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그리스도왕 대축일
Behold he is coming amid the clouds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다니 7:13-14 2독서: 묵시 1:5ㄱㄷ-8 복음: 요한 18:33ㄴ-37 오늘 복음에서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답하십니다. 그 바로 전에 카야파는 같은 질문을 다른 형태로 했습니다.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 그 때에도 예수님은 이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 마르코의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다니엘 예언자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그분의 답(예수님의 신성)에 확신을 더했습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최고 의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빗대어 말씀하심으로써, 성경의 이 구절은 특별한 빛으로 가득해집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사건, 그리스도의 의미, 역사 그 안에서 그리고 이를 넘어선 그분의 존재, 순간적이면서도 영원하신 분, 이 모든 의미가 이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이는 역사라는 서사 안에서 예언적이면서도 상징적인 힘을 가집니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달리, 오늘의 독서에서 우리는 겸손하고 고통받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제2독서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고,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분.” 위엄과 겸손을 유지하면서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두 특성은 항상 어렵게 느껴집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을 보편적인 친구와 형제임을 인식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주님이라고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미치는 그분의 전능하심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영화를 보면 이러한 어려움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의 예수님은 온유하고 박해를 받고 오해를 받는 분으로 우리 인간과 너무 비슷하여 우리의 어려움과 투쟁 그리고 삶에 대한 소망을 공유할 수 있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틴 스코세이지’의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과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의 친구이며 우리들의 친구로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분의 신비로운 모습은 매우 시적으로 그리고 침묵적으로 표현될 뿐입니다. (‘프란코 체피렐리’의 작품 ‘나자렛의 예수’에서는 예수님의 두 가지 본성을 모두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친절하고 접근하기 쉬운 사람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그분의 기적과 그분의 부활은 인성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제가 여기에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서사를 공감할 수 있고 대중적으로 제안하는 시도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의 백성들이 그분을 예언자 중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심으로써, 그 당시 사람들의 답도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표현하셨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교회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를 우리와 함께 하실 전체로서의 예수님이시며, 지극히 인간적이시면서도 (인간적인 면은)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1 미터의 정확한 길이를 측정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막대기는 프랑스 혁명 당시 이후에도 이를 측정하는 길이가 달라지지 않을 수 있도록 파리에 보관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 신자들이 나자렛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알고 있어, 문학 작품이나 영화 그 어떤 예술 작품에서의 예수님을 묘사하는 어떤 표현의 정당성을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될 것입니다. 다만 이는 1 미터를 측정하는 막대기와는 달리 고정된 이미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이해 안에서 성장하고, 감사하게도 새로운 문화와 인류 발전에 의한 새로운 질문과 도전이 계속 되기 때문입니다. |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11.21)-세계 젊은이의 날-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요한18,37) 전례력으로 한 해(나해)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서른여섯 번째 맞이하는 '세계 젊은이의 날'입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 십자가 위에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명패를 달았는데, 이는 '예수님을 죽인 자들의 조롱'이며, 왕이 아니면서 왕의 행세를 했다는 '예수님의 죄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미사 감사송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진리와 생명의 나라',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인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서 '가장 초라한 왕'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삶과 죽음을 통해 드러난 왕의 모습은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는 왕'이셨고, '자신의 온 존재를 너를 위해 내어놓는 왕'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백성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셨습니다. 하지만 이는 메시아(왕)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기득권 세력들이 원하던 왕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이런 예수님을 믿고 있고, 이런 왕의 모습을 원합니다. 그리고 이런 왕의 모습을 닮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함께 잘 사는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나는 어떤 왕을 원하고 있는가?' 지금은 나라의 대통령(왕)을 뽑는 대선정국인데, '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지닌 대통령을 원하고 있는가?' '성서주간'(11.21-11.27)입니다. 말씀 안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보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11.22) -성서주간-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루카21,3)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시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가운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21,3-4) 예수님께서는 헌금의 양을 보시지 않고, 봉헌하는 이의 마음을 보십니다. 가난한 과부의 온전한 봉헌의 마음을 보시고 그를 칭찬하십니다. 가난한 과부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하느님께 봉헌했다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으뜸 계명, 곧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는 계명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겉을 보지 말고 속(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너의 겉을 보고 평가하거나 판단합니다. 외모나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을 보셨습니다. 형식을 보지 않고 본질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담은 봉헌을 보시고 기뻐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느님께 드리는 나의 봉헌행위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나의 작은 자비와 사랑이라 하더라도 어여삐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아무도 나는 너무 가난해서, 가지고 있는 것이 초라해서 너를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 내심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성녀 체칠리아 ****** |
