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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연중 12주일

거센 돌풍이 일어

- 칸탈라메사 추기경 -

 

이번 주일의 복음은 고요한 폭풍의 말씀입니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배에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피로에 지친 그분께서는 고물에서 잠이 드셨습니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쳤습니다. 겁이 질린 사도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그분께 외쳤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그리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이 복음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는 것은 마치 삶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호수는 우리의 가족이고 우리의 공동체이며 나의 마음 그 자체입니다. 사방의 모든 것이 어두워지고, 우리 삶의 작은 배가 사방에 호숫물로 포위되기 시작하는 데도, 하느님께서는 마치 안계시거나 혹은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느끼는 폭풍속의 상황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우리 가운데 과연 있을까요? (의사로부터 무서운 진단 결과를 받았을 때 우리는 이미 이러한 폭풍의 한 가운데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아이가 나쁜 길에 빠져들었을 때 부모는 이미 혼란 속에 있습니다. 재정적 어려움, 실직, 남자친구 또는 배우자와의 이별을 겪을 때 우리는 또한 삶의 폭풍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붙잡아야 하나요? 또 어디에 닻을 내려서 고요함을 되찾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폭풍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술과 같은 해결책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어려움을 피할 수 있다고 약속하시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가 그분께 청하기만 하면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삶에 직면하게 된 몸의 가시라고 불리는 심각한 문제를 언급하셨습니다. 그 분은 세 번(이는 무한한 수를 의미함)’이나 이 문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사도 바오로 사도에게 뭐라고 하셨을까요? 말씀을 더 읽어봅시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이서 완전히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 코린 12:7-10).’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그날에 난파선에서 사도들을 구한 것은 예수님께서 호수를 횡단하기 전부터 그 배에 함께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폭풍을 대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증입니다.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하십시오. 예수님을 우리의 삶과 우리의 가족이라는 배안에서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신앙과 기도 그리고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바다의 폭풍이 닥쳤을 때, 과거의 선원들은 파도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파도에 기름을 붓곤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두려움과 고통이라는 파도에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부어봅시다. 베드로 사도께서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에 맞서서 하느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 베드 5:7).’ 배위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말씀하신 것은 사도들이 예수님께 왜 그들의 목숨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시냐고 질문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는 걱정하시고 우리의 삶 또한 걱정하십니다. 얼마나 많이 하시겠습니까! 자주 인용되는 꿈을 꾼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사막을 건널 때에 두 쌍의 발자국을 보았고 한 쌍은 자신의 것이고 다른 한 쌍은 자신의 곁에서 함께 걸으신 예수님의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지점에 이르자 한 쌍의 발자국이 없어지는 것을 보고 그는 예수님께 자신이 가장 힘들었을 때 왜 예수님께서는 그를 떠났는지를 항의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지만 나는 너와 함께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막에 한 쌍의 발자국만 있는데 어떻게 당신께서 저와 함께 있었다는 겁니까? 그것은 나의 발자국이다 예수님께서 답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내 어깨위에 매고 가고 있었다.”

예수님께 우리를 떠났다고 불평을 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에 이를 기억하도록 합시다.

<연중 제12주일>(6.20)
***거센 돌풍속 고요한 폭풍의 말씀***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4,39)

 산을 오르면서 기도지향을 두고 바치는 묵주기도가 참 좋습니다.
주님과 성모님 손잡고 가니, 혼자가 아닙니다.

산행을 하면서 창조주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묵주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삶 전체를 묵상합니다.
특히 땀과 정상에서 느끼는 희열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크고 작은 풍랑 속에서 살아갑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4,41)

오늘 제1독서는 욥기의 말씀입니다.
욥은 엄청난 고통과 시련이라는 풍랑 속에서도 주님과의 만남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주님을 만나게 되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고, 더 큰 축복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코린토 교회에 권고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5,17)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가 믿어야 할 '믿음의 본질'이며, 또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의 본질'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안에서 모든 풍랑들을 이겨내고, 다시 부활합시다!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6.2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7,1)

오늘은 '청소년의 수호성인'이신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에게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모두 합심하여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오히려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십시오."(1코린1,10)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을 굳게 믿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인 창세기 12장 1절에서 9절의 말씀은,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12,1)

지체하지 않고 길을 떠남으로써,
살아있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단순하게 믿고,
겸손하게 믿고,
행동으로 믿읍시다!  아멘!!!

<연중 제12주간 수요일>(6.23)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7,15)

'참 예언자가 되자!'

'예언자'(prophet)는 미래의 어떠한 일을 말하거나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 안으로 파견된 사람'으로서, 지금 여기에 있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참 예언자'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생각을 하고, 하느님의 말을 하고, 하느님의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 예언자의 모습'이며,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는 방법'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 하느님을 전해야 하는 '예언직의 사명을 받은 예언자들'입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7,16)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예언직의 소중한 사명을 기억합시다!

***오늘도,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생각을 하고,
하느님의 말을 하고,
하느님의 행동을 하는,
참 예언자가 됩시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큰 축복을 받고,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합시다!***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24)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1,57.63)

오늘은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아이를 못 낳는 여자, 곧 '석녀'라고 불리는 엘리사벳을 구원의 도구로 선택하시어,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요한을 탄생시키십니다.

즈카르야가 아닌 요한의 이름으로 탄생한 그리스도의 선구자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파견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오시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 곧 이스라엘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사도13,25)
완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들!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들!

예수님처럼,
세례자 요한처럼,
끝까지 겸손 안에서 충실합시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6.25)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북한을 용서합시다!'

오늘은 '6.25 전쟁이 일어난 지 7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 곧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자랑스럽고 위대한 대한민국은 불행하게도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입니다. 오늘 우리는 갈라져 있는 남과 북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더 이상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평화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는 이렇습니다.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욱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219항)

'참 평화'를 위해 꼭 필요한 전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에 대한 말씀'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23,3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6,15)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4,32)

이것이 '너를 용서해야만 하는 근본 이유'이며,
'평화'는 반드시 이 '용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거짓 평화에 속지 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참 평화'가 우리 마음 안에 함께하고, 이 분단국가 안에 함께 하도록,
너를 먼저 용서하고,
북한을 먼저 용서합시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루카1:66

삶은 주닝이 주신것이고
행복한 날도 주시고 감사 감사합니다.

건강건강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