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사의 은혜/연중시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9.20) 경축이동>(9.22)"103위 순교 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9.20) 경축이동>(9.22)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9,24)

'순교자가 되자!'

오늘 복음(루카9,23-26)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카9,23ㄴ)고 하십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도 바쳐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은 103위 순교 성인들을 경축 이동하여 기억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된 분들입니다.

103위 순교 성인 중에는 '남자가 56명 여자가 47명'입니다. '주교가 3명이고 사제가 8명'입니다. 가장 연장자는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모친이신 '유소사 체칠리아(79세)'이고, 가장 어린 성인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이들인 '유대철 베드로(14세)'입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은 '큰 믿음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신 분들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고한 희망 때문에' 모든 역경과 박해와 칼을 이겨내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손 안에서 영원한 기쁨 속에 있는 분들입니다.

자랑스런 순교자들이요, 우리 신앙의 선조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신앙의 선조들이 흘린 피와 땀 위에 서 있는 신앙입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103위 순교 성인께 감사드립시다!

불편함과 고통과 시련 앞에서 쉽게 흔들리는 우리의 나약한 믿음을 반성합시다! 모든 것을 이겨내면서 예수님(복음)을 따라가는 순교자가 됩시다!

"103위 순교 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1열왕18,19)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9.23)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루카8,17)

'본질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8,16-18)은 '등불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이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세상을 비추시는 등불이시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숨기셨지만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미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등불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본질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도 다가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할 본질'과 '살아야 할 본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땀과 죽음과 부활'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죄(罪)'는 '본질이 되지 못한 죄'입니다. 곧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이 되지 못한 죄'입니다. '예수님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은 죄'입니다. '예수님이 되지 않은 죄를 지었음에도 하느님께 자비와 용서를 청하지 않은 죄'입니다.

오늘은 '21세기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칭송받고 있는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비오 신부님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형제'로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 소속이며,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님'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성인이십니다.

비오 신부님은 사부이신 성 프란치스코처럼 '예수님의 거룩한 다섯 상처'인 오상(五傷)을 받으셨는데, 무려 50년 동안(1918년-1968) 받으셨습니다. 1910년에 사제서품 받으시고 1968년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거의 한 생을 오상 속에서, 곧 그리스도가 겪으셨던 수난 속에서 사셨던 분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런 비오 신부님을 2002년에 시성하셨습니다.

'한 생을 본질 속에서 사셨던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본받아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본질이 되려고, 본질이신 예수님이 되려고 노력합시다!

(~1열왕20,6)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5주간 화요일>(9.24)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8,21ㄴ)

'아빠, 아버지!'

오늘 복음(루카8,19-21)은 '예수님의 참 가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옵니다.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게 되자,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루카8,20) 하고 알려 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8,21)

하느님을 믿는 이들,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따라가고 있는 이들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가 이를 확인시켜 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십계명의 제4계명', 곧 인간 사랑의 으뜸 계명은 '부모에게 효도하여라.'라는 계명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누구나 육신의 부모가 있는 혈연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영적 관계 속에 있습니다. 때문에 부모님의 말씀을 잘 따라야 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잘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가족관계(참 가족)에 대한 말씀이며, 영적 관계가 핏줄로 맺어진 혈연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은, 하느님 사랑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이웃 사랑과 부모 사랑(효도)으로 나아갑니다.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본기도)

(~1열왕20,34)



<연중 제25주간 수요일>(9.25)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9,3)

'예수님처럼!'

오늘 복음(루카9,1-6)은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수 뽑으신 열두 제자를 세상 안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들이 세상 안에서 해야 할 일은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뒤이어 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참으로 놀랍기도 하고,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9,3)

철저하게 '무소유와 무방비의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육신을 위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수확할 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만 의존하라.'는 말씀입니다.

