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연중 제32주일 가난한 과부도 왔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1열왕 17:10-16 2독서: 히브 9:24-28 복음: 마르 12:38-44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성전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과부가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상자에 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개의 작은 동전(렙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에 해당합니다. 이를 보시고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이번 일요일은 '모든 과부의 일요일'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독서는 엘리야 예언자를 먹이기 위해 있는 모든 것(밀가루 한 줌과 올리브 기름 약간)을 바친 사렙타의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의 과부들과 홀아비들에게 집중할 좋은 기회입니다. 성경에서 과부를 자주 언급하고 홀아비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고대에 홀로 남겨진 과부가 같은 처지에 있는 남성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더 불리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혼자 남겨진 여성이 같은 상황에 처한 남성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 기회에 나는 과부와 홀아비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기혼자들에게도 중요하고 특히 이번 달에 모든 영혼과 관련이 있는 주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법적으로 결혼 생활의 끝을 나타내는 배우자의 죽음이 또한 모든 친교의 완전한 끝을 의미합니까? 두 사람을 이 땅에서 그렇게 가깝게 이어준 관계가 천국에서도 남을까요? 아니면 영원한 생명의 문턱을 넘으면 모두 잊혀질까요? 어느 날 어떤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일곱 형제와 연속으로 결혼한 극단적인 경우를 제시하면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르 12:25).”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하늘에서 결혼이 연속성이 없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심으로써 사두가이들이 단지 지상에서의 배우자 관계의 연속으로 제시한 희화화된 내세 개념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지상에서 맺은 관계를 하늘나라에서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배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은 죽음으로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 자식 사이, 친구 사이의 유대가 잊히지 않는 것처럼, 변형되고 영적으로 승화되어 지상에서의 제한적 관계를 넘어서게 됩니다. 장례예식의 서문에도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삶의 형태가 바뀌는 것이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일부인 결혼 또한 변형되는 것이지 무효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상의 결혼 생활에서 발생한 오해와 슬픔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죽어서도 인연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위로가 아니라 걱정을 해야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닙니다. 현세에서 영원으로 넘어가는 동안에 선만이 남고 악은 모두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하나로 묶은 사랑은 아마도 한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그들의 결점, 오해, 서로가 주고받은 슬픔은 모두 사라집니다. 게다가 믿음 안에 받아들인 슬픔은 영광이 됩니다. 많은 정말 많은 배우자들이 ‘하느님 안에서’ 결합을 할 때에만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지상에서는 누리지 못한 하나됨의 기쁨과 충만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서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두 명 이상의 사람과 합법적으로 결혼한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일곱 명의 형제와 결혼한 여성과 같은 경우일 것입니다.) 같은 답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참되게 사랑하고 헌신하였던 것은, 절대적으로 선한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 무효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경쟁이나 질투가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는(경쟁이나 질투) 진정한 사랑에 속하지 않고, 피조물의 본능적 한계일 뿐일 것입니다. |
<연중 제32주일>(11.6) -평신도 주일-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12,43) '온 정성을 담자!' 오늘은 '연중 제32주일'이자, 쉰네 번째 맞이하는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는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성직자를 제외한 모든 신자를 가리킵니다. 먼저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는 말씀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시다가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렇게 이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가운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마르12,43-44) 예수님께서 '동전 두 개'를 헌금함에 넣은 가난한 과부의 봉헌행위를 칭찬하십니다. 이는 봉헌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봉헌 금액이 아니라, 그 봉헌행위에 얼마나 나의 정성과 마음을 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입니다. 교무금이나 헌금, 전례봉사나 다른 희생과 봉사를 통한 봉헌행위는 '하느님께 드리는 행위'이고,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나라 건설과 관련되어 있는 '신적행위'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탄생)과 두 번째 오심(재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고, 이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당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나의 봉헌행위에 '온 정성'을 담아 봅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32주간 월요일>(11.8)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17,5) '믿음의 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는, '믿음의 힘'에 관한 말씀입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좌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유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구원하시기 위함인데, 너를 죄짓게 해서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큰 죄'에 해당된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행위로 인해 너를 죄짓게 한 일은 없는지? 나로 인해서 누군가가 아직도 냉담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참으로 실행하기 힘든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용서' 그것도 '조건 없는 용서'가 아닐까요? 하지만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 죄를 용서하셨고, 지금도 용서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기에, 나도 너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믿음의 힘에서 나오는 '하느님 행위'입니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주님께서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17,6)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먼저 용서하셨음을 굳게 믿고, 이 믿음의 힘으로 너를 사랑하고, 너를 용서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11.9)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19) '성령의 성전인 나의 몸!' 