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BAR] 17주차 2021년 연중 제24주일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Faith without works is dead - 칸탈라메사 추기경 - 이사 50:5-9ㄴ 야고 2:14-18 마태 8:27-35. 오늘 복음은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있었던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유명한 문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번 복음 말씀에서는 베드로의 대답 즉,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들의 대답에 따른 수난 예고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마르 8:31).’ 베드로의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꾸짖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 들은 말씀을 평생 기억했을 것입니다(베드로의 기억을 기반으로 하는 이 이야기를 마르코 사가에게 전달한 것은 바로 베드로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이 시점(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시점)에서야 이 에피소드에서 전달해야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마르 8:34-35.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전례의 복음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제1독서(자기를 치는 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자기에게 침 뱉는 자들에게 뺨을 돌려주는 하느님의 종의 이야기)를 통하여 분명히 드러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라는 말씀을 통해서도 오늘의 복음 말씀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이러한 주제와 함께 또 다른 주제인 베드로의 믿음의 행위와 십자가를 지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주제는 제2독서에 나오는 성 야고보의 믿음과 행위에 다음과 같이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야고 2:14-18).’ 때때로 성경 주석가들은 이 말씀에서 성 야고보와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갈라 2:16)’라고 말한 성 바오로가 대조를 이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부주의한 제자가 스승의 교리를 강조하여 야고보의 걱정스런 반응을 야기했는지 모르겠지만, 사도 바오로는 야고보서의 말씀에 반하는 내용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나오는 다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사도 바오로)의 생각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이것이 필수 조건입니다: ‘선한 일’은 하느님께서 친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무능하고 수동적으로 남아있거나 죄 안에서 머물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은총과 믿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선한 일을 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특별히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을 야고보는 주장한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로마서 앞부분에서 믿음으로 인한 의로움을 강하게 말씀하시지만(로마 3:21 참조), 하지만 뒷부분에서는 선한 행위(빛의 업적, 그리고 성령의 열매)에 대해 나열하시고 믿은 이는 누구나 다음을 실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 봉사의 정신, 순종, 정결, 겸손(로마 12장-14장 참조). 믿음과 선행 사이의 통합(일치)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수백 년간의 논쟁 끝에 그리스도인들이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는 또 하나의 주제입니다. 신학적 수준에서의 합의는 이제 거의 이루어져 갑니다. 우리는 선행만으로나 또는 선행이 없이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지만 믿음이 바로 우리를 선행으로 이끄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28)’에서 아버지가 포도밭에서 일하라고 일렀을 때 ‘네’라고 답하고는 가지 않는 아들과 같이 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통합(일치)는 이제 신학에서 신자들의 일상 생활로 옮겨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딘가에선 시작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루터교였던 위대한 철학자인 쇠렌 키르케고르는 작품으로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행함의 근원은 믿음의 근원보다 단순하다.’ 참된 믿음을 얻으려면 한 세대에서 극소수만이 성취할 수 있을 정도로 얻기 어려운 내적 삶과 영적인 정결함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불완전하더라도 무언가를 행함으로써 시작하는 것이 쉬운 것과 같이, 뭐 하나라도 극기하기 시작하면서 믿는 것이 쉽습니다. 철학자처럼 굴면서 게으른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마치 그는 ‘비밀의 내적 존재’가 있는 것처럼 마음으로는 기꺼이 희생할 용의가 있고 마음 속의 회랑에서는 침묵 속에 하느님을 찬양하고 단식을 한다고 해도, 일상 생활에서는 이익만을 추구하고 영광의 자리만을 찾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다가가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시오. “아니오. 친애하는 친구여. 죄송하지만 이제 행동을 보여주십시오.” 이제 사례를 들어봅시다. 어떤 이는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는 가난한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무한한 연민을 느껴서 텔레비전에 그들의 이미지를 볼 때마다 너무 고통스럽고, 이를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채널을 어쩔 수 없이 돌려버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며, 더 나아가 여기 이탈리아로 온 사람(난민)들이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성 야고보(의 말씀)를 무시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명확한데, 왜 우리가 사도들의 권위(성 바오로가 맞는지, 아니며 성 야고보를 따라야하는지)에 대해 논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내가 배고팠을 때에 너희가 나를 동정했고, 내가 추웠을 때 너희가 나를 위해 울어줬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너희는 감금 제도에 대해 불평하였다’ 이것이 아니고 그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배고플 때 너희가 나에게 음식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는 내가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갇혔을 때 너희는 나를 찾아와 주었고, 내가 이방인이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환대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성 야고보를 따르기 위해 성 바오로의 가르침을 잊음으로써 이 일치(통합)을 깨서는 안 됩니다. 