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BAR] 8주차 2021년 연중 제15주일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이번 주일 복음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그분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이 말씀에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라는 내용입니다. 사도들은 이제 파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전한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분을 따르고, 듣고, 배우고, 있는 그대로 훈련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파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동사는 ‘오라’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가라!’를 사용하십니다. 그분은 이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파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날 때 제자들에게 하실 말씀(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16:15)의 엄숙한 전주곡입니다.
더이상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오해가 생기지 않게 하려면,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라!’라는 초대를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도 그리고 그들의 후손인 오늘날의 교황님, 주교님, 그리고 사제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난한 평신도인 우리가 아니라 그들과 관련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치명적인 실수가 여기에서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보내어 특별한 임무를 공식적이고 권위있는 증거자로서 임명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그들에게 맡은 사명을 수행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병사없이 장군만으로 전쟁을 치를 수 없고, 코치와 심판만으로 축구팀을 구성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으로 사도들을 파견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루가10:1)’ 보내셨습니다. 아마도 이 일흔두 명은 그때까지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적어도 그분의 뜻을 진지하게 따를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을 모두 파견하십니다. 그분에게는 모두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그분이 가시고자 하는 곳에 미리 가서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자들을 그분의 사절로서 그리고 선구자로서 영예롭게 대하실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전도자 또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우리가 주일이나 가끔 성당에 가서 복음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단 말입니까? 왜 우리가 전도사처럼 살아야 합니까? 가정을 이루고 목숨을 걸고 일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제들이 알고 하는 말입니까?”
그리고 복음의 전도사가 되는 것은 삶에 추가 부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의 모든 짐을 잊어버리고 보다 잘 견딜 수 있도록 합니다. 예수님께서 진심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에게 지상에서 백 배로 갚아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을 잊지 맙시다.
평신도는 그리스도교의 핵 에너지와 같습니다. 핵 에너지는 원자의 분열 후에 방출되는 에너지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라늄 원자는 충격을 받으면 중성자라는 입자 두 개로 분리되고 이 과정에서 에너지가 방출하게 됩니다. 이후 연쇄 반응이 일어납니다. 두 개의 새로운 요소는 또다시 분할되고, 두 개에서 네 개로 그리고 수십억 개의 원자가 됩니다. 반복하여 방출된 에너지는 아주 거대해집니다. 원자력은 인간을 위하여 평화롭고 유익한 목표를 위하여 사용될 수 있기에 반드시 파괴적인 에너지라고 규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회심하고 복음의 감동을 받은 평신도는 다른 사람들과 긴밀한 접촉을 하며 생활함으로써 두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고 그 다음에는 네 사람에게 그 감동이 옮겨지게 됩니다.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처럼 수천 명이 아니라 수천만 명에 이르기에 복음의 유익한 빛을 세상에 전파하는 데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에 한 평신도이자 한 가족의 아버지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직업 외에도 복음화 활동에 매우 열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머러스한 그는 미국인만이 할 수 있는 요란한 웃음을 터뜨리며 전도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새로운 곳으로 이사해서는 매우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바티칸에 모인 2500명의 주교님들이 저에게 부탁하기를 여러분들께 복음을 선포해달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이어 그는 그 2500명의 주교단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여하여 평신도에게 할당된 사도직에 관한 법령(Apostolicam actuositatem)을 작성한 분들이라고 설명하면서, 그 사도직이라는 것은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부탁을 받았다’라고 표현한 것은 정말로 딱 들어맞는 말입니다. 그가 한 말들은 마치 대상없이 내뱉어지거나 아니면 누구나 들으라고 가볍게 떠들어댄 것처럼 공중에 떠돌아 다니게 하려고 말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들은 진정으로 모든 가톨릭 평신도에게 선포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전도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가르치시길, 사람들에게 가르칠 그 '무엇'에 대해서는 ‘회심(마르 6:12)’라고 단 한 단어로 말하면서,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꽤나 길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데 있어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더 강조하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보낼 때 항상 짝을 지어 보내신다는 사실에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항상 그들을 둘씩 보내셨을까요? 경찰도 둘씩 일하는데 그 이유는 농담처럼 얘기하듯이 한 사람은 읽기만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쓰기만 할 수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성 그레고리오가 설명한 바와 같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둘씩 필요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둘씩 그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주어진 첫 번째 징표는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자 이제 정치나 직장, 그리고 다양한 삶 안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한 쌍의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일반적으로로 직장에서) 그들은 그리스도나 복음에 대해서 언급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지지하고 사랑한다면, 우리 포콜라리니 친구들이 말하듯이, 그것은 이미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가장 특별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초기 교회의 박해 당시 기독교인들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수 없었지만,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이교도들이 기독교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아 서로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쓰여 있습니다. ‘오! 이 사람들이 서로 서로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 와서 보시오!’