<연중 제34주간 화요일>(11.23) -성서주간-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일어나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21,9) '종말과 종말의 지연!'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종말에 관한 말씀'인데,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는 말씀'과 '재난의 시작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2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21,8) 그리고 '전쟁과 반란이 일어나고,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끝, 곧 종말'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찾아 올 종말과 종말의 지연을 함께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바로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종말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3,9) 오늘 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말씀들은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때는 '회개의 때'입니다. 회개는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기 성소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11.24) -성서주간-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21,19) '위기는 곧 기회!' 오늘은 베트남 교회의 큰 날인 '제117위 베트남 순교 성인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재난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21,12.13.17-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박해(위기)를 예수님을 증언할 좋은 기회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열두 사도들'은 그렇게 박해를 기회로 삼았습니다.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와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 역시 박해를 기회로 삼았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베트남의 순교 성인들 역시 '박해를 복음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기회'로 삼은 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위기를 기회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나를 찾아오는 고통과 시련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증언할 기회이며, 그 너머에 있는 부활을 증언할 기회입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우리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박해 앞에서 쉽게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 말씀처럼,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오늘도 화이팅 합시다!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르13,13)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34주간 금요일>(11.26) -성서주간-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21,31) '시대의 징표!' 사람들이 돋아난 무화과나무의 잎을 보고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서 여름은 추수와 마지막을 상징하는 계절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인 '무화과나무의 교훈'은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때인 종말이 가까우니 '시대의 징표를 잘 읽고 준비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제266대 교황이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을 보시고, 모든 복음 선포자들에게 '시대적 화두'를 던지셨습니다. 그 화두가 바로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입니다. 이는 '함께 가기', '함께 살기', '함께하는 여정'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함께 가고 함께 살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을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또한 지금 우리가(교회가) 함께 잘 가고 있지 못하다는 '시대의 징표로써의 반성'이기도 합니다. 당신 자신을 교회의 변두리에서 온 교황이라고 소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던진 이 화두는, 우리 모두에게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이 될 것을 호소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의 관심과 사랑이 아래로 향하게 함으로써, 그들과 함께하는 '변두리 중심의 교회'가 될 것을 호소합니다. 변두리에 있는 이들이 배제된 '그들만의 공동체', '끼리끼리의 공동체'가 아닌, 더 나아가 '인간만의 공동체'가 아닌, 자연의 피조물들을 포함한 모두가 함께 가고 함께 사는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호소합니다. 이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실행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34주간 토요일>(11.27) -성서주간-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3)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2020.11.29-2021.11.27) 폐막일이고, 각 교구나 본당에서 폐막미사가 거행되는 날입니다. 2021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탄생하신지 200주년(1821-2021)이 되는 뜻깊은 한 해입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이 뜻깊은 한 해를 희년으로 정해서, 신부님의 거룩한 삶과 죽음을 묵상했습니다. 희년의 주제는 "당신이 천주교인이오?"인데, 1826년 8월26일 페레올 주교님께 쓰신 신부님의 스무 번째 편지인 옥중서한에서 언급하신 말입니다. 이는 백령도 근처에서 붙잡히신 신부님께서 관아로 끌려와 관장에게 심문받을 때 받은 질문이고, 신부님께서는 이 질문에 단호하게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 대답과 목숨을 맞바꾸셨습니다. "당신이 천주교인이오?"라는 이 질문은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 앞에서 나도 신부님처럼,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성당 안에서만 천주교인이고, 성당 밖에서는 천주교인이 아닌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성당 밖에서, 특히 믿지 않는 이들 앞에서 자신있게 성호를 긋고, 식사 때 바치는 기도도 잘 바치고 있는지? 혹시 부끄럽다고, 아니면 아예 기억도 하지 않으면서 자주 생략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는 사람답게, 천주교인답게 삶의 자리에서 언제나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과 '겸손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지? 늘 깨어 있는 천주교인이 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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