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BAR] 6주차 2021년 연중 제13주일
Talitá kum, girl, get up! 탈리타 쿰, 소녀야, 일어나라! - 칸탈라메사 추기경 -
• 지혜 1장 13절-15절, 2장 23절-25절 • 1 코린 8장 7절, 9절, 13절-15절. • 마르 5장 21절-43절.
이번 주일 복음 말씀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장소는 호수가의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에 둘러싸여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몸을 날려 예수님 발치에서 간청합니다. ‘제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셔서 당신의 손을 아이에게 얹어 주십시오. 그러면 아이는 구원받고 살아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연설 중에 이를 멈추고 그 남자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합니다.
두 번째 장면은 길가던 중에 일어난 장면입니다. 하혈로 고통받는 한 여인이 예수님께 살짝 다가가 그분의 겉옷을 만집니다. 그러자 그녀는 치유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는 동안 야이로 집안의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더 이상 스승님을 귀찮게 하지 마세요.’ 이 모든 것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회당 관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단지 믿음을 가져라.’
그리고 야이로의 집 안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대단한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울고 또 소리치고 있습니다. 십대의 소녀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당연히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5:39).’ 예수님께서는 그들은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소녀는 곧바로 일어서서 걷기 시작합니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습니다(마르 5:40-43).
이 복음 말씀은 목격된 하나의 사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복음 내용의 역사적 사실성과 신뢰성 정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2~3세기의 외경을 4대 복음서를 같은 권위 안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시도를 목격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매우 터무니없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신앙의 대표적인 본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경 복음서는, 특히 영지주의(靈知主義)에 기원하는 외경들은 예수님 당시에 일어났던 실제적 사실들과는 전혀 무관할뿐더러, 역사를 그대로 기록하는 것에 최소한의 관심도 없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몇 세기가 지난 후에 쓰인 것들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자신들 학파의 생각들을 기록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4대 복음서는 그 광경을 본인의 눈으로 직접 본 사람들에 의해서 또는 그 사람들에게서 직접 전해들은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가 올해 읽고 있는 마르코 복음은 베드로 사도와 매우 가까웠던 마르코가 스스로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본인이 보고 들은 것을 직접 기록한 사건들입니다.
이번 주일의 복음은 우리에게 복음의 이러한 역사적인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이로에 대한 명확한 묘사와, 그의 간절한 호소,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여인에 대한 에피소드, 예수님을 향한 사람들의 회의적인 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강한 의지, 죽은 소녀 앞에서 슬피 울려 애도하는 사람들의 광경, 아람어 원어로 단호하게 표현하시는 예수님의 명령, 다시 살아난 소녀에게 먹을 것부터 좀 주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인간적이고도 감동적인 부탁 말씀. 이 모든 것은 사건을 직접 목격한 자가 기록하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제 이번 주일 복음을 우리 삶에 적용해 봅시다. 우리에게는 육체의 죽음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죽음도 있습니다. 이 마음의 죽음은 바로 우리가 걱정이나, 좌절에 빠져 있을 때, 그리고, 우울할 때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말씀 “탈리타 쿰, 소녀야 일어나라”는 육체적으로 죽은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아이들에게도 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젊은이들이 그런 상태에 놓여있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슬픔, 비관주의, 살고 싶지 않은 마음, 이런 것들은 늘 그렇듯이 나쁜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다름 아닌 젊은이들에 의해 표출될 때에는, 그 나쁜 것들이 이들의 마음을 훨씬 더 심하게 억압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마음이) 죽어버린 소녀와 소년들을 다시 살리시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을 아이들에게 보내시어, 그분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분과 똑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젊은이들에게 외치게 하십니다. 탈리타 쿰. 얘야, 일어나라! 그리고 다시 살아라!
<연중 제13주일>(6.27) -교황 주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5,36)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려고 당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 보내주셔서, 땀 흘리게 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믿음의 토대이며 핵심'입니다.
우리가 맞이하게 될 부활의 원천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입니다.
'그런 우리는 얼마나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 여기에서 살아내야 할 부활의 삶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삶'인데... 지금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의 믿음과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엄청난 부활을 가져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하혈이 멈추고,
죽은 딸이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나를 기쁘게 하고 감사하게 하기 보다는, 때로는 너무나도 지치게 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까지도 들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십자가를 이겨내고, 내가 부활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나눔과 희생을 통해, 너도 함께 부활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늘 마음속에 간직할 때, 우리는 부활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요, 베드로의 후계자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영육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고, 교황의 사목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위해 베드로 성금을 봉헌하는 날입니다.
