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채움 과 비움 /독서

최준영의 《가난할 권리》아무도 고기를 먹지 않았다

아무도 고기를 먹지 않았다


열 명 정도가
야외 식탁 앞에 모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무도 고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유를 물었다. 왜 안 먹느냐고. 그중 한 명이 나서서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거라고 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치아가 성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오랜 노숙 생활로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치아 상태가 그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몰랐다. 하물며 거기
모인 모두가 그렇다니.


- 최준영의 《가난할 권리》 중에서 -


* 고기를 먹고 싶어도
씹을 수가 없어 못 먹는 상황,
기가 막히는 광경입니다. 어디 이뿐인가요.

배가 고파도 삼킬 수 없어 못 먹고, 걷고 싶어도
다리가 불편해서 못 걷고, 보고 싶어도, 듣고 싶어도,
하고 싶어도 끝내 못 하는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게다가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건강의 핵심은 치아에 있고, 치아의 건강은
현실의 삶에 있습니다. 자기 삶을 잘
관리해야 치아도 건강해집니다.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
“지금, 당신 곁에 누가 있나요?”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이 들려주는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하지 않은 이야기

《가난할 권리》는 거리의 인문학자로 20여년 노숙인과 함께 했던 최준영 작가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책이다. 픽션보다 더 픽션 같은 논픽션이다. 오랜 시간 거리에서 혹은 자활센터나 보호시설에서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다. 그들 대부분은 인생의 어느 문턱에서 주저앉아 길을 잃었거나 길을 잃은 채 홀로 남겨진 이들이다. 누구보다 그 막막함을 잘 아는 최준영 작가는 ‘인문학’이라는 거창한 주제를 들고 다가간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에게 곁을 내어주고, 어깨를 내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들의 고단하지만 핍진한 삶을 기록해 왔다. 그 흔적의 녹진함은 문학을 공부하는 이조차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가난할 권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난하다고 마음까지 가난하지 않다’는 말을 되새기게 한다. 거리의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 김 씨의 장례식에 온 사람들이 내놓은 꼬깃꼬깃한 130만원 앞에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다. 거리에서 혹여 누군가에게 빼앗길세라 바짓단 안쪽에 넣은 뒤 박음질을 해 두었던 돈, 생의 최후의 순간에 이르기 전에는 절대 꺼내 쓰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자기 몸의, 아니 세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돈이었을 것이라 짐작하고도 남는다. 가난하다는 형용사의 사전적 의미는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여 몸과 마음이 괴로운 상태에 있다”이다. 물질적인 궁핍으로 몸이 괴로운 건 부인할 수 없지만, 마음이 괴로운 건 상대적 감정이 크지 않을까. 그들의 이야기가 결코 가난하지 않은 이유이다.

저자(글) 최준영

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당선됐다. 2005년부터 노숙인, 미혼모, 재소자, 여성 가장, 자활 참여자, 어르신 등 가난한 이웃과 함께 삶의 인문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덕분에 ‘거리의 인문학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프란시스대학(최초 노숙인 인문학 과정) 교수를 거쳐 경희대 실천인문학센터에서 강의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전국을 떠돌며 인문학을 매개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2018년 수원에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을 꾸렸고, 2023년 사단법인 인문공동체 책고집으로 거듭났고, 이사장을 맡고 있다. 2023년 독서문화상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했다. 2004년부터 SBS라디오, 경기방송, dmbMBC, YTN, 국악방송 등에서 책소개 코너를 진행했다. 지은 책으로 『결핍의 힘』과 『최준영의 책고집』, 『결핍을 즐겨라』,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 쓴다』, 『책이 저를 살렸습니다』 등이 있다.

목차

  • 프롤로그 어디로 갈지 모르겠거든 일단 가라
    추천사

    1부 가난할 권리
    사람이다
    오만원
    한판 붙어 볼까?
    가난할 권리
    살아야 할 이유
    가난보다 더 서러운 ‘가난의 대물림’

    2부 희망의 인문학
    16년 만에 사랑을 고백하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사람답게 한번 살아 보려고요
    수녀님, 수녀님, 엄마 수녀님
    한국형 교도소 대학을 꿈꾸며
    가난을 대하는 태도들
    어르신 인문학,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3부 거리의 인문학자
    결핍과 좌절의 삶에서 공부하는 삶으로
    노숙인 인문학, 첫발을 떼다
    거지 교수에서 거리의 인문학자로
    거리의 인문학, 어디까지 왔나
    어느 마이너리티의 세 번째
    약속
    사의재에서 상념에 젖다
    나는 깨진다, 고로 나아간다

추천사

  • 여기엔 짐스러운 육체를 이끌고 포복하며 살아가는 고유명사들의 삶이 있고, 그들 곁에서 기어이 어떻게든 희망을 생산해 내려고 하는 한 인간의 행군이 있는데, 놀랍게도 이 이야기들은 누가 준 사람이고 도 받은 사람인지를 구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랑의 상호 감염과 그 뭉근한 확산의 드라마에 이른다.
  • 인간 근원의 문제를 탐구한다는 인문학이 매일 생존의 문제와 싸우는 이들에게 가당키나 할까. 하지만 그는 가난하다고 인간답게 살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가난해도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포기하지 말자고, 사회가 미리 규정지은 가난한 자의 운명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찾아가자고 사람들을 설득한다. (……) 가난하지만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은 공동체가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가난한 우리들의 마땅한 권리라고 지난 20년 그는 한결같이 거리에 서서 말했다.
  • 최준영 선생님을 만난 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거리의 인문학자로 널리 알려진 저자를 부르는 나만의 별명은 ‘책고집의 최고집’이다. 어려운 책고집 운영이 안타까워 수익도 좀 생각하시라고 해도 도대체 요지부동이다. 사람이 참 한결같다. (……) 어디로 갈지 모르겠거든 일단 가라고 하시지만 나는 안다. 최준영 선생님은 어디로 갈지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다.

