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BAR] 12주차 2020년 연중 제19주일 The boat was being tossed by the waves 배는 파도에 요동치고 있었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마태 14:22-33 지난주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크나큰 기쁨을 안고 떠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곱절로 나누었고, 모든 이는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난주 말씀드렸듯이, 그것은 역사상 가장 특별한 소풍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으로 인해 너무 큰 기쁨을 누렸고 이에 그들은 예수님을 왕이라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소풍에 조금 더 머물러 있어도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십니다(마태 14:22). 그분은 그들이 성공에 머물지 않고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중요한 임무를 잊어버리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동시에 그분은 군중을 '해산'시키십니다. 사실 사도들이 일찍이 예수님께 군중을 ‘해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장본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그분께서는 군중을 먹이고 싶어 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이 배불리 먹었기에 그분께서는 그들을 평화 속에서 돌려보내게 되었습니다. 군중을 해산시키시고 그분께서는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호수에서는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사도들의 배는 파도에 요동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오십니다. 베드로는 그 사람이 진짜 예수님이신 지 확인하기 위해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시험하기를 원치도 않았고 또한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 본인이 행동하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여기까지 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오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배에서 내려 예수님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러나 불쌍한 베드로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튼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고,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예수님께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그러자 모든 사람은 예수님에게 엎드려 절하며 외쳤습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여기까지의 내용은 단순한 사실을 나열한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 말씀은 단지 사실을 말해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고 모든 순간에 살아내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듣는 이는 복음의 순간으로 초대되어 관객이 아닌 배우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말씀이 그 어느 책과도 다른 점입니다. 복음 말씀은 죽은 것이 아닌 살아있는 책입니다. 초대 교회는 우리에게 이런 모범을 보여 줍니다. 사건이 전달되는 방식 자체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야기에 참여하여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보여줍니다. 그날 저녁,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십니다. 마태오가 그 복음서를 기록할 때는 이미 그분께서는 하늘로 가시고, 그곳에서 그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날 저녁 그분은 배를 깊은 곳으로 떠나 보냈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교회를 세상의 광활한 바다로 밀어 넣습니다. 그러자 큰바람이 일고, 이제 교회는 박해의 첫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그날 밤의 기억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무얼 말해주고 있을까요? 그날 밤 예수님께서는 멀리 계시지 않고 부재하지도 않았으며, 우리는 언제나 그분께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분께서는 그의 제자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물 위를 걸어’ 그분께로 오라 하시고, 오로지 믿음에만 의지하여 세상의 파도를 뚫고 나아가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이는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어둠의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유령은 아닌지, 그들이 모두 보고 믿었던 그분이 환상이나 신기루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을 보며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심판대가 결국에는 그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을 더 확고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고 선포하며 기꺼이 순교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그 사건을 우리의 세상적인 삶의 현장에 적용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삶은 많은 경우에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요동치는’ 배와 같이 보일 때가 많습니다. 곤경에 놓인 배는 당신의 결혼 생활일 수도, 사업일 수도, 건강일 수도 있습니다. ‘부는 맞바람’은 적개심일수도, 이해 부족일 수도, 불운의 연속일 수도, 직장이나 집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믿음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하기로 결심하여 용기를 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할 것입니다. 잠시 동안 우리는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 더 길고 더 어려운 시련을 직면하게 되면서 우리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가라않게 됩니다. 우리는 낙담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같은 상황에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는 것처럼 기억해야 합니다. “Take courage, it is I; do not be afraid.”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용기를 내어라!”이 감탄문을 신약 전체에서 찾아보았더니, 이는 오직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만 해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Courage,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Courage,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Courage: I have conquered the world”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사도 23:11).” 