지팡이와 여행 보따리와 빵과 돈과 여벌 옷은 여행 때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하느님께만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러한 것들이 필요하겠지만, '하느님의 일, 곧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일은 하느님의 힘으로 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세상 것에 의존하거나, 사람에게 의존하면서 하게 되면, 고통과 시련이 찾아 왔을 때 쉽게 무너집니다. 믿음이 무너지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을 멈추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순수하고, 그분께서는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방패가 되신다. 그분의 말씀에 아무것도 보태지 마라. 그랬다가는 그분께서 너를 꾸짖으시고 너는 거짓말쟁이가 된다."(잠언30,5-6)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1열왕22,23)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순수하고, 그분께서는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방패가 되신다. 그분의 말씀에 아무것도 보태지 마라. 그랬다가는 그분께서 너를 꾸짖으시고 너는 거짓말쟁이가 된다."(잠언30,5-6)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연중 제25주간 목요일>(9.26)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9,9)

'약속된 것을 갈망하자!'

오늘 복음(루카9,7-9)은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라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더러는 '(세례자)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죄짓고는 못 산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를 두고 하는 속담처럼 들려옵니다.

오늘 독서(코헬1,2-11)에서 코헬렛 저자는 '태양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은 다 허무'라고 말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코헬1,2-3)

코헬렛은 '인간의 한계', '인간이 지닌 지혜의 한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는 인간이 지닌 절대적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실체'가 절대적 한계를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본질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허무이니 비관적으로 슬픔에 잠겨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 허무, 이 한계를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탐욕과 쾌락에 빠져 있었던 헤로데 앞에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큰 것을 약속했고 우리에게는 더 큰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고 약속된 것을 갈망합시다.
쾌락은 일시적이고 형벌은 끝이 없습니다. 고통은 짧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2첼라 191)

(~2열왕2,8)
코헬렛은 '인간의 한계', '인간이 지닌 지혜의 한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와 '죽음이라는 실체'가 절대적 한계를 지닌 인간이지만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극복해야 합니다--."우리는 큰 것을 약속했고 우리에게는 더 큰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고 약속된 것을 갈망합시다.
아멘
(열쇠) 천국의 열쇠  아멘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9.27)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9,20ㄴ)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

오늘 복음(루카9,18-22)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라는 말씀과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신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프랑스 랑드 지방의 소농의 아들로 태어난 빈첸시오 드 폴 성인은 사제 서품 후에 가난한 이들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 분'이십니다.

'빈첸시오 드 폴 성인이 사셨던 삶'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입니다. 예수님의 삶(사랑)은 '물이 낮은 곳으로 향하듯이,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향하는 삶'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시라고 신앙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많은 고난을 겪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실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한 그리스도(구세주)이신가?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 수난받으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는가?

바로 '가난한 이들'입니다.
바로 '죄인들'입니다.
바로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빈첸시오 드 폴 성인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셨던 성인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빈첸시오 성인을 본받아,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 그 길을 잘 따라갑시다!

"하느님, 가난한 이의 복지와 성직자 양성을 위하여, 복된 빈첸시오 사제에게 사도의 열정을 부어 주셨으니, 저희도 같은 정신으로, 그가 사랑한 것을 사랑하고 그가 가르친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본기도)

"주님, 세상을 떠난 이민홍(베드로.67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아멘."

(~ 2열왕 4,37)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5주간 토요일>(9.28)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9,44)

'부활의 대전제인 죽음!'

오늘 복음(루카9,43ㄴ-45)은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갖추신 분, 곧 사람이시면서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여러 곳에서 드러났는데, 먼저 '많은 기적을 통해서', 그리고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때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이 드러날 때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 오신 궁극적인 목적을 드러내는 '마지막 표지인 십자가', 곧 '죽어야 부활할 수 있다는 결정적 표지인 십자가 사건'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결정적 표지인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에 걸쳐서 제자들에게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복음 전체를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나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죽어야 부활한다는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수난과 죽음 없는 영광과 부활을 원했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희생과 봉사 없는 구원, 고통 없는 기쁨, 죽음 없는 부활을 바라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한번 각자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곧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내가 죽어야 살 수 있다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12,7-8)

"아버지, 이민홍 베드로의 영혼을 아버지 품 안에 받아 주소서."

(~ 2열왕7,10)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