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연중 제31주일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신명 6:2-6 2독서: 히브 7:23-28 복음: 마르 21:28-34 제1독서에서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말을 듣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 구절은 유대인들에게는 '신경'으로 간주됩니다. 이는 셰마(Shema)라는 히브리어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 단어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이는 유대교와 기독교 유일신교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모든 경건한 유대인은 이 단어를 하루에 세 번씩 암송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머리를 두었습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사도들도 이 관습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오늘날에도 정통 유대인들이 팔에 묶고 다니는 소위 메주자(성구함)라 불리는 작은 함을 그들은 자신의 이마와 자신의 집 대문에 걸어두었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많은 유태인들은 이 말을 입으로 되뇌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셰마, 이스라엘’. 1952년 한 화장터에서 발견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담겨있었습니다. 프랑스의 한 랍비인 ‘모세 프리드먼’은 죽기 전에 나치의 고위 장교에게 다가가 그의 옷깃을 잡고 ‘사자의 포효와 같이’ 유대인들에게 행한 모든 일에 대한 신성한 징벌이 있을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런 후 그는 모자를 고쳐 쓰고 ‘무한한 열정으로’ ‘쉐마, 이스라엘!’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모든 유대인들은 함께 ‘셰마, 이스라엘’를 부르짖으며 그를 따랐고, 그 광경은 목격한 증인은, 모든 이들은 초자연적인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이스라엘 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어느 날 한 율법 학자가 율법의 첫째 계명이 무엇이냐 물으니 예수님께서 우리가 들은 말씀(쉐마)을 인용하며, '첫째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이렇게 덧붙이시길,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과 율법 학자의 대화는 다음과 같이 끝이 납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 율법 학자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교에서는 두 가지의 정반대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삶의 사소한 부분에 대한 규범과 의무를 규정함으로써 율법의 계명과 교훈을 끝없이 늘리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1년이 365일이듯이 365개의 율법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613개를 말하는 이도 있었고, 더 많은 계명을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질식할 정도로 많은 규범보다는 하느님, 즉 모든 계명의 중심이 되는 하느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떤 제자는 위대한 스승인 힐렐에게 한 발로 서 있을 수 있는 시간 안에 모든 계명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네가 하기 싫은 것은 다른 이에게도 요청하지 마라. 온 율법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답하였습니다. 율법 학자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은 또 다른 율법을 만들어 내기 위한 차원이 아닌 율법의 핵심을 찾기 위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바로 이 방법론적 교훈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하지만 긴급하지 않은 일들이 있습니다(즉, 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 같은 것입니다). 반대로 급하지만 중요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부차적일 수도 있지만 급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종종 중요한 일을 희생시키는 위험을 자초합니다. 이러한 위험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습니까? 다음 이야기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느 날 노교수가 북미 대기업의 상류층을 대상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개인 시간을 계획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했습니다. 그는 작은 실험 하나를 보여주었습니다. 강의를 받아적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는 탁자 아래에서 크고 비어있는 유리 꽃병 하나를 꺼냈습니다. 그는 테니스 공 크기의 돌을 꺼내어 꽃병에 하나씩 하나씩 가득찰 때까지 넣었습니다. 더 이상 돌을 넣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꽃병이 가득찼습니까?’ 그러자 모두 ‘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정말 확실합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 탁자 아래에서 고무공이 가득 찬 상자를 꺼내 큰 돌 위에 조심스럽게 부었고, 고무공은 큰 돌 사이사이를 메웠습니다. ‘이번에는 꽃병이 가득찼습니까? ’라고 그는 물었고,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아닙니다.’라고 답하자, 노교수는 ‘좋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 모래 주머니를 꺼내 꽃병에 조심스럽게 부었습니다. 모래는 돌과 고무공 사이의 모든 공간을 채웠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이제 꽃병이 가득찼습니까?’라고 다시 물었고, 모두 ‘아니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말로 모두가 예상한 대로 탁자 위에 있는 주전자를 가져다가 꽃병이 가득찰 때까지 물을 부었습니다. 이때 그는 청중을 향해 '이 실험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위대한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가장 용감한 한 사람은 강의의 주제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우리 스케줄이 가득 차 있더라도, 친절을 베풀고 봉사하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아닙니다’ 노교수가 답하길, ‘아닙니다. 