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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연중 제24주일>"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29ㄴ)


<연중 제24주일>(9.15)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29ㄴ)

오늘 복음(마르8,27-35)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말씀'과 '예수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예고'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8,27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자,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마르8,28) 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8,29ㄱ)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29ㄴ) 하고 대답합니다. 

베드로의 이 멋진 신앙고백에 이어지는 말씀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예고'인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예수님으로부터 큰 꾸지람을 듣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구세주)'이십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희생제물'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전합니다.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50,5-6)

십자가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표지'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확실한 표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자주 바라보고, 십자가 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따라갑니다.

이 거룩한 실천을 통해서 매 순간 다시 부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십자가 사랑이 넘쳐나는 풍성한 한가위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 1열왕10,13)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한가위>(9.17 화)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12,15-21)

'한가위만 같아라!'

오늘 복음(루카1215-21)은 '탐욕을 조심하여라.'는 말씀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추석)'입니다. '8월 한 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을 지닌 '한가위'는 오곡백과가 익어가는 풍성한 결실의 계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나쁜 것들과 안 좋은 것들은 이제 잠시 다 내려놓고, 먼저 세상을 떠나신 조상님들과 부모님과 가족 친지들의 은덕과 사랑을 기억하면서, 한가위 의미에 걸맞게 좋은 것들이 풍성한 추석 명절 보내시기를 빕니다.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하느님, 우리의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입당송)

추석 명절에 들려오는 말씀은 우리에게 풍성한 복을 내려주신 하느님께 먼저 감사드리고,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한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말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12,20)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처럼, 우리네 인생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떠나가는 인생'입니다. 하느님께서 채워주신 온갖 복을 다 내려놓고 빈손으로 떠나갑니다. 지금 소유한 것을 결코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랑의 업적(실천)' 뿐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결정적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우리 가운데 있는 가장 약한 이들, 예수님께서 그들이 바로 당신이라고 하셨으니, 그들에게 먼저 나의 사랑이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묵시14,13ㄱ)

(~1열왕11,43)

<연중 제24주간 수요일>(9.18)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ㄴㄷ)

'더 큰 은사인 사랑!'

오늘 복음(루카7,31-35)은 '요한과 예수님이 배척당하시는 말씀'입니다.

백성들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들은 후 세례를 받고 하느님께서 의로우심을 받아들였지만,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은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 곧 '예수님을 통해서 이룩하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물리쳤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느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두고,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

오늘 독서(1코린12,31-13,13)는 '사랑의 찬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12,31)라고 말하면서, '사랑의 찬가'를 들려줍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모든 활동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13,4-7.13)

요한과 예수님을 배척한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은 사랑이 메말랐던 사람들입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1열왕12,19)


<연중 제24주간 목요일>(9.19)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루카7,47ㄴ)

'죄인들의 친구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루카7,36-50)은 '예수님께서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는 말씀'입니다.

시몬이라는 바리사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초대에 응하십니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와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릅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다 사회에서 여자는 제대로 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참으로 죄인들의 친구'이시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많은 여자의 행동을 보시고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에게 말합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7,47)

우리의 '신앙여정'은 '하느님 체험의 여정'입니다.
'하느님 사랑 체험의 여정, 곧 용서체험의 여정'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하느님 체험을 많이 한 사람, 하느님으로부터 큰 사랑(용서)을 받은 사람은 하느님께 많은 것을 내어드립니다. 많은 것을 내어드리고, 또 많은 것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참다운 신앙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다시 살리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입니다.(제1독서/1코린15,1-11 참조)

(~ 1열왕 13,10)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다시 살리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입니다.(제1독서/1코린15,1-11 참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묵시14,13ㄱ)죄인들의 친구이신 예수님!'
<연중 제24주간 금요일>(9.20)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8,3ㄷ)

'예수님의 협조자들!'

오늘 복음(루카8,1-3)은 '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돕다.'라는 말씀입니다.

9월20일인 오늘은 본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곧 '103위 순교 성인들을 기억하는 대축일'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 큰 대축일을 9.22(주일)로 경축 이동하여 거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합천본당은 이 큰 대축일을 9.22(주일)로 경축 이동하여 기념하고, 오늘은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미사'로 거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바쁘셨던 분이십니다.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시고, 악령과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낫게 하시느라 참으로 바쁘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활동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협조자들이 바로 '열두 제자들'이며, 오늘 복음에서 전해지고 있는 '여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른 여자들은, '많은 죄를 용서받고 예수님의 활동을 도왔던 사람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여자가 바로 일곱 마귀가 나간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해서 십자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 사랑에 큰 협조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우리가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죄인들이 다시 부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15,17)

하느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성실한 협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성실한 협조자'가 되어봅시다!

(~ 1열왕15,32)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9.21토)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마태9,9)

'참그리스도인들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9,9-13)은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그러자 마태오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9,11)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2-13)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이 볼 때 예수님은 정상적인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어 로마제국에 바치는 일을 하고 있었던 세리는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세리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고, 이런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십니다. 그리고 이런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기쁜소식(복음)'입니다.

오늘 독서(에페4,1-7.11-13)는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 신자들에게 전하는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4,1-3)

바리사이들처럼 살면서 "나는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고, 보다 더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참그리도스인들이 됩시다!

(~ 1열왕16,14)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5주간 수요일>(9.25)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9,3)

'예수님처럼!'

오늘 복음(루카9,1-6)은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수 뽑으신 열두 제자를 세상 안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들이 세상 안에서 해야 할 일은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뒤이어 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참으로 놀랍기도 하고,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9,3)

철저하게 '무소유와 무방비의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육신을 위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수확할 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만 의존하라.'는 말씀입니다.

지팡이와 여행 보따리와 빵과 돈과 여벌 옷은 여행 때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하느님께만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러한 것들이 필요하겠지만, '하느님의 일, 곧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일은 하느님의 힘으로 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세상 것에 의존하거나, 사람에게 의존하면서 하게 되면, 고통과 시련이 찾아 왔을 때 쉽게 무너집니다. 믿음이 무너지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을 멈추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순수하고, 그분께서는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방패가 되신다. 그분의 말씀에 아무것도 보태지 마라. 그랬다가는 그분께서 너를 꾸짖으시고 너는 거짓말쟁이가 된다."(잠언30,5-6)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1열왕22,23)

<연중 제25주간 목요일>(9.26)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9,9)

'약속된 것을 갈망하자!'

오늘 복음(루카9,7-9)은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라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더러는 '(세례자)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죄짓고는 못 산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를 두고 하는 속담처럼 들려옵니다.

오늘 독서(코헬1,2-11)에서 코헬렛 저자는 '태양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은 다 허무'라고 말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코헬1,2-3)

코헬렛은 '인간의 한계', '인간이 지닌 지혜의 한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는 인간이 지닌 절대적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실체'가 절대적 한계를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본질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허무이니 비관적으로 슬픔에 잠겨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 허무, 이 한계를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탐욕과 쾌락에 빠져 있었던 헤로데 앞에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큰 것을 약속했고 우리에게는 더 큰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고 약속된 것을 갈망합시다.
쾌락은 일시적이고 형벌은 끝이 없습니다. 고통은 짧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2첼라 191)

(~2열왕2,8)

코헬렛은 '인간의 한계', '인간이 지닌 지혜의 한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와 '죽음이라는 실체'가 절대적 한계를 지닌 인간이지만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극복해야 합니다--."우리는 큰 것을 약속했고 우리에게는 더 큰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고 약속된 것을 갈망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