딱 한 번의 예외가 있는데 이 또한 예수님께서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예리고에서 사람들이 눈 먼 이에게 말을 할 때였습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마르 10:49).” '용기'라는 단어는 라틴어 cor의 어원인데, 권위있는 사전의 정의에 따르자면, '선천적이거나 다른 사람들의 모범에 감화를 받아, 힘들고 어렵고 굴욕적인 상황, 심지어 죽음까지 직면할 수 있는 결단력을 의미합니다. 이 모습은 동시에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고귀한 품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소설 ‘약혼자(The Bethrothed)’를 보면 주인공 중 한 명으로 큐레이터인 돈 아본디오(Don Abbondio)가 자신의 두려움과 소심함을 다음과 같이 정당화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용기를 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을 읽음으로써 극복해내야 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없는 존재인데, 어떻게 용기를 낼 수 있게 되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직접 해주신 약속의 힘에 기대어 기도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에게 “하지만 하느님이 거기 계시고, 그것으로 이미 충분합니다.”라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용기를 내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라고 얼마나 자주 말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갈대가 다른 갈대 들에게 바람에 흔들리지 말라고 말하는 상황과 똑같습니다. 우리의 말은 사물을 실제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말일 뿐입니다. 그러나 '용기'라고 말하는 분이 예수님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이기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용기를 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단순히 '용기를 내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어라, 나다, 너희들의 고통과 어두움과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하느님의 아들인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 용기라는 단어가 비로소 생동감을 얻게 되어 그것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우리 속에서 생겨나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기도에서 나오는 용기”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가능성과 책임에서 면피하기 위한 알리바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물론 우리 자신의 의무를 하느님께 내맡기는 좋은 방법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유명한 희곡에 등장하는 논쟁인 데 바로 “억척어멈과 그 자신들(용기의 어머니와 그녀의 아이들)”이라는 작품입니다. 30년 전쟁 당시 독일을 무대로 한 그 작품의 주인공은 '용기의 어머니(억척어멈)'라는 별명을 지닌 결단력과 총명함을 지닌 서민 여성입니다. 극의 마지막 장면은 제국군이 경비병들을 죽이고 개신교 도시인 할레로 진격하여 불을 지르려던 한밤중을 배경으로 합니다. 도시 가까이에서 용기의 어머니와 그녀의 벙어리 딸 카트린을 데리고 있던 한 농부 가족은 제국군들의 파괴로부터 도시를 구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벙어리 소녀에게 말합니다. '도처에 흐를 피를 멈추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단다. 네가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기도는 할 수 있지 않니. 아무도 네 말을 듣지 못한다고 해도 하느님께서는 들으실거야“ 그러나 카트린은 기도를 시작하는 대신 집 지붕으로 달려가 필사적으로 북을 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그녀가 도시에서 켜지는 첫 번째 불빛을 보게 되고 주민들이 잠에서 깨어 일어났음을 알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그녀는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지만 도시는 구하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묵시적 비평(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고전적 비판)가들은 아마도 게으르게 앉아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주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비난하며 그것은 진정한 신앙과 기도가 아니며 단지 소극적인 체념에 불과하다고 공격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나서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밤새도록 바람을 거슬러 노를 저어 가도록 하셨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스스로를 돕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억척어멈과 그들의 자식들의 의지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복음은 인간적으로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라도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처럼 '주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외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으로 오늘의 말씀은 끝내려고 합니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 40:29-31).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에 담긴 진리를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만약 이 '피곤하고 기운이 없는 자들'이라면, 우리도 ‘주님께 바라면, 새 힘을 얻어,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
[DABAR] 12주차 2020년 연중 제19주일 The boat was being tossed by the waves 배는 파도에 요동치고 있었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마태 14:22-33 Last time we left Jesus and the disciples in a context of great joy. Jesus has just multiplied the loaves and fishes; everyone ate and was filled. As I remarked last time, that was the most extraordinary picnic in history. People were so overjoyed for Jesus that someone thought they might proclaim him king. 지난주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크나큰 기쁨을 안고 떠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곱절로 나누었고, 모든 이는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난주 말씀드렸듯이, 그것은 역사상 가장 특별한 소풍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으로 인해 너무 큰 기쁨을 누렸고 이에 그들은 예수님을 왕이라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Then, it might have been equally nice to linger a little to enjoy the party. On the other hand, Jesus (and here we get into today’s Gospel) ‘made’ his disciples get into the boat and precede him to the other side.’ [Mt 14:22]. He does not want them to linger on success and forget what lies ahead of them. Meanwhile he ‘dismissed’ the crowds. A little earlier it had been the apostles who had suggested Jesus should ‘dismiss’ them. Yet Jesus had paid no heed to them; first he had wanted to feed the crowds. Now that they are filled, he is in a position to dismiss them in peace. 그러니 그 소풍에 조금 더 머물러 있어도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십니다(마태 14:22). 그분은 그들이 성공에 머물지 않고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중요한 임무를 잊어버리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동시에 그분은 군중을 '해산'시키십니다. 사실 사도들이 일찍이 예수님께 군중을 ‘해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장본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그분께서는 군중을 먹이고 싶어 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이 배불리 먹었기에 그분께서는 그들을 평화 속에서 돌려보내게 되었습니다. Having dismissed the crowds, he goes up on the mountain to pray by himself. Night falls. On the lake a strong wind starts blowing and the apostles’ boat is being tossed amongst the waves. Jesus comes towards them ‘during the fourth watch of the night,’ walking on the sea. Wanting to make sure it really was him, Peter says: ‘Lord, if it is you, command me to come to you on the water.’ He does not want to act by himself in such a serious situation, not wanting to tempt God, and so far he does well. 군중을 해산시키시고 그분께서는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호수에서는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사도들의 배는 파도에 요동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오십니다. 베드로는 그 사람이 진짜 예수님이신 지 확인하기 위해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시험하기를 원치도 않았고 또한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 본인이 행동하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여기까지 잘 하였습니다. Jesus says to him: ‘Come!’. He gets out of the boat and walks towards Jesus. What happens to him inside at a certain point, poor Peter, nobody knows. Well, he starts being afraid of the wind and begins to sink. Yet he is quick enough to cry to Jesus: ‘Lord, save me!.’ Jesus stretches his hand, pulls him up and says: ‘O you of little faith, why did you doubt?’ Then, all, caught by wonder, exclaimed turning to Jesus: ‘Truly, you are the Son of God.”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오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배에서 내려 예수님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러나 불쌍한 베드로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튼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고,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예수님께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그러자 모든 사람은 예수님에게 엎드려 절하며 외쳤습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Up to here the mere fact. Yet facts in the Gospel were not only written to be told, but to be lived out Every time, the listener is invited to join into the Gospel page, to turn from spectator into actor, a participant. T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the Gospel and any other book in the world. The Gospel is a living book, not a dead one. 여기까지의 내용은 단순한 사실을 나열한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 말씀은 단지 사실을 말해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고 모든 순간에 살아내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듣는 이는 복음의 순간으로 초대되어 관객이 아닌 배우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말씀이 그 어느 책과도 다른 점입니다. 복음 말씀은 죽은 것이 아닌 살아있는 책입니다. The early Church sets an example of this for us. The way the event is told shows that the Christian community has already ‘joined’ the story and applied it to its own situation. That evening, having dismissed the crowds, Jesus had gone up to the mountain on his own to pray; now, at the time when Matthew writes his Gospel, having left his disciples, he went up to heaven, where he lives precisely praying and ‘interceding” for his own. That evening he pushed the boat towards the deep; now he has pushed the Church into the vast sea of the world. Then a strong wind had risen; now the Church goes through her first experiences of persecution. 초대 교회는 우리에게 이런 모범을 보여 줍니다. 사건이 전달되는 방식 자체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야기에 참여하여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보여줍니다. 그날 저녁,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십니다. 마태오가 그 복음서를 기록할 때는 이미 그분께서는 하늘로 가시고, 그곳에서 그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날 저녁 그분은 배를 깊은 곳으로 떠나 보냈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교회를 세상의 광활한 바다로 밀어 넣습니다. 