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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부활

<부활 제5주일>(4.28)"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15,4)


<부활 제5주일>(4.28)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15,4)

'머물다!'

오늘 복음(요한15,1-8)은 '참 포도나무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15,1)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4-5) 

'하느님 아버지는 농부'이시고, '예수님은 참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떨어짐 그 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지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단순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계명)을 믿고 따르면,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되면,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서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1요한3,24)

내가 예수님 안에 머물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머무시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열매가 바로 '성령의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3,18)

'사랑과 용서와 화해 그리고 회개'는 내가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가지들,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지들이 됩시다!
 
(~ 탈출 39,21)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4.29)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14,26)

'성령!'

오늘 복음(요한14,21-26)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호자, 곧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보호자, 성령'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제3위격이시며, 하느님과 예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거룩한 영이십니다.

'보호자, 성령'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 머물고, 예수님 안에 머물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답입니다.
성령은 요란한 성령세미나나 성령기도를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 예수님 사랑 안에 온전하게 머물 때 주어지는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이시며 교회 학자로 선포되신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동정 학자는 그런 방법으로 성령의 충만함 안에 머물러 계셨던 분입니다. 카타리나 성녀의 시간경 기도인 성무일도 성모의 노래 후렴은 성령의 충만함 속에 있었던 성녀의 모습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녀 카타리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을 찾았고 만났으며, 사랑의 합일로써 주님과 일치되었도다. 알렐루야."

주님부활대축일 이후 매일 독서로 듣고 있는 말씀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이 어떻게 사도들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와 또 예루살렘 교회 밖으로 전해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도들은 보호자, 성령을 받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으며, 스승이신 예수님의 뒤를 온전히 뒤따라갔습니다.

오늘도 답이신 보호자 성령을 받기 위해 노력해 봅시다!
 
(~ 레위1,17)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제목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4.30)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요한14,27)

'평화(平和)!'

오늘 복음(요한14,27-31ㄱ)은 '평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14,28)

'평화'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전해주신 첫 말씀("평화가 너희와 함께!")으로,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며,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승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보호자 성령과 평화'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평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평화는 어떤 평화일까?'

'평화의 사전적 의미'는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평온한 상태'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힘의 논리에 의해서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곧 '돈과 재물과 권력의 힘에 의해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시는 평화는 이것을 훨씬 뛰어넘는 의미로서의 평화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종말론적 구원을 의미하는 평화'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합일(하나됨)과 돌아감(회개)으로써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평화의 사도'라고 부릅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왜 프란치스코를 그렇게 부를까?'

그것은 프란치스코의 오상(五傷)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합일'의 힘으로 '만인의 형제'가 되었고, 자연의 모든 피조물과도 형제애를 나눈 '우주적 형제애'를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의 사도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삶으로 보여준 것처럼,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사랑', '끼리끼리의 사랑이 아닌 보편사랑'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 레위 4,12)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승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보호자 성령과 평화'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종말론적 구원을 의미하는 평화'입니다.
제목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5.1) -노동자의 요셉-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5,5)

'성모성월!'
😊😊😊
오늘 복음(요한15,1-8)은 지난 부활 제5주일의 복음으로 들었던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4월을 뒤로 하고, 어머니의 달이요 가정의 달인 5월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5월 성모성월의 첫 날입니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를 공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성령의 힘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낳아주신 '주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요한15,4) 
주님의 어머니가 되신 후 한 생을 아들 예수님 안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면서 예수님의 삶에 끝까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19,27) 
그리고 또한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성모 마리아가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시며,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성모 마리아의 배필이며 예수님의 양아버지인 요셉, 직업이 목수였던 '노동자들의 수호성인인 노동자의 요셉'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15,1)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1,31)

농부의 기본 모습은 '성실과 땀'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께서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당신의 자녀들을 통해서 당신의 창조사업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5월 성모성월을 맞이하여, 성모 마리아의 삶을 본받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은총을 주님께 청하고, '구원의 전구자'이신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보다 더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으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성실한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레위7,38)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5.2)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15,9) 

'하느님의 사랑!'