이것은 무엇보다도 두 부모에게 적용됩니다. 자녀의 신앙을 돕기 위해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즉, 그들은 이미 많은 것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의 자녀들이 그들을 지켜보면서 서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와! 엄마 아빠가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한 번 봐봐.' 성경에 적혀있는 대로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1요한, 4:7)’이며, 이것이 바로 아주 작더라도 진정한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왜 항상 하느님이 선포되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앞서 언급한 그 미국 신사는 자녀 중 한 명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는 6년 동안 그를 위해 기도하고, 가능한 한 다른 아이들보다도 그 아이를 더 사랑해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드디어 어느 해에 어버이날을 맞아 아이들에게 새 성경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는 책을 열었을 때 첫 페이지에서 이제 23살이 된 그의 아들이 쓴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제가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 다른 부모들도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침묵으로 표현되는 사랑은 말을 사용하여 보완되어야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드로 사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1베드로 3:15).”
복음화의 첫 번째이자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정확히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묻거나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왜 그리스도 안에 희망을 두는지,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왜 우리가 믿음으로 '회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온유하고 공손하게'라는 말은 지나치게 고집하는 것이나 자만심, 또는 다른 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는 종교적 신념에 대해 존중하지 않는 것(예를 들어 남의 집을 방문하거나 거리에서 사람들을 멈추게 하는 일부 종파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는 모든 것들)을 제외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보여지는 용기와 창의성까지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누가 선교의 사명을 부여받았는지(사제뿐 아니라 모든 사람)와 선교하는 방법(사랑으로, 그리고 가능하면 말로써)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끝으로, 오늘 예수님께서 어디에 선교해야 하는지, 즉 예수님께서 오늘날 선교자들을 보내시는 '마을과 장소들'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마을들이 멀리 떨어진 외부의 마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에게 그 '마을'과 '장소'는 사실 매우 가깝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직장, 친구 또는 가족입니다.
복음을 읽을 때 한 가지 놀라운 장면이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묻는 한 젊은이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코 10:21).” 반대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떠나 자신을 따르고 싶어하는 다른 청년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코 5:19).”
이 말씀을 들을 때 저는 “은혜로운 곳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다네”라는 흑인 영가가 생각났습니다. 이 노래의 마지막 단락은 우리가 말한 모든 것을 결론짓는 데 사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베드로처럼 설교할 수 없다 해도, 당신이 바오로처럼 기도할 수 없다 해도, 당신은 예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 모두를 위해 죽었다’라고 말입니다.”
<연중 제15주일>(7.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6,7)
'사도들의 삶!'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파견사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세상 안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러면서 떠날 때에는 지팡이와 신발과 옷 한 벌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세상 안으로 파견 되어진 사도들의 삶은 안주하는 삶이 아니라, '떠나는 삶'입니다. 예수님처럼 늘 새로운 복음화의 땅을 향해***'떠나가야 하는 삶'***입니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나그네와 순례자의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 많고, 소유하고 있는 것, 집착하고 있는 것이 많으면 쉽게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죽을 때도 쉽게 죽지를 못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나의 존재가 '선택된 존재', '뽑힌 존재'이며, '파견된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아마츠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 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아모스7,14-15)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에페1,4-5)
그러니 '우리는 참으로 위대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먼저 이에 대한 분명한 신원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젊은태양같은 마음을 지닌 명품노인
주님께서 가능하게 해주십니다
삶의 모델 * 우리 고모님 *
닮고시포용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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