그러자 큰바람이 일고, 이제 교회는 박해의 첫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In this new situation, what did the memory of that night say to Christians? It said that Jesus was not far and absent, that one could always count on him. That even now he told his disciples to come toward him ‘walking on the water,’ i.e. proceeding amongst the waves of this world, leaning exclusively on faith.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그날 밤의 기억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무얼 말해주고 있을까요? 그날 밤 예수님께서는 멀리 계시지 않고 부재하지도 않았으며, 우리는 언제나 그분께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분께서는 그의 제자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물 위를 걸어’ 그분께로 오라 하시고, 오로지 믿음에만 의지하여 세상의 파도를 뚫고 나아가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That task will not always be easy: there will be times of darkness. They will wonder if Jesus was not ‘a ghost,’ that is to say if all they saw and believed about him might have been an illusion, a blunder. Yet what had happened to Peter reminded them that Jesus would not forsake them. In the end, in fact, the trial would be instrumental to making their faith even purer, so much so as to make martyrs capable of proclaiming again – this time before hostile judges and courts – that Jesus Christ is ‘truly the Son of God.’ 이는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어둠의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유령은 아닌지, 그들이 모두 보고 믿었던 그분이 환상이나 신기루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을 보며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심판대가 결국에는 그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을 더 확고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고 선포하며 기꺼이 순교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As I said, we are called on to do the same: to apply that event to our own personal human existence. So many times our life looks like that boat ‘tossed by the waves, for the wind was against it.’ The boat in trouble could be your marriage, business, health… The ‘wind against it’ could be the hostility and lack of understanding by people, continuous turns in fortune, or trouble finding a job or a home. 제가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그 사건을 우리의 세상적인 삶의 현장에 적용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삶은 많은 경우에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요동치는’ 배와 같이 보일 때가 많습니다. 곤경에 놓인 배는 당신의 결혼 생활일 수도, 사업일 수도, 건강일 수도 있습니다. ‘부는 맞바람’은 적개심일수도, 이해 부족일 수도, 불운의 연속일 수도, 직장이나 집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Perhaps, at the start, we faced difficulties with courage, determined not to lose faith and to trust in God. For a while we also walked on the water, that is only trusting in God’s help. But then, seeing the trial growing ever longer and ever harder, there was a time when we thought we wouldn’t make it and would sink. We lost heart. 아마도 처음에는 믿음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하기로 결심하여 용기를 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할 것입니다. 잠시 동안 우리는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 더 길고 더 어려운 시련을 직면하게 되면서 우리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가라않게 됩니다. 우리는 낙담하게 됩니다. That is the time to pick up and hear, as if it was personally addressed to ourselves, the word that Jesus addressed to his apostles in that circumstance: 그러나 바로 그때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같은 상황에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는 것처럼 기억해야 합니다. “Take courage, it is I; do not be afraid.”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Take courage!” I decided to do a little research on this exclamation and I was able to discover that it can be read in the Gospels and throughout the New Testament and only on Jesus’ own lips: “용기를 내어라!”이 감탄문을 신약 전체에서 찾아보았더니, 이는 오직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만 해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Courage,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Courage,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Courage: I have conquered the world”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Take courage – Jesus said appearing to Paul one night. For just as you have borne witness to my cause in Jerusalem, so you must also bear witness in Rome.” (Atti 23,11).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사도 23:11).” There is but one exception, but Jesus is involved in that case as well. It is when they say to the blind man from Jericho: ‘Take courage; get up, he(Jesus) is calling you!”. 