실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실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큰 돌을 먼저 넣지 않으면 나중에 넣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른 후, 모두 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노교수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우리 삶에서 큰 돌, 즉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건강? 가족? 친구? 대의를 지지하는 것?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 중요한 것은 이 큰 돌을 먼저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천 가지의 작은 것(고무공, 모래)에 우선순위를 두면 인생은 어리석은 일들로 가득 차고, 진정으로 중요한 일에 전념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의 큰 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자주 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을 당신의 삶의 첫 번째 자리에 두십시오'. 그리고 노교수는 청중에게 인사하고 떠났습니다. 아주 좋은 강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는 성공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는 회사 관리자로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을 더 알고자,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을 알고자 하는 신자들입니다. 이에 우리는 노교수가 언급한 건강, 가족, 친구에 두 개의 ‘큰 돌’을 더해야 합니다. 가장 큰 두 계명,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더해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계명이 아니라 특권이자 특혜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일을 멈출 수 없고, 이 사랑을 키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기를 원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유일한 사랑이며, 인간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무한한 사랑의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경험을 통해 이 세상에서 가장 일반적인 고통의 원인은 질병이기 보다는 사랑의 결핍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요람이 되어야 하는 결혼 생활에서 사랑의 결핍 생기면 더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성 아우구스틴은 여러 방면에서 사랑을 추구한 후 자신의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내렸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오 주님.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 영원히 안식하기 전에는 불안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그리고 그분과 함께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안식처, 행복의 근원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두 개의 ‘큰 돌’이 안전하게 주일에라도 첫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모든 것을 미루고 하느님과 우리 영혼을 위한 시간을 갖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에 참석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일요일 오후에 경기장에 가는 것과 아픈 이 또는 외로운 노인을 방문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할 때, 저는 기계적으로(당연히) 경기장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내 인생의 큰 돌은 무엇입니까?’ |
<연중 제31주일>(10.31)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12,34)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길!'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12,28)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12,29-31) 그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첫째가는 이 두 계명,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십니다. '하느님의 나라'(천국)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나라이며,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제와 영원히' 우리가 꼭 들어가야만 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첫째 길은, '계명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지켜야 할 첫째 계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 첫째 계명이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며, 이 두 계명을 잘 지켜야 하느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을 우리가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표지가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 내 원수와 박해자를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웃 사랑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힘으로부터 나오며, 하느님의 힘인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사랑을 합시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은 내가 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
<모든 성인 대축일>(11.1)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11월의 첫 날인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천상교회에서 기뻐 즐거워하고 있는 모든 성인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우리 모두의 영명축일입니다. 함께 축하합시다! 큰 환난을 겪어내고, 천상교회에서 영원한 기쁨과 행복 속에 사는 이들의 숫자는 신천지 이단이 주장하는 144,000명이 아니라,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묵시7,9)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래서 '나약한 우리도 성인들의 뒤를 따라 영광을 기뻐하며, 그들의 도움과 모범으로 힘을 얻어, 활기찬 믿음으로 영원한 고향을 향하여, 나그넷길을 서두르고 있습니다.'