함께 마음을 모아 기쁘게 봉헌합시다!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6.28)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8,20)
오늘은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 17년 전에 사제서품을 받은 날, 사제서품 성구(루카6,36)처럼 하느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제'가 되도록 기도합니다.
'예수님 복음 선포의 삶'은, 예수님 말씀처럼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삶,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장소가 없는, 그야말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삶을 닮은 ‘프란치스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처럼 복음 선포를 위한 '나그네와 순례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4,43)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어느 한 곳에 정주하지 않으시고,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는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드러남'입니다.
오늘 독서인 창세기의 말씀(18,16-33)도,
하느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재에도 불구하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된 이유는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 안에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에, 아니 '의인 한 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를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의인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고, 내가 의인 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 다짐을 해 보게 됩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자비를 따라가고,
의인 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노력해본다는 의미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29)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16,18)
오늘은 '교회의 반석이신 성 베드로'와 '선교의 주보이신 성 바오로'를 기억하는 큰 축일입니다.
성령을 받은 오순절 설교를 통해 믿는 이들이 생겨났고,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탄생했습니다."내가 (베드로라고 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하신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애쓰신 베드로
그리스도교의 박해자였던 성 바오로는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사람으로 그리스도교 복음 선포자이며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
배반과 벅해의 두 사도가 ***하느님의 커다란 일꾼으로 대변신****합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고, 바오로는 '선교의 주보'가 됩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입니다."(마태16,16)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4,7)
달릴 길을 다 달린 두 사도는 기원 후 67년경에 함께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고, 바오로는 목이 잘려나가는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우리에게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를 은총의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또 하나의 베드로와 바오로가 되기 위해 날마다 최선을 다 합시다!
"이 사도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자신의 피로 교회를 세웠으며, 주님의 잔을 마시고 하느님의 벗이 되었네."(입당송)
씨뿌리는 그분을 찾고 또 찾는 하루하루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엮어나가겠습니다 .
성령강립 대측일 부터 내년 성령강립 대측일까지 온마음으로 다바 엘로힘
말씀을 읽고 외우고 쓰고 있습니다 .아멘
[최장명] [오전 11:21] 씨뿌리는 그분을 찾고 또 찾는 하루하루
[최장명] [오전 11:22]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엮어나가겠습니다 .
[최장명] [오전 11:23] 성령강립 대측일 부터 내년 성령강립 대측일까지 온마음으로 다바 엘로힘
[최장명] [오전 11:23] 말씀을 읽고 외우고 쓰고 있습니다 .아멘
[최장명] [오전 11:24] 컴퓨터로 보낼려니 엔터만 치면 전송되어 죄송해용 고모님 !!!
아녜스 화이팅!
잘하고계시네요.
주님께서가장기뻐하실것입니다.♡♡♡
인향 만리ㅡ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가고도 남습니다 .
아잉 좋은 향기 수원의 거룩하고 건강한 향이 진교 까지 왔습니다.ㅎ. 좋아요 우리 아빠 여동생이시라서 넘 좋아요 ㅎ
<연중 제13주간 목요일>(7.1)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9,2)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병을 죄인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벌'로 생각했기 때문에, 중풍 병자의 죄를 먼저 용서해 주심으로써 그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지니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선포됩니다.
오늘 복음 묵상을 통해,
두 가지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우리 주변에는 육의 중풍 환자들도 많지만,
영의 중풍 환자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육의 중풍'은 우리 몸에 중요한 신체기관인 뇌에 피가 제대로 흐르지 않을 때 생기는 병입니다.
'영의 중풍'은 영이 메말라 있는 병입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메말라 있는 병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영이 메말라 있는 영의 중풍 환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런 영의 중풍 환자들을 주님께로 데리고 와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7월의 첫 날입니다.
그리고 곧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다는 예보도 있습니다.