딱 한 번의 예외가 있는데 이 또한 예수님께서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예리고에서 사람들이 눈 먼 이에게 말을 할 때였습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마르 10:49).” The word ‘courage’ is a cognate of Latin cor and, according to an authoritative definition, means ‘determination, either inborn or supported by the example of other people, which enables one to face tough, difficult, humiliating situations, even death, without ever giving up the noblest qualities of human nature.’ '용기'라는 단어는 라틴어 cor의 어원인데, 권위있는 사전의 정의에 따르자면, '선천적이거나 다른 사람들의 모범에 감화를 받아, 힘들고 어렵고 굴욕적인 상황, 심지어 죽음까지 직면할 수 있는 결단력을 의미합니다. 이 모습은 동시에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고귀한 품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In the Italian novel The Bethrothed one of the main characters, the curate, Don Abbondio, justifies his own fears and sheepishness: “We cannot give ourselves courage”’ [ This is precisely the conviction that we need to deny by reading the Gospel. If we haven’t got that courage, we can give it to ourselves! How do we do that? By faith in God, by prayer, capitalizing on Christ’s own promise. By saying, or crying out, to ourselves: “Yet God is there and that is enough!’ 이탈리아 소설 ‘약혼자(The Bethrothed)’를 보면 주인공 중 한 명으로 큐레이터인 돈 아본디오(Don Abbondio)가 자신의 두려움과 소심함을 다음과 같이 정당화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용기를 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을 읽음으로써 극복해내야 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없는 존재인데, 어떻게 용기를 낼 수 있게 되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직접 해주신 약속의 힘에 기대어 기도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에게 “하지만 하느님이 거기 계시고, 그것으로 이미 충분합니다.”라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How many times we say to each other: ‘Take courage, you will see everything will be fine!’ Yet we are like reeds tossed by the wind which say to other reeds that they should not tremble in the wind! Our words do not change things, being only words. It is not so when the one saying ‘Courage!’ is Jesus. He ‘has conquered the world,’ he had courage on our behalf as well. Hence he does not simply say: ‘“Take courage!”’ but ‘“Take courage, it is it!”’. I, the Son of God, the one who has known pain, darkness, death. On Jesus’ lips the word ‘courage’ is an effective one, which effects what it means and gives what it demands. 우리는 서로에게 '용기를 내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라고 얼마나 자주 말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갈대가 다른 갈대 들에게 바람에 흔들리지 말라고 말하는 상황과 똑같습니다. 우리의 말은 사물을 실제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말일 뿐입니다. 그러나 '용기'라고 말하는 분이 예수님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이기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용기를 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단순히 '용기를 내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어라, 나다, 너희들의 고통과 어두움과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하느님의 아들인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 용기라는 단어가 비로소 생동감을 얻게 되어 그것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우리 속에서 생겨나게 만듭니다. Someone says that such courage based on faith in God and on prayer is an alibi, an escape from one’s own possibilities and responsibilities. It would be a way of dumping our own duties on God. It is the argument underlying the well-known play by Bertold Brecht, which significantly is entitled Mother Courage and Her Children. The protagonist of the play, set in Germany at the time of the Thirty-Years’ War, is a woman from the populace, who, for her determination and resourcefulness is nicknamed ‘Mother Courage.’ 어떤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기도에서 나오는 용기”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가능성과 책임에서 면피하기 위한 알리바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물론 우리 자신의 의무를 하느님께 내맡기는 좋은 방법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유명한 희곡에 등장하는 논쟁인 데 바로 “억척어멈과 그 자신들(용기의 어머니와 그녀의 아이들)”이라는 작품입니다. 30년 전쟁 당시 독일을 무대로 한 그 작품의 주인공은 '용기의 어머니(억척어멈)'라는 별명을 지닌 결단력과 총명함을 지닌 서민 여성입니다. The final scene of the play is set in the deep of the night, when the imperial troups kill the guards and advance to the Protestant city of Halle to set it on fire. Close to the city, a peasant family hosting Mother Courage with her dumb daughter Kattrin, knows that they can do nothing but pray to save the city from destruction. ‘We can do nothing – they say to the dump girl – to stop the blood that is about to flow. Even though you cannot speak, at least you can pray. If nobody else can hear He can hear you.’ 극의 마지막 장면은 제국군이 경비병들을 죽이고 개신교 도시인 할레로 진격하여 불을 지르려던 한밤중을 배경으로 합니다. 도시 가까이에서 용기의 어머니와 그녀의 벙어리 딸 카트린을 데리고 있던 한 농부 가족은 제국군들의 파괴로부터 도시를 구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벙어리 소녀에게 말합니다. '도처에 흐를 피를 멈추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단다. 