이 두 분의 가르침은 함께 유지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이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되 믿음으로 행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해주신 모든 것에 대한 응답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천국에서 얻을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실로 천국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얻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믿음으로 선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이를 통해 기쁨이나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돕는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을 의미합니다. 감사함을 구하지 않고, 그 감사함을 사라지게 할 것처럼 끊임없이 선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도울 때 그 사람의 태도가 좋거나 나쁜 것과 같은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선택해야함을 의미합니다. 성 야고보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간구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야고 1:5-6). |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6,41) '남을 심판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들보와 티의 비유를 들어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사람들의 잘못, 곧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남을 판단하고 심판한다는 것은 내가 너보다 더 잘 알고 있고, 너보다 더 잘났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1코린8,2) 예수님께서는 나의 앎과 잘남에 머물러 있지 말고, 끊임없이 내 눈 속에 있는 들보, 곧 너를 옳게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먼저 치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너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본질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를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의 들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아무리 바쁘셔도 한적한 곳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영혼의 원수인 한가함을 피하기 위해 충실하게 또 헌신적으로 일해야 하고, 거룩한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끄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9,19.22) 오늘도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 거룩한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끄지 않도록 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23주간 월요일>(9.6) -창조시기 6일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루카6,7) '나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살릴 수 있을까?'에 온 마음을 담습니다. 사제와 너를 통해 이루시는 하느님의 구원행위에 나는 얼마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마음으로 함께 하고 있는가? 혹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콜로2,3)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을 간직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의 마음이 향해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잘 사는 길(well being)'이고, '치유되는 길(healing)'이고, '선종하는 길(well dying)'이라는 것을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온 마음으로 함께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나와 너 그리고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을 살리는 일에 더 마음을 담는 '순교자 성월', '창조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연중 제24주간 금요일>(9.17) -창조시기 17일째-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6,7-8.10) 예수님을 따랐던 여자 제자들처럼, 그리고 오늘 독서가 전하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처럼,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쓰여졌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구원과 모두의 구원을위한 하느님 구원 사업에 동참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몸과 마음으로 희생 봉사하는 하느님 자녀들, 소유하고 있는 것을 기쁘게 내어 놓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 몸과 마음을 이끄시어, 저희가 제 생각대로 살지 않고, 그 은총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영성체 후 기도)***** 고모님 사도바오로도 사랑하지만 티모테오 티모테아 ㅎㅎ 사랑해용 ♡♡♡ |
피정 편안하게 잘 다녀오셨어요 ㅎ 평화로운 시간이셨겠어요 <성 십자가 현양 축일>(9.14) -창조시기 14일째- 가끔씩 아니 종종 나를 찾아오는 고통의 십자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짊어지셔야만 했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고통으로 우리는 예수님 수난에 동참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고통 앞에서 불평을 드러내지 말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참 좋은 생명으로 나아가기를 차분하게 기도해봅니다. 인내로써 이겨냅시다! 아멘 좋은 참 좋았다 하는 평화가 가득한 하루하루되시길 빕니다. |
<연중 제24주간 토요일>(9.18) -창조시기 18일째-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루카8,4) '내 마음의 밭은? 지금은 내 마음의 밭이 하느님의 말씀이 결실을 내지 못하는 '길'이나 '바위'나 '가시덤불'의 모습은 아닌지를 먼저 잘 살펴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없고 나무랄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1티모6,14) 오늘 하느님의 나라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래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오늘도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합시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14,17)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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