아직도 코로나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은 어수선한 상황이고, 변이된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에서 7월을 맞이합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들은 영이 메말라 있는 영의 중풍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이 치유되어야, 곧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너의 구원을 위해서도 애쓰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넘쳐나야, 이런 어려운 상황들이 치유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까지도 기꺼이 바치는 아브라함의 큰 믿음을 본받아, 우리도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함께. 나눕시다! 아멘
**맑고 푸른 포도송이 축복에 심쿵하던 심장이
수사님 동영상에 도저히 참지못하고 감동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만사천명의 피난민들에 담겨있는 주님의 사랑
너무 감사해서요
싸랑합니다 ♡♡♡♡♡
고모님 ! 선종하신 김영식 알로이시오 신부님께서도 국민 훈장 모란장 훈장을 김경수 경남지사가 올려놓으셨대요
너무나 아름다고 고운 미소를 가지신분이 정의로 똘똘 뭉쳐
순수하게 사시다 제 마음에도 남겨 놓으신 분이셔요 ♡ 아멘
네 어여쁘신 고모님도요 ^_^*
아녜스는 감성도풍부하고. 글로 표현도잘하고 성경말씀도 깨달음이 우수해요.
성령께서함께하심이지요. 주님이 함께하시면 못할일이없어요.
내가해야할일이
무엇인지생각해보셔요.그분께서 저에게타란트를주셨
음을믿으셔요. 아버지동생다섯째작은아버지의 3주기기일이고요.
자손들모두모여11시에미사하고함께식사한다고하네요.기도해주시면해요.
아녜스 안 녕^~^♡♡
네 ~~~에
<연중 제13주간 금요일>(7.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마태오의 직업'은 세금을 거두어다 로마 제국에 바치는 '세리'였고, 백성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죄인인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십니다.
이런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2-13)
나는 의인인가? 아니면 죄인인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오늘 말씀이 불편하게 다가왔을 것이고,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했고, 병자나 세리를 죄인 취급했습니다.
요즘 우리가 독서로 듣고 있는 창세기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큰 믿음'과 그에게 내려지는 '하느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아브라함 나이 100살, 사라의 나이 90살 때 얻은 귀한 외아들 이사악까지도 아낌없이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큰 믿음과 순종 앞에서'...
그리고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이 외아들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큰 사랑 앞에서'...
"나는 의인이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니 그렇게 말해도 되는가?
완전하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의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죄인'***입니다.
그런 나를 부르러 오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주님 부르심에*** "예!"*** 라고 응답합시다!
예 아네스 여기 있습니다 .
☯️함브르크가 낳은 6주된 신생아
베를린장벽이 세워지기 전
270만 동독인들이 자유를 찾아
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1954년 수많은 인파가 구름처럼
서쪽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정반대인 동쪽으로 떠나가는
한가족이 있었습니다.
서독출신의 '호르스트카스너'
목사의 가족이었습니다.
카스너목사는 서독에서 남부럽지 않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고,
당시 그에게는 함브르크에서 낳은
겨우6주된 신생아가 있었습니다.
이 신생아를 데리고 머나먼 동쪽,
정한 거처도, 교회도 없는곳을
향해 간다는것은 누가봐도
어리석고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바른 삶을
고민하던 그는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교회도 없는 공산치하로
들어가기로 마음 먹은것입니다.
카스너 목사는 청지기 인생을
사는것과 예수님처럼 더 낮은곳을
향해 가는것이 하나님앞에 합당
하다고 여겼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고난의 길과 십자가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역사가 펼쳐졌습니다.
당시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공산치하 동독으로 갔던 딸은
아버지의 엄격하고 철저한 신앙
생활로 양육받으며 자랐습니다.
수학과 언어에 뛰어난 능력이
있었던 그녀는 동독에서 물리학자
로 활동했고 통일과정에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환경부장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
독일 총선에서 총리가 된후
2017년 4선에 성공 하였습니다.
소박한 시골교회서 자란소녀가 통일
독일의 최고지도자가 되어
유럽의 경제위기극복과 전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개혁을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당대의 가치나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살겠로라고
시대를 역행했던 그 목사님의
딸은 바로 통일 독일을 이끌고있는
'앙겔라메르켈' 총리입니다 .
메르겔 총리!
독일은 6분간의 따뜻한 박수로
메르켈에게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독일인들은 그녀를 선택 하였고,
그녀는 18년동안 능력, 수완, 헌신
및 성실함으로 8천만 독일인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들의 나라에서 18년 동안을
통치하는 동안 위반과 비리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어떤 친척도 지도부에
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영광스러운 지도자인 척
하지 않았고 자신의 앞선 사람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사진 찍히려고 베를린 골목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인물이 "세계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여성 앙겔라메르겔
이며, 6백만명의 남성에 해당하는
여인으로 묘사됩니다.