(오늘 감사송)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진복팔단(마태5,1-12), 곧 '참행복에 이르는 여덟 가지의 길'입니다. '진복팔단'은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두고 산 사람들, 곧 하느님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 하느님의 마음인, 온유와 자비와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고, 평화를 이루려고 애쓰는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복음적 사명 때문에, 모욕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 참행복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큰 은총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부터 11월 '위령성월'을 시작됩니다. 우리보다 앞서 죽음의 다리를 건너간 이들, 연옥에서 단련 받고 있는 영혼들을 특별히 기억하면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내려지기를 청하는 달입니다. 그리고 곧 다가올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깊이 묵상하는 달입니다. '방하착!' 이 말은 '손을 내려 밑에 둔다.'는 뜻으로,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지금 자연의 피조물들이 방하착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때를 잘 인식하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피조물들을 본받아 '방하착' 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
<위령의 날>(11.2) -첫째 미사-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평화를 빕니다♡ 어제는 이 '지상교회'가 '천상교회'와 소통하는 날이었고, 오늘은 '연옥교회'와 소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죽은 모든 이들, 특히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연옥에서 해방되어 천국에 오르기를 기도합니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오를 수 없고, 산 이들의 기도와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이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합니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가장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우리의 '기도' 때라고 합니다. 특히 천상교회와 연옥교회와 지상교회가 함께 만나는 '미사' 때이고, 우리의 '식사' 때라고 합니다. '식사 후 기도' 때문에.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라는 식사 후 기도가 불쌍한 연옥 영혼을 구할 수 있는 큰 기도입니다. 그러니 '식사 후 기도'를 잘 바치도록 합시다! 우리는 죽은 다음 연옥에서 단련 받지 않고, 곧바로 모든 성인들이 기뻐 즐거워하고 있는 천상교회로 들어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오늘 제1독서가 전하고 있는 '욥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또 그것이 자신의 죄로 인한 '하느님의 벌이라는 친구들의 말에도, 끝까지 견디어 내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제2독서가 확인시켜주고 있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이 굳은 믿음과 기억 안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천상교회를 향해 나아가는 마음이 가난한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31주간 수요일>(11.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33) 무소유의 길! 평화를 빕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인 '버림과 따름'에 관한 말씀(루카14,25-33)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가족과 자기 자신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탑을 세울 때 경비를 마련해야 하는 일과 적과 맞서 싸울 때 군사력을 갖추어야 하는 일을 비유로 들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 소유를 다 버릴 수 있는, 다 버리는 '무소유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더 채우고 더 쌓아놓는 소유의 길이 아닌, 더 비우고 더 내려놓는 '무소유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1월 위령성월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방하착의 달'입니다. '완전한 방하착의 모습인 죽음'을 먼저 맞이한 형제자매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깊이 묵상해 보는 달입니다. 며칠 전 등산으로 남해에 있는 금산 보리암을 다녀왔습니다. 열심히 방하착하고 있는 자연의 피조물들을 바라보면서, 나도 내려놓는 길을 더 충실하게 걸어가야 하겠다는 묵상을 하고 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굳게 믿으면서 따라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너를 위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우신, '무소유의 사랑'을 하신 분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로마13,10)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도 너를 위해 나의 소유를 비워내는 '예수님의 사랑', '무소유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11.4)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15,7) '하느님의 기쁨은 회개의 기쁨!' 오늘은 가롤로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또한 성녀 모데스타를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형제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기쁨인 회개'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립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1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기쁨은 죄인들과 함께하시는 기쁨이고, 죄인들이 회개하는 기쁨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백 명 중에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 때문에 기뻐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하십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죄인들과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기쁨'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업신여기면서 배척하고, 예수님마저도 업신여기면서 배척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당시 기득권을 누리면서 교만 안에 갇혀 있었던 그들과의 관계는 늘 '갈등의 관계'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기쁨을 따라가야 하고, 끊임없는 나의 회개로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합니다. 