오늘 복음(요한15,9-11)도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고, 그 머뭄의 구체적인 행위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게 되고,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먼저 언급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신 당신을 언급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뽑으셨고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뽑힌 사람들, 선택된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주님 부르심에 "예!" 라고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이 응답은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기쁘게 살겠다는 응답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곧 성직자들과 수도자들과 신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 곧 예수님의 육화(탄생)와 땀(공생활)과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사랑, 이 사랑 때문에, 이 사랑이 너무 좋아서, 이 사랑을 살고 싶고, 삶으로 증거하고 싶어서,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기쁘게 그리고 겸손하게.

성직자는 성직자로서,
수도자는 수도자로서,
신자는 신자로서,
각자의 자리(성소)에서 예수님의 계명을 삶으로 잘 따라가고 있는지, 그래서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고, 기쁨 안에 머물러 있는지 성찰해 보는 복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레위 10,20)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제목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5.3)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요한14,9)

'믿음의 눈!'

오늘 복음(요한14,6-14)은 '아버지께 가는 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14,6-7)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필립보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14,8) 그러자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요한14,9)

예수님 시대 가장 큰 화두(話頭)는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하느님이신 메시아를 간절하게 갈망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고 하느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를 씌어 십자가에 못 받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믿음의 눈!'

우리는 '매일' 예수님을 뵙고 있습니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복음'을 통해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있습니다.

그런 내가 되려면 '믿음의 눈, 영적인 눈'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눈, 영적인 눈이 있어야 다양한 표지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만나 뵈올 수 있습니다. 아멘.
 
(~ 레위 13,46)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5월3일 금요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축일)


내 안에 아버지 있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

후줄그레한 작업복 차림으로 부지런히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던 저를 한 형제님이 불러세웠습니다. “저기요! 여기 사무실이 어딘가요?” “무슨 일로 그러세요?” “양신부님 만나 뵈러 왔는데요.” “아, 안녕하세요? 제가 양신부입니다.” 

형제님은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하시더니 그러셨습니다. “설마, 그럴리가요. 농담하지 마시고 빨리 알려주시죠.”

자신들 앞에 서 있는 양신부를 두고, 양신부 어디 있냐고 묻는 분들 보며, 속으로 낄낄 웃으면서 저는 예수님의 심정을 아주 조금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도 높은 정신 교육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자들은 스승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틈만 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 안에 아버지 있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 나를 보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는 말씀의 진의를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웃기게도 필립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 복음 14장 8절)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요, 분신, 그분 자체이신 예수님을 오랫동안 뵈었으면서도, 하느님을 뵙게 해달라니,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답답했을 것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한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지 않으시고, 다그치지 않으시고, 다시 한번 자상하고 친절하게 당신의 신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해주십니다. 더불어 우리 가톨릭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다시금 명확하게 선언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 예수님을 뵌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를 뵌 것이라는 것.

자상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는 백성을 위해 ‘자! 이게 내 얼굴이다.’며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셨는데,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명확히 드러난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제목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부활 제5주간 토요일>(5.4)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요한15,20) 

'본분과 신원!'

오늘 복음(요한15,18-21)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미움을 받으셨고, 먼저 박해를 받으셨고, 먼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이런 의미의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네가 지금 고통과 시련 속에 있다면,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종인 우리를 위해 먼저 고통과 시련 속에 계셨고, 또 이를 이겨내셨음을 기억하면서 고통과 시련을 잘 이겨내라.'

오늘 독서(사도16,1-10)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이들과 복음 선포자들이 겪은 박해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를 잘 이겨낸 말씀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박해를 통해서 복음이 더 멀리 전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스테파노를 죽이는 박해가,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 밖으로 전해지게 했고,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 사도가 겪은 박해가, 복음이 더 멀리, 아시아를 넘어 유럽(마케도니아)으로 전해지게 했습니다.

사도들의 성령 체험 이후 주인이신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확고한 믿음이 가져다 준 결과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118,23)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인이 아니라, 종(협력자)입니다.
본당 신자들은 본당 사목자의 종들(협력자들)이고,
본당 신부는 본당 공동체의 종(협력자)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목자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협력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필요한 우리의 본분이요 신원입니다. 이 본분과 신원을 망각하지 말고, 본분과 신원에 맞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래서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합시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음을 이겨내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하느님의 종들이 됩시다!

(~ 레위 14,57)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