메르켈은 당의 지도부를 떠나
후임자 들에게 뒷일을 넘겼습니다.
독일의 반응은
국가 역사상 전례가 없었습니다.
도시 전체 주민들이 집 발코니로
나갔고, 인기 시인, 연주자들 및
기타 시민단체들도 없는 가운데, 6분
동안 따뜻한 박수를 보냈습니다.
자발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현실과는 달리
찬사, 위선, 공연, 북소리는 없었고
아무도 "글로리 메르켈"을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패션이나 빛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부동산, 자동차,
요트 및 개인 제트기를 사지도 않은
화학 물리학자인, 이 독일
지도자에게 작별을 고하였습니다.
그녀는 독일의 지도부를 위임 후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녀는 떠났고, 그녀의 친척들은
그들이 자기 나라에서 엘리트라고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18년동안 한결같이 그녀는 옷을
갈아 입지 않았습니다.
기자 회견에서 한 기자는
메르겔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항상 같은 옷만 입고
있는 것을 주목 했는데, 다른 옷이 없는지요?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모델이 아니라 공무원입니다.
또 다른 기자 회견에서도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녀는 집을 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가사 도우미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녀의 대답이었습니다.
“아니요, 저는 그런 도우미는
없고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집에서 남편과 저는 매일
이 일들을 우리끼리 합니다.”
그러자 다른 기자가 물었습니다.
누가 옷을 세탁합니까?, 당신이나
당신의 남편이 합니까?
그러자
나는 옷을 손 보고,
남편이 세탁기를 돌립니다.
대부분 이 일은 무료
전기가 있는 밤에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아파트와
이웃사이에는 방음벽이 있어
이렇게 함으로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게 되지요.
그리고, 그녀는 "나는 당신들이
우리 정부의 일의 성과와 실패에
대해 질문하여 주기를 기대
합니다."고 말했습니다.
메르겔은 다른 시민들처럼
평범한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독일 총리로 선출되기
전에도 이 아파트에 살았고,
그 후에도 그녀는 여기를 떠나지
않았으며, 별장, 하인, 수영장,
정원도 없습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이 여인이
유럽 최대 경제대국인
독일의 총리 메르켈입니다!
현존하는 정치가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 !!!
독일통일은 참으로 기적적인데 우리나라도 성요셉과 성모님의 은총으로 평화로운통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성 토마스 사도 축일>(7.3)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20,28)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토마스는 불신의 아이콘으로 불리지만,
불신을 넘어 믿음으로 나아간 사도입니다.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라고 말하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듣고,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합니다.
그런 토마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20,27)
토마스가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사실 토마스만 믿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 부활 소식을 전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엠마오로 떠났던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내가 직접 목격하지 않은 것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믿는다는 것, 그 믿음의 대상은,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앎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보이지 않는 성령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피조물 안에 현존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매일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거룩한 영의 모습으로 현존하시는 성령님을 만나,
의심을 버리고 믿는 행복한 하느님의 한 가족이 됩시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에페2,20)
아멘 !
제목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7.5) - 탄생 200주년 -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마태10,18)
오늘은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억하는 큰 날입니다.
7월5일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1925년 복자품에 오르신 날입니다.
저의 고향이 미리내 성지와 가까운 곳이라서,
저는 종종 미리내 성지를 방문할 수 있었고,
그래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숨결을 더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리내 성지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사제품을 주신 조선 3대 교구장이신 페레올 주교님과 새남터에서 미리내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시신을 모셔온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자리 잡고 있는 거룩한 땅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1년 1개월이라는 짧은 사제의 길을 걸으셨지만, 저의 증조부 이문영 베드로께서 박해를 피해 와 정착한 지금의 한덕골 성지도 방문하신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서도 분명 미사를 드리셨을 것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45년 8월17일 중국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으시고, 이듬해인 1846년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배교의 협박과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켜 내셨습니다.
천주교를 버리라는 관장의 말에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천주교가 참된 종교이므로 받듭니다. 천주교는 내게 천주 공경하기를 가르치고, 또 나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내게 배교하라는 말은 쓸데없는 말입니다. 결코 나는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23번째 편지에서)
환난도 자랑으로 여기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순교로 끝까지 걸어가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본받아 우리도 나에게 주어진 신앙과 십자가를 끝까지 지켜냅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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