오늘도 '나의 작은 회개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31주간 금요일>(11.5)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16,8) '영리한 대처!' 오늘 복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세상 일에 매우 밝은 우리에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부잣집의 어떤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다가 주인에게 발각되어 쫓겨날 위기에 처합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자기 마음대로 빚을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합니다. 주인의 처사가 세상 가치에 눈이 밝은 우리에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로 다가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자신도 살고 너도 살리는 일에 영리하게 대처한 사람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가 이런 메시지로 다가왔습니다. 너를 바라보지 말고, 먼저 나를 바라보라는 메시지! 내가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얼른 영리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메시지! 그 영리한 대처가 바로 회개라는 메시지! 더 나아가 너를 살리는 일에도 영리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메시지!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다른 민족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방인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긴다고 말합니다.(로마15,14-21 참조)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명예로 여깁시다! 하느님을 위한 일은, 하느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실 일에 영리하게 대처하는 것인데, 이 영리한 대처가 바로 '나와 너의 구원인 회개'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펌글 ?故 이태석 신부가 뿌린 사랑 '부활'하다? 약 10년 전 '남수단의 슈바이처'라 불린 故 이태석 신부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로 많은 분들의 눈시울을 적셨었습니다. 그 영화에 이어 최근 <부활>이란 이름으로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이 영화는 이태석 신부가 48세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10년 뒤, 어린 제자들이 성장하며 벌어진 기적을 감동적으로 조명한 영화입니다. 놀랍게도 이 영화를 연출한 구수환 감독은 기독교인도 천주교신자도 아닌 불교신자였고, 은퇴자금을 털어 영화를 제작하였습니다. 불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사제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를 연이어 제작하고, 시사고발 피디 출신임에도 따뜻한 사랑을 담은 영화를 제작한 이유는 무엇인지 인터뷰한 기사를 공유합니다. (출처: 2021년 3월 26일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 조을선 기자의 인터뷰 기사 내용 중 일부) “영화 <울지마 톤즈>에 이어서 영화 <부활>을 제작하시게 된 계기가 특별히 있었나요?” “이태석 신부의 형, 이태영 신부가 지난 2019년에 59세의 나이로 선종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깡마른 모습으로 저를 불러 두 가지 유언을 남기셨어요. 하나는 이태석 재단을 계속 이끌어가 달라, 다른 하나는 이태석 신부 선종 10주기에 동생의 삶을 정리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태석 신부의 삶을 어떻게 정리할까 고민하던 차에 이태석 신부가 남수단에 작은 학교를 짓고 가르쳤던 어린 제자들이 생각났습니다. 남수단에 찾아갔더니 의사이거나 의대생이 된 제자가 무려 57명에 달했습니다. 남수단 작은 톤즈 마을에 신부님이 지은 허름한 학교에서 6년 만에 국립대 의대생 57명이 나온 것입니다. 그 작고 가난한 마을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후 공무원, 대통령실 경호원, 언론인까지 모두 70명의 제자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아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 의사가 된 것이 아니라 신부님 때문에 의사가 됐고 신부님처럼 살아가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제자들이 병원에서 진료하는 모습을 보니 먼저 '어디가 아프세요?' 묻는 것이 아니라 환자 손부터 잡는 거예요. 가는 곳마다 손을 잡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뒤 진료를 하기에,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이태석 신부님이 해오던 진료 방법입니다'라고 답하더군요. '아이들이 신부님의 삶을 그대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 기뻐서 영화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은 이태석 신부 제자들이 한센인 마을에 가서 봉사 진료를 했어요. 60명 정도 사는 마을인데 환자 300명 정도가 모였어요. 의사가 없으니 주변 마을에서 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거예요. 제자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쫄딱 굶으며 진료를 했어요. 어느 환자는 12년 만에 진료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환자에게 '의사가 당신 손을 잡았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물었더니 '이태석 신부님이 저희 곁에 돌아온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제자들은 '신부님이 우리 옆에 계신 거 같았습니다. 신부님 일을 우리가 대신해서 너무 기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단순히 제자들이 좋은 일을 했다는 게 아니라, 이태석 신부의 사랑이라는 것이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가는구나, 이것이야말로 부활의 의미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영화 제목은 <우리가 이태석입니다>였는데, 그 자리에서 제목을 <부활>로 바꿨습니다. 제가 이태석 신부에게 빠져든 것은 단순히 그분의 봉사 때문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간 방식' 때문이었어요. 그것을 우리 사회에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한센병 환자들은 고통 속에서도 신부님 이야기만 꺼내면 환하게 웃었습니다. 저는 이태석 신부를 존경스럽게 만들거나, 그를 보고 감동받게 하려고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살았던 삶은, 누구든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삶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영화 <울지마 톤즈>에서는 이태석 신부의 삶을 통해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서번트 리더십과, 경청하고 공감하고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는 삶이 이태석 신부의 인생이었지요. 