오늘은 서기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사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현재의 성 베드로 대성전이 봉헌(1626년)되기 이전, 천 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성전 정화'에 관한 말씀입니다. 기도의 집인 성전이 장사하는 집으로 더럽혀진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대단히 분노하십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요한2,15) 그러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요한2,18)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19)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두고 하신 이 말씀, 당신께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것을 두고 하신 이 말씀을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십니다. 단순한 건축물만이 성전이 아니라, 우리의 몸도 성전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다음의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일깨워 주신 것을 다시금 확인시킵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6,19) 하느님의 성전인 나의 몸, 더럽혀진 나의 몸을 정화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평화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을 쏟읍시다. |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11.10)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17,17) '은혜에 감사하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예수님을 마주오던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멀찍이 서서 소리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7,1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17,14) 하고 이르시자,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집니다. 그런데 나병으로부터 해방되어 몸이 깨끗해진 열 사람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배은망덕한 모습을 보인 아홉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러 온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두 가지를 마음에 담아봅니다. 하나는, 우리가 끊임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라는 기도를 바쳐야 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 기도를 꼭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구원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 바로 '감사기도'라는 것입니다. 한번 각자의 모습을 성찰해 봅시다!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기도를 얼마나 충실하게 바치고 있는지? 자비하신 하느님의 은혜를 입고 '감사기도'를 잘 바치고 있는지? 감사를 잊고 배은망덕한 모습을 보인 치유 받은 아홉 명의 나병환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1테살5,1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11.11)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1)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고, 이어서 '사람의 아들의 날(재림)'에 대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0.21) 하느님의 나라가 시간적으로 이미 도래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오심(육화)으로' 이미 도래했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들로' 이미 드러났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말씀은 '우리가 사는 세상 한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이고, '우리의 마음 속에, 내 마음 속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이 선포로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는 '내 마음 안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루카17,24)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재림'은 언제 올지 모를 시간이며, 갑자기 다가올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준비가 바로 이미 도래한 하느님의 나라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미 도래한 하느님의 나라, 우리가 머물러야 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14,17) 오늘도 화이팅 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11.12)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17,30) 예수님께서 노아 때와 롯 때에 일어난 일,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이들에게 내린 재앙을 언급하시면서,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노아와 롯처럼 장차 다가올 주님의 재림을 잘 준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오늘 독서인 지혜서의 말씀 안에서 그 준비를 찾아봅니다. 오늘 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주를 알 수 있다."(지혜13,5) 오늘 독서는, 생태계의 주보성인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 웅대함과 아름다움을 있게 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찾아야 하고, 만나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잘 보존해야 할 사명이 주어졌습니다.(창세1,26-28 참조)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시급한 준비는 '멈춤'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를 파괴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인간의 욕심을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하느님의 창조를 파괴하는 행위들이 여기저기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나만의 집과 팬션과 아파트를 짓기 위해 숲을 마구 파헤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이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마구 죽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집, 공동의 집인 지구가 아파신음하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산화탄소 증가로 인해 지구의 온도는 점점 더 올라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욕심을 멈추지 않고, 탄소중립과 같은 일들을 실행하지 않으면 앞으로 30년 후에는 엄청난 일들이 일어난다고 전문가들은 경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욕심을 멈출 때'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천주여, 무덤에서 편히 쉬신 아드님과 같이 우리도 편히 쉬게 되었으니, 내일도 잠에서 깨어나 부활하신 그분과 함께 새 생활을 시작하게 하소서. |
<연중 제32주간 토요일>(11.13)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루카18,1) '끊임없이 기도하는 믿음!' 오늘 복음은,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힘도 없고 빽도 없고 돈도 없었을 과부 한 사람이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계속 졸라댑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루카17,4-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18,7)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이들의 부르짖음을 물리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간청(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18,8) 이 말씀은 끊임없는 간청(기도)은 '믿음의 행위'이고, '믿음 안에서 나온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필요할 때만 적당히 간청하고 마는 믿음, 고통이 찾아왔을 때 배교하는 믿음은 아닌지요? '들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청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들어주시는 분을 굳게 믿으면서 단지 '청할 뿐'입니다. 그것도 '끊임없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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