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성령강림대축일
오순절 또는 바벨? - 칸탈라메사 추기경 - 사도 2, 1-11 1 코린 12, 3-7, 12-13 요한 20, 19-23 오순절의 의미는 사도행전의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찼습니다”라는 구절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들이 성령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리고 그 때에 사도들은 무엇을 경험했을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압도당하는 경험을 했고, 마치 바다의 파도와 같이 사람(랑)이 넘쳐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로마 5:5)”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이것을 보증하였습니다. 성령의 강한 체험을 한 모두는 이에 동의할 것입니다. 처음 성령에게 어떤 이에게 내려오실 때에 가장 큰 효능은 세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부드럽고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심령언어는 세상사에서 새로운 일이 있어났다는 신호탄과 같습니다. 놀라운 점은 이와 같이 “새롭고 다양한 언어”로 말하는 것이 혼란을 야기하는 대신 오히려 감탄할만한 이해와 하나됨으로 이끌어 준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벨과 오순절의 차이(대비)를 의도적으로 나타냅니다. 바벨에서는 모든 이가 같은 언어로 말하지만 어느 순간 모든 이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게 됩니다. 언어의 혼란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오순절에는 모든 이가 서로 다른 언어를 이해하게 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바벨탑을 지은 사람들이 무엇을 이야기하였는지 그리고 오순절에 사도들이 무엇을 이야기하였는지를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벨탑을 지은 사람들은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에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창세 11:4)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권력에 대한 의지로 그들 스스로를 유명하게 하는 데에 힘을 쓰고 하느님의 영광이 아닌 그들의 영광을 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오순절에 사도들은 “하느님의 위업(위대한 업적)”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다시 두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에 대한 의지는 봉사하고자는 의지로, 이기심의 법은 사랑의 법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우리는 대중 매체(mass media, 매스 미디어)가 주인공인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삶의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지만 또한 위험을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실로 무엇을 위한 의사소통(communication, 의사소통)입니까? 의사가 소통되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피상적이고 종종 악의적으로 조작되기도 하고 돈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우리의 창의성을 들어내기도 하고, 우리 자신과 사건들을 보다 깊이 알아볼 수 있도록 돕기도 합니다. 또한 가난, 걱정, 불안과 도움을 구하는 외침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많은 의사를 손쉽게 전달하면서도 더 많은 소통의 차단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오순절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이야 말로 바벨의 언어에서 멀어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성령께서는 우리 인간의 언어의 형식과 흐름에 개입하실 때 “자비와 사랑”이라는 당신의 신성한 소통 방식으로 개입하십니다. 과연 어찌하여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과 소통하시고 우리와 이야기하며 즐거워하셨겠습니까? 성령께서는 인간의 오염된 언어의 강물을 정화시키시어 풍요롭게 하시고, 나아가 나눔과 하나됨의 도구로 쓰시고자 합니다. 모든 시작은 그것이 종교적이든 아니든, 사적이든 공적이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이는 바벨이 될 수도 오순절의 역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 시작이 이기심과 남용의 욕구에서 비롯된다면 바벨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타인의 자유에 대한 사랑과 존중에서 비롯된다면 이 시작은 오순절이 될 것입니다. |
연중 시기 |
제목 <연중 제7주간 목요일> <연중 제7주간 목요일>(5.2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마르9,43) 오늘 복음(마르9,41-50)의 핵심은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나의 구원에 필요한 사랑은 '물 한 잔으로 언급되는 작은 사랑'이고, '이 작은 사랑을 실천만 해도 구원에 이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두 손과 두 발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불구자와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고,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행한다면,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사람들, 손과 발이 잘려진 사람들과 외눈박이들과 같은 불구자들이 넘쳐날 것입니다. 참으로 지키기 힘든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과 죄의 유혹과 죄를 끊어버리는 단호함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기 때문에. 그리고 '믿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희망'이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천국)인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요즘 독서로 듣고 있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 안에서 보면,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나 중심의 이기적 삶이 죄'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상태 개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살고, 또 어떤 이들은 지옥의 삶을 삽니다. '완성된 천국의 모습인 영원한 생명'은 '잠시 지나가는 지금 여기에서 천국의 삶을 산 이들, 또 그렇게 살려고 애쓴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결정적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주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 민수16,14)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
제목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연중 제7주간 금요일>(5.24)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10,9) '혼인은 성사다!' 오늘 복음(마르10,1-12)은 '혼인과 이혼에 관한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그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10,5.8ㄴ-9) '혼인은 성사다!' '혼인의 단일성', 곧 '오직 한 남자와 한 여자와의 결합이며, 또한 '하느님 앞에서 유효하게 맺어진 혼인'은 '결코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절대로 풀릴 수 없다.'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의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혼인은 성사(聖事)'이기 때문입니다. '성사(Sacramentum)'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교회에 맡기신 은총의 효과적 표징들'로서,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 주는, 눈에 보이는 표징들'입니다. 교회의 그 대표적인 성사가 바로 '7성사'인, '세례성사.견진성사.성체성사.고백성사.병자성사.성품성사.혼인성사'입니다. 요즘 젊은 이들의 이혼율도 높고, 나이 들어 이혼하는 황혼이혼율도 높다고 합니다. 심각한 저출생율과 함께 지금 우리에게 닥친 큰 문제입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정의 참 가장(家長)'으로 모시면서 살아갑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가정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며 참 가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성가정을 이루어 갑시다! (~ 민수 18,20)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
제목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5.25)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10,14ㄷ) '단순성!' 오늘 복음(마르10,13-16)은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사랑하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10,14ㄴ-15)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어린이는 3살에서 5살 정도의 어린이를 말합니다. 이런 어린이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단순하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음과 행동 안에 가식이나 위선이 없고 솔직한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이런 단순성, 곧 이런 어린이들과 같은 마음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하느님과 세상 가치의 치열한 혼돈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간직하고 살았던 '지혜와 단순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나병환자와의 결정적 만남을 통해 회개한 이후 자매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단순하게 지혜이신 복음,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고 했습니다. 오늘 독서(야고5,13-20)는 '어린이들과 같은 마음, 단순성의 마음'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원로들을 부르십시오."(야고5,13-14ㄱ) '단순성!' (~ 민수 20,29)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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