영화 <울지마 톤즈>에서는 이런 삶에서 감동을 느낀다면 일상에서 실천해보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은 이태석 신부의 삶을 따랐고, 결국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뒤 이태석 신부와 같은 삶을 사는 감격스러운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우리가 이태석 신부가 됐을 때 사회는 굉장히 행복해진다는 게 부활의 핵심이에요. 저는 최고로 행복한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요?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삶은 뜻대로 안 되고, 불만투성이었을텐데 말이죠. 그분 통해 이야기하며 즐겁고, 하는 일에 굉장히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감독님은 오랫동안 시사 고발 피디로 활동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태석 신부에 관한 휴먼 영화, 종교 영화를 제작하게 되셨습니까?” “사람들은 이 영화 <부활>이 종교 영화라고 부르지만, 이건 굉장히 강한 고발 영화예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고발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시사 프로그램을 30년, 고발 프로그램을 10년 이상 했습니다. 이 영화도 사랑을 통해서 부당한 권력을 고발하고, 이기주의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좋은 사회를 만들까'가 피디들의 목표인데, 이 영화를 본 분들이 이기적인 삶을 스스로 반성하시는 거예요. 수많은 고발 프로그램을 제작해도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건 어려웠는데, 이 영화를 통해 많은 분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 하나의 기준을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성직자의 성폭력 문제, 권력 분쟁, 세습 이슈가 나올 때마다 '이태석 신부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냐'라는 글들이 나왔습니다. 이태석 신부가 성직자에 대한 하나의 기준이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부 의료진들과 교사들, 정치인들에 관한 사회적 문제가 터져 나올 때에도 의사로서, 교육자로서, 지도자로서의 바람직한 상으로 회자되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영화 흥행보다도 이런 부분에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감독님은 불교 신자라고 들었습니다. 가톨릭 사제인 이태석 신부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계속 제작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종교의 역할이 무엇일까요?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야 하는데, 이태석 신부는 그 삶 그대로였습니다. 법복 입은 스님이든, 예복 입은 목사든, 사제복을 입은 신부든, 종교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신부님의 삶을 보며 그것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 정진석 추기경이 감사패를 주신다고 해서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대화 중에 제가 '저는 톤즈 마을에서 예수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상하잖아요, 불교 신자가 예수님을 보고 왔으니까요. '당신이 본 예수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하고 물으시기에 '제가 본 예수님은 대단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제 마음에 있는 분이었습니다. 톤즈 성당은 여기처럼 으리으리하지 않습니다. 허름한 성당에 벽은 포를 맞아서 구멍이 뚫렸는데, 사람들이 성당만 들어오면 얼굴이 밝아지는 걸 봤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의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경제적, 이념적 양극화가 심각해지고 사회적 갈등이 심화하고 있지만 정치권과 사회 지도자들이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이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는 주범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갈등이 심각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이태석 신부의 리더십이 의미있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태석 신부의 헌신과 실천, 화합, 섬김의 리더십 상을 우리 사회에 알리고 확산하는 것만으로 위선과 갈등으로 점철된 정치권 등 사회 곳곳에 큰 경종을 울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단 한 분이라도 더 영화를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신부님의 삶을 통해 '이렇게 사는 것이 진짜 행복이구나', 확신을 갖게 되시면 좋겠습니다. |
<연중 제31주간 토요일>(11.6)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루카16,9) 자선을 베풀어라! 예수님께서는 너와 나누지 않고 쌓아둔 재물을 불의한 재물이라고 하시면서, 이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16,9)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재물을 쌓아두지만 말고 '자선을 베풀라.'는 말씀이고, 내가 살아생전에 자선을 베풀면 자선의 혜택을 받은 이들이 저승에서 기꺼이 맞이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자선은 지금 내 주변에 있는 가난한 이들과 사회적 약자들, 병자들에게 베푸는 자선입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앞서 떠나가신 분들, 특히 연옥에서 단련 받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선입니다. '자선을 베풀라.'는 의미의 말씀과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 질것이다."(루카11,39.41) 지금 우리는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위령성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를 바치면 그들에게 전대사가 수여된다.'는 교령을 발표했습니다. 원래는 그 기간이 11.1~11.8까지 이지만, 작년처럼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11월 한 달 동안' 죽은 이들에게 전대사를 수여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연옥에서 단련받고 있는 영혼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불쌍한 연옥 영혼들을 위한 '기도의 자선을 베풀 때'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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