네가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기도는 할 수 있지 않니. 아무도 네 말을 듣지 못한다고 해도 하느님께서는 들으실거야“ Yet Kattrin, instead of starting to pray, rushes onto the roof of the house, desperately starts playing a drum, until she sees the city’s first morning lights and understands that residents must have woken up and are up. She is killed by the soldiers, but the city is saved. 그러나 카트린은 기도를 시작하는 대신 집 지붕으로 달려가 필사적으로 북을 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그녀가 도시에서 켜지는 첫 번째 불빛을 보게 되고 주민들이 잠에서 깨어 일어났음을 알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그녀는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지만 도시는 구하게 됩니다. The implied criticism here (which is the classic criticism by Marxists) attacks those who simply sit lazily, waiting for God to do everything himself, but not true faith and true prayer which is completely different from passive resignation. Jesus let the apostles row against the wind all night and used all available resources before taking action himself. 이 대목에서 묵시적 비평(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고전적 비판)가들은 아마도 게으르게 앉아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주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비난하며 그것은 진정한 신앙과 기도가 아니며 단지 소극적인 체념에 불과하다고 공격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나서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밤새도록 바람을 거슬러 노를 저어 가도록 하셨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스스로를 돕도록 하셨습니다. There are situations in life, as we know very well, that cannot be solved even with Mother Courage’s and her children’s determination. The Gospel tells us that even in those cases, when, humanly speaking, there is nothing left to do, we can always cry out like Peter when he was sinking: ‘Lord, save me!.’ 하지만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억척어멈과 그들의 자식들의 의지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복음은 인간적으로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라도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처럼 '주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외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I like to end this reflection with a word of God we read in Isaiah: 이사야서의 말씀으로 오늘의 말씀은 끝내려고 합니다. “He gives power to the faint, abundant strength to the weak. Though young men faint and grow weary, and youths stagger and fall, They that hope in the Lord will renew their strength, they will soar on eagles’ wings; They will run and not grow weary, walk and not grow faint.” (Isaiah 40:29-31).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 40:29-31). Many people have experienced the truth contained in these words. If we too are amongst the ‘faint and the weak,’ let us try and ‘hope in the Lord’ with all our strength and we too will soar on eagles’ wings.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에 담긴 진리를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만약 이 '피곤하고 기운이 없는 자들'이라면, 우리도 ‘주님께 바라면, 새 힘을 얻어,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연중 제19주일>(8.8)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6,51)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한 양식을 얻기 위해서 땀을 흘립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오늘 복음은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먹으면 사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우리는 미사를 드릴 때마다 축성된 성체, 곧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히 사는 길이 열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체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성체를 받아 모시기에 '합당한 준비'입니다. 이것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면, 이것이 바로 성체를 모독하는 '모령성체'입니다. 성체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합당한 준비를 통해 살아있는 빵인 성체를 받아 모시고, 오늘도 살고 내일도 살고 영원히 삽시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살아갑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소5,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8.9)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마태17,22-23) '이방인을 사랑하자!' 오늘 복음은 예수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와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바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십자가 없는 부활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 주 우리 하느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신명10,18-19) 죄인들, 약자들, 소외된 이들, 말 못하는 하느님의 피조물들, 하느님과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나와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나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들, 원수들, 박해자들, . 이방인에게 다가가고 이방인을 사랑합시다♡ |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8.10)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청년김대건길!' 꿈을 이루었습니다. 