스스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전달하도록 해주거나 자선 상자에 넣게 해준다면, 저축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즐거운 게임처럼 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는 맙시다. 우리 어른들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를 실천한다면 이번 주일의 복음 말씀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연중 제17주일>(7.25)
-제1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6,6)

'오병이어의 기적!'

예수님의 마음은 '측은지심'
'가엾은 마음'이 되어주셨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은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의 측은지심에서 시작된 기적이며,
영원한 예수님의 측은지심인 '성체성사의 예표'입니다.

또한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같은 믿음과 세례로 다시 태어나 하느님의 한 형제자매가 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소명인 '사랑의 나눔'의 예표입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선포하신
'제1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입니다.

교황께서는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는 제목의 담화를 통해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더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노인들을 언급하시면서,
젊은이들에게 신앙을 전수하고 작은 이들을 돌보는 것, 손주들에게 신앙을 잘 전해주는 것이 노인들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에게 사랑을 물려주는 것이고, 더 큰 사랑은 자녀들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사랑과 신앙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합니다.

제2독서에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에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십시오."(에페4,2)

사랑과 나눔의 기적인 오병이어의 기적을 함께 묵상하면서, 나를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랑과 신앙을 나누고 전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싸랑해요  ♡♡♡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7.26)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마태13,31.33)
 
오늘은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입니다. 밀가루 속에 누룩을 넣으면 온통 부풀어 오릅니다.
 
***'나의 작은 희생과 작은 기도와 작은 나눔에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완성된다.'***
 
'예수님 마음 안에서 나오는 나의 작은 생각과 말과 행위는 결코 작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기적을 만들어 낸다.'
 
어제 복음에서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있는 아이를 두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안드레아의 말은 지극히 현실적인 말입니다.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데,
어느 누구도 그의 말이 틀렸다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소용없어 보이는 것에 예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용없어 보이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십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니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가능으로 바뀌는 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과 성모님 손 꼭 잡고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작은 것에 관심을 갖고 작은 것에 충실 합시다!
그래서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 안에 함께 들어갑시다! 아멘 !!!
 


 <연중 제17주간 금요일>(7.30)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13,57)

우리 모두는 예언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예언자'는 이미 여러 번 언급해 드린대로, 미래의 일어날 어떤 일을 미리 알려주는 사람으로서의 예언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신탁, 곧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으로서의 예언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엘리야에서 세례자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눈물의 예언자로 불리는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참예언자로 오신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사람들로부터.

그러고 보니,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삶,
하느님의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삶이,
예언자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왜, 그럴까?

예언자는 항상 역설이신 하느님의 뜻을 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의 뜻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예언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내가 먼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야하는 '사제직'과 예수님처럼 너를 위한 희생이 되어야하는 '왕직'과 함께, 너에게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전해야 하는 '예언직의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은 미사나 드리시고, 기도방에서 기도나 하시지 왜, 세상일에 걱정하시면서 이래라 저래라 하십니까?"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 있는
예언직의 사명을 망각한 말입니다.

우리 모두 정신 차리고,
예언직의 소명에 충실합시다!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7.31)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태14,4)'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오늘은 예수회를 설립한 이냐시오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스페인 로욜라에서 태어나신 분으로, 영신수련과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널리 전하는 데에 헌신하신 분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고별담화'입니다.

이 담화의 시작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17,1)

이 말씀 안에서 보면 아버지의 영광과 아들의 영광이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아버지의 뜻이 아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 죽음을 통해 아버지와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과 수많은 성인성녀들과 순교자들과 오늘 복음이 전하고 있는 순교자 세례자 요한 등과 같은 분들이 예수님의 이 영광에 참여했습니다.

우리도 이 영광에 참여하도록 합시다!

성 이냐시오가 외쳤던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요즘 주교님께서 마산교구 모든 사제들에게 선물하신 토마시 할리크 신부님께서 쓰신 '고해 사제의 밤'이라는 책을 영적 독서로 읽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에는 수수께끼 같은 파스카 이야기, 패배를 통한 승리라는 '커다란 역설'이 들어 있다."(9)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신 분께서 이 세상에서 드러내시고 선포하신 하느님은 '역설의 하느님'이시다."(36)

"장차 다가올 놀라운 불가능한 것들의 나라(하느님의 나라)를 우리가 만날 수 있다면 그 길은 오직 하나, '역설의 길'뿐이다."(44)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내가 먼저 너를 위해 기쁘게 죽는,역설의 삶'을 삽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