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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2021년 연중 제14주일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DABAR] 7주차 2021년 연중 제14주일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칸탈라메사 추기경 -

예수님께서 일으킨 기적과 가르침으로 유명해지고 난 후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고향인 나자렛으로 가셨습니다. 평소와 같이 회당으로 가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평소와는 달리 어떠한 열정도 찾아볼 수 없었고, ‘호산나!’하고 외치는 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판단하는 것 대신 사람들은 이상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이자는 도대체 어디서 이 모든 지혜를 얻었는가? 이자는 공부를 하지 않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자를 잘 알고 있다. 이자는 목수와 마리아의 아이가 아닌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태 13:57).’ 그분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 그분을 믿는 것에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마음 아파하시며 다음과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이 말씀이 다음과 같은 속담이 되었습니다. ‘Nemo propheta in patria(어떤 자도 고향에서는 예언자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신앙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저지른 실수를 조심하십시오. 그리스도교의 요람이었던 지방에서 복음이 선포될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마르코 사가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나자렛으로 가셨고,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라고 표현하였고, 루카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날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적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내용이 희년의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50년마다 조벨이라 불리는 뿔의 소리로 알려지는 특별한 해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희년입니다. 이 해에는 모든 토지는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줘야하고, 모든 노예는 해방되고, 모든 빚은 면제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는 은총와 화해 그리고 해방의 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의 회당에서 선포하신 말씀은 역사상 첫 그리스도인의 희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희년 중에 가장 대단한 은총의 해였고 성스러운 해였으며 기념이 될 만한 해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은총의 해에 열매를 경험했습니까! 얼마나 충만한 삶입니까! 갈릴레아의 많은 고을에서 얼마나 많은 새로운 기쁨이 있었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처음으로 시작한 나자렛의 사람들은 이 은총의 부케를 받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희년의 은총을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실수를 범한다면 이는 비극적인 일일 것입니다. 이탈리아를 비롯해서 유럽은 일반적으로 기독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나자렛과도 같은 곳입니다.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태어나서 유럽에서 자랐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서 나자렛에서 자란 것과 같이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탈리아와 유럽은 나자렛 사람들과 같은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2000년 희년을 준비하는 하는 계획(‘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을 출범할 당시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의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 벤치에서 자는 노숙자 한 분, 가장 낮고 소외된처지에 놓인 분께서 아주 간단한 답을 주었는데 그 답은 그야말로 가장 정확하고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요? 그분은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아닌가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렇다고해도 한 번은 곰곰이 이 이슈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이런 대담한 진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답은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앙에 따르면, 하느님이시면서 또 인간이십니다. 사람으로서 그분은 우리의 존재를 대변하십니다. 그분이 행하신 모든 업적은 우리도 행할 수 있고, 우리와 관련있는 것이며, 우리 가족의 일이고, 우리 가족들이 언제든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서 그분이 행하신 것은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세대와 특정 지역의 사람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 불가능하거나 너무 대단하여 하느님께서 행하지 못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만약 조금 참아주실 수 있다면 학식이 높은 신학 강의를 시작할 수 있는 데, 이것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조차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후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사람은 한 때 스스로 구속되어 있었던 사탄과 싸워 이겨내야만 했으나 결국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누군가의 노예로 있고 그 누군가의 권력 아래 있을 때, 어떻게 그를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달리 하느님께서는 싸우지 않고도 사탄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출구 없는 길을 선택해서 갔던 것이고, 우리가 지은 죄가 넘쳐나서 인류를 파멸로 이끈 것입니다. 한쪽은 싸워야했지만 이길 수가 없었고, 다른 한쪽은 이길 수 있지만 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이 상황은 극복된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 참 하느님이시면서 참 사람인, 그분께서 적을 싸워 이기셨고, 우리는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을 찾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 우리 인류에 온 방법입니다. 사도들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로마 8:1)’을 외칠 때에 느낀 기쁨과 열정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속죄하였고, 구원 받았으며, 용서 받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의 희년을 선포하셨을 때에 모든 빚은 사면받았고, 노예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노예가 아닌 자녀가 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안에 담긴 근본적인 내용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은 오로지 나을 위하여하신 일입니다. 인류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닌 아주 구체적으로 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이시면서 바로 나 자신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모든 것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누군가 이 사실을 진심으로 확신하게 된다면, 삶은 변화하고, 큰 빛이 함께 있고, 말할 수 없는 담대함이 생기며, 새롭고도 변함없는 용기를 느끼게 됩니다.