제가 은이성지에서 신덕고개, 망덕고개, 애덕고개를 넘어 미리내성지까지 도보 성지순례를 꼭 하고 싶었는데, 이번에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어제부터 이번 한 주간 휴가의 시간을 갖습니다. 어제 청년김대건길(10.3km)을 걸었고, 오늘은 최양업토마스 신부님의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 묘소가 있는 수리산 성지를 다녀올 계획입니다. 수요일에는 솔뫼성지와 나바위 성지를 거쳐 산청으로 가서 하루 묵고, 다음날은 지리산 등산을 하려고 합니다. 어제 걸었던 청년김대건길은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생전에 걸으셨던 '사목활동의 길'이고, 순교하신 후에는 이민식빈첸시오 형제님이 신부님의 유해를 운구한 '유해운구길'입니다. 그래서 벅찬 마음이었고, 망덕고개에서 애덕고개 구간은 제 고향을 지나는 구간이어서 또한 벅찼답니다. 더운 날씨에 흐르는 땀이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땀과 이민식빈첸시오 형제님의 땀으로 느껴졌습니다. 순례의 배고픔과 힘듦이 또한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가 순교형으로 불 속에 던져진 뜨거움에 비하면 어제 체험한 더위, ###지금 겪고 있는 더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 첫 사제이신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이나,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는 많은 이들을 살리는 일에 헌신한 분들입니다. 너를 위해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신 분들입니다. 성 라우렌시오 부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밀알이 되셨습니다. 성인께서는 박해자들 앞에서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라고 외침으로써,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보물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무더위와 코로나의 힘듦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를 기억하면서 이겨냅시다! 우리도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됩시다! 죽어도 죽지않는 삶!!! 영원한 삶 !!! |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8.11)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18,15)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인 '아씨시의 성녀 클라라'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는 깊은 영적 동반자 관계입니다. 그 중심에는 사부 성 프란치스코가 온전하게 닮으려고 했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성녀 클라라는 철저한 가난을 추구했습니다. 자매들은 단순한 노동과 애긍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철저한 가난과 관상의 삶을 추구했습니다. 성녀 클라라는 가난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가난하신 사부 성 프란치스코 때문에 가난을 사랑했습니다. 어제는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와 복자 이성례마리아의 삶과 신앙이 스며있는 안양 수리산 성지를 순례했습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최양업토마스 신부님의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망나니의 칼 아래에서도 평화로웠던' 이성례마리아 복자를 만났습니다. 제12처와 13처 기도문을 통해 만난 복자 이성례마리아와 그 자녀들의 모습에 마음이 깊게 머물렀습니다. 사형판결을 받은 마리아는 옥으로 찾아온 자식들 얼굴을 보니 또 다시 순교에 장애가 될까 두려워 아이들을 돌려 보냅니다. "다 들 가거라. 그리고 특히 하느님과 성모님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너희 큰 형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거라."(12처) "사형 집행이 되는 날 아침, 야고보와 어린 세 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돈 몇 푼과 쌀자루를 메고 망나니를 찾아가 부탁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많이 아프지 않게 단 칼에 하늘 나라로 갈 수 있도록 해 주세요.'"(13처) 우리도 성녀 클라라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을 사랑하고 가난을 추구합시다! 우리도 장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와 복자 이성례마리아 순교자처럼 나의 잘남을 죽이는 순교, 어떠한 어려움이 찾아오더라도 이겨내는 순교의 삶을 삽시다! ***눈물이나요 너무 사랑스럽고 아리따운 가족들 때문에요 어쩜 저리도 훌륭할까요 ?*** |
<연중제19주간 목요일>(8.12)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용서하자!' 어제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고향인 '솔뫼성지'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탄생지인 '새터성지'와 무명순교자들이 묻혀있는 줄무덤 성지인 청양 '다락골성지'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조선 입국 착륙지점인 강경 '나바위성지'를 순례했습니다. 오늘은 지리산 천왕봉을 등산합니다. 용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명령'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는 내가 살기 위한 '생명행위'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18,35) 우리가 세상 안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일이 있다면 아마 '너를 용서하는 일', 그것도 '조건 없이 용서하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힘 안에서 보면, 또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너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 안에 머물면 언제든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용서'입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17,20) 날마다 믿음 안에서 행해지는 '용서의 기적'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내 안에서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연중제19주간 금요일>(8.13)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19,6) '잊지 말고 기억하자!' 이 땅에 있는 많은 '성지'도 '순교자들의 땀과 피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세기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남자와 여자가 둘이 한 몸이 되는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것을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혼인의 불가해소성) 우리는 힘들 때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하고, 혼인의 첫 마음과 첫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업적을 잊지 말고 꼭 간직합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합시다!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1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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