종교는 그 모습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는 더 이상 사제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친밀하고도 개인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모든 사람 안에서 나자렛 회당에서 말씀하셨던 바로 그것들을 이루고 싶어 하십니다. 그분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의 부서진 마음을 치유해 주고, 시력을 찾게 도와주시고, 모든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시길 원하십니다.

희년과 은총의 때를 살아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외적인 방법과 내적인 방법인데요. 외적인 방법은 대축제들, 사제 수도자를 비롯한 평신도 모두를 위한 축제를 지내는 것입니다. 내적인 방법은 예수님께서 나열하신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인데, 한마디로 표현하면 은총의 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방법인 축제는 내적인 것, 즉 마음을 충족시켜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돈과 시간이 낭비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도로를 새로 까는 데에 관심이 없으시고(이는 공공기관에서 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마음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2000년 희년의 은총이 우리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하여 나 자신의 주님이시자 구원자이신 분을 알아보아, 말로는 표현할 수도 없는 기회를 잡도록 합시다. 그분은 나의 것으로 나에게 속한 분이고, 내가 소유하는 분이시면서 나를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맨 처음 보내실 때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번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 코린 6:2).”

아직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도 하느님께 한 발 더 가까이 가야만 합니다. 복음 말씀이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선물을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제안을 해주실 뿐입니다. 그날, 온 마을이 예수님을 거절했을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위협하거나 모욕적인 말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로마 대장군)이 로마를 떠날 때 말한 것(감사를 모르는 고향이여, 너는 나의 뼈를 품을 수 없을 것이다!)과 같은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단순히 다른 곳으로 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환영받지 못한 다른 곳에서도 사도들이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도시를 불살라 버리자고 제안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루카 9:54).

 

그분께서는 오늘도 똑같이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다리십니다그분은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자유를 더 존중하십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주 큰 책임이 따르게 됩니다. 아우구스틴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지나쳐 가실까 두렵습니다사실, 내가 알아차리지도 못한 사이에 그분께서 나를 그냥 지나가실 수도 있습니다. 내가 그분을 환영할 기회를 잡기도 전에 그분은 이미 지나가셨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날 나자렛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말입니다.

 <연중 제14주일>(7.4)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마르6,2)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며..."(마르6,2-3) 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6,4)

무엇이 그들에게 그런 마음을 갖게 했을까?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그 앎이 나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고, 지식적인 앎으로만 남아 있다면, 그 앎은 너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도구가 되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편견과 선입견을 갖고 예수님을 대했으며, 그곳에서 예수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우리가 바라는 기적도 있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인데,
에제키엘 예언자를 부르신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에제2,4)

그리고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2코린12,7) 라고 말하면서,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는 주님의 말씀 때문에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라고 말합니다.

허물이 많은 우리를 위해 파견되신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굳게 믿읍시다!
그리고 나의 허물을 감추지 말고, 기쁘게 하느님 앞에 드러냅시다!
그래서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7.5) - 탄생 200주년 -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마태10,18)

오늘은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억하는 큰 날입니다.
7월5일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1925년 복자품에 오르신 날입니다.
미리내 성지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사제품을 주신 조선 3대 교구장이신 페레올 주교님과 새남터에서 미리내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시신을 모셔온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자리 잡고 있는 거룩한 땅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1년 1개월이라는 짧은 사제의 길을 걸으셨지만, 저의 증조부 이문영 베드로께서 박해를 피해 와 정착한 지금의 한덕골 성지도 방문하신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서도 분명 미사를 드리셨을 것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45년 8월17일 중국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으시고, 이듬해인 1846년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배교의 협박과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켜 내셨습니다.
천주교를 버리라는 관장의 말에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천주교가 참된 종교이므로 받듭니다. 천주교는 내게 천주 공경하기를 가르치고, 또 나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내게 배교하라는 말은 쓸데없는 말입니다. 결코 나는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23번째 편지에서)

***환난도 자랑으로 여기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순교로 끝까지 걸어가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본받아 우리도 나에게 주어진 신앙과 십자가를 끝까지 지켜냅시다!*** 아멘 

 


 <연중 제14주간 화요일>(7.6)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다."(마태9,35)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지 않고, 살려고 합니다.
살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살리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얼마나 향해 있는가?
우리의 약함을 고쳐주시고, 우리를 살리시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한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가?

오늘 독서는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이 형 에사우를 만나기에 앞서  하느님께 간절하게 매달립니다. 복을 가로채인 것에 대한 형 에사우 분노,
곧 '야곱을 죽여 버리겠다'는 형 에사우의 분노를 떠올리면서 야곱은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매달립니다.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32,27)

야곱은 하느님과의 씨름에서 하느님을 이깁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야곱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오늘 복음 끝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7)

 수확할 일꾼들, 예수님의 일을 하고, 예수님처럼 일을 하는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하느님의 참된 일꾼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아멘!

 

연중 제14주간 수요일>(7.7)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10,6)

 
지금 우리 안에 있는 '길 잃은. 양들에게 가서 '나의 사랑', 곧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열세 번째 사도로 불리움을 받은 나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사명에 충실하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과 함께 사명 완수를 위해 보다 더 기쁘게 땀 흘리는 '열세 번째 사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우리가 머무는곳에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늘 함께 하실 것 입니다
힘있는 축복 감사드려요^.^*

열세번째 사도인 우리들


 <연중 제14주간 목요일>(7.8)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

'사도들의 파견!'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나병환자와의 만남을 통해 결정적으로 회개한 이후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찾고 있던 중, 1208년 성 마티아 사도 축일에 포르치운쿨라 성당에서 들려온 사도들의 파견사화인 오늘 복음 말씀, 특히 '마태10,9-10'을 듣고 성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외치면서 즉시 실행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바라던 바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하던 바다. 그러더니 그는 즉시 발에서 신발을 벗어버리고, 손에서는 지팡이를 치워 버리며, 한 벌의 옷에 만족하고, 허리띠는 가느다란 새끼줄로 바꾸어 버렸다."(1첼라22)

오늘 복음인 사도들의 파견사화를 듣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그렇게 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예수님의 이 말씀(마태10,9-10)이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복음 선포에만 전념하라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본질에 집중하고, 부수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자

 걱정들은 하느님께 내어맡기고, 복음 선포라는 본질에 집중하라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참으로 힘겨운 일이지만,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려고 노력해 봅시다!


기도 안에서,
함께 잘 대비합시다!
아멘

 

오 포도색이 너무 좋아요 
울고모님도 포도 많이 드시고 
포도나무에 꼬옥 붙어 있는 하루하루 아름다운 색과 향이 풍기는 하루하루 됩시다.
싸랑해요  ㅎㅎ


 <연중 제14주간 금요일>(7.9)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10,20)

'역설의 삶을 살자!'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들을 세상에 복음 선포자로 파견하시면서, 세 가지 지침을 내리십니다.

첫째는 어제 복음이 전한, 하느님을 믿고 의탁하라는 메시지인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인 '미움과 박해를 견뎌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내일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인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10,16)

그렇습니다.
더 가지려고 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 치열한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늘 세상의 가치와 복음의 가치와의 충돌이요 싸움의 여정입니다.
그래서 아프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사람들로부터 미움도 받고 박해를 받기도 합니다.

믿는 이들은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감과 동시에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역설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역설의 삶!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죽음으로써 살게되는 역설의 삶!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하는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겪어야 하는 모든 미움과 박해를 견뎌냅니다. 역설의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도 그렇게 살아내는, 그래서 오늘 하느님의 나라 안에 머물고, 영원한 생명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하느님의 멋진 자녀들이 됩시다!
 좋아용

 

 


 <연중 제14주간 토요일>(7.10)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0,26)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라.'고,
그러면 '예수님께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모님께 대한 고마움이 넘실넘실
하는 오늘입니다 
사랑합니다 

오늘 복음은 지금 여기에 열세 번째 사도로 파견되어 있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파견되어진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죽는다는 것,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내가 소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남들보다 뒤쳐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는님의 요셉이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창세50,24)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