출판사 서평

가난한 우리들의 마땅한 권리
가난할 권리

인문학이 누군가에게는 지식과 지혜의 방을 조금 넓혀주는 것일 수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그야말로 인간 근원을 탐구하는 깊은 학문일 수 있다. 하지만 반수연 소설가의 말처럼 매일 생존의 문제를 두고 싸워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문학이 가당키나 할까. 입댈 필요도 없이 그들에게 인문학은 사치요,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라 여겼다. 해서 늘 인문학 강의는 그럴싸한 이들을 위해 그럴싸한 장소에서 진행되어왔다.

최준영 작가는 그런 통념을 깨기 위해 낮은 곳으로 다가갔다. 그에게 거지 교수, 거리의 인문학자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문제아로 낙인찍힌 청소년, 어린 나이에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손가락질 받을까 두려워 자꾸만 웅크리고 숨어드는 미혼모,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자활센터에 모인 사람들 옆으로 갔다.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도 20년 동안 꿈쩍 않고 그들 곁을 지켰다. 포기하지 말자고, 가난하지만 우리도 인간답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가난한 우리들의 마땅한 권리라고 말하면서.

어디로 갈지 모르겠거든 일단 가라

지난 9월 최준영 작가는 제29회 독서문화진흥 유공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대통령상 후보에 올랐고,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거리의 인문학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는 올해 마침내 전국 12개 시설에서 동시에 노숙인 인문학 강의를 하게 되었다. 더디지만 인식의 변화가 조금은 일어나고 있다. 혹여 다시 뒷걸음질할 수도 있다, 그러나 늘 깨지고 깨진 덕분에 최준영 작가에겐 누구보다 든든한 맷집이 생겼다. 길을 잃고 헤매더라도, 혹은 어디를 가더라도 최준영 작가는 일단 앞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미련할 정도로 묵묵히 쌓아 올린 그의 산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음을 확신한다.
  리뷰  pm****** #가난할권리 #최준영 #책고래 #

#최준영의낮은곳의인문학
이 책은 읽고 기록 남기기가 참 힘들다.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힘든 일을 하는 분...응원하는 의미로 책을 샀지만.
어떻게 이렇게 아무런 댓가없이 낮은 곳에서 사람을 포용하고 배려할 수 있는지. 진짜 존경스럽다.

저자는 수원에서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을 운영하며 2005년부터 노숙인, 미혼모, 재소자, 여성 가장, 자활 참여자, 어르신 등 가난한 이웃과 함께 삶의 인문학을 이야기하고 있는 분으로 그간의 경험을 담고 앞으로의 희망을 밝히고 있다.

안나의집 김하종 신부님은 노숙자들에게 밥 해서 먹이고,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을 보듬어 안는 자세로 사랑을 실천하고, 최준영 샘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어 희망의 불꽃을 댕긴다. 그에 따르면 노숙인은 집이 없고 직장을 잃고 건강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없는 사람'이다. 저마다의 이유로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이다. 그가 노숙인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곁이 되어 주는 일이다. 당신에게도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당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확인시켜 주는 일이다. 그들이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어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서다.(p14)

최준영 샘이 만난 수많은 사람들, 해피엔딩도 있고 새드엔딩도 있지만, 부디 스스로의 권리를 되찾고 힘차게 일어서기를. 응원합니다. 모두들.
   sp******* 가난이라는 사회적 인식은 어떠한가요? 가난은 결핍이며, 남들처럼 살지 못하는 차별이자, 게으르고 능력이 없다는 낙인과도 같습니다. 빌 게이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죄가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당신 잘못이라고. 마치 가난하게 사는 것이 개인의 탓인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누가 가난하게 살고 싶어할까요? 이 책은 가난할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난하게라도 '살아갈 수 있는 권리' 말이죠.

'거리의 인문학자' 라 불리는 저자 최준영은 상록수의 집 야학학교에서 고등과정을 마치고 이후 노숙인, 탈학교 학생, 고아원 아이들, 한부모가정 여성들, 교도소 수감자 등 소외된 계층과 이웃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고 있으며, 2018년에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을 설립하여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는 노숙인을 좀 다르게 정의하는데요. 보통 노숙인이라하면 돈, 직업, 집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도움을 줄 사람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들을 세상과 연결시켜주고 사람의 온정을 나누어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역할이라고 언급합니다. 누군가에게 인문학은 그저 교양과목에 그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드리우는 한줄기의 빛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 책은 그가 20여년간 진행했던 강연을 통해 인연을 맺은 이들과의 에피소드를 들려줍니다. 매 이야기를 읽을 때 마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불쌍하다, 안타깝다라는 동정과 연민의 마음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한 개인의 힘으로 시작하여 많은 이들이 뜻을 함께함으로써,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고립된 이들이 사람을 다시 믿게 되고 세상에 다시 나갈 용기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에, 왜 지자체나 정부가 앞장서서 나서지 않는지 아쉬움도 느꼈어요. 전쟁 중인 나라의 재건과 복원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대겠다면서 왜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과 어려움에는 공감하지 않으며 도리어 예산을 삭감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가난은 이제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문제라는 인식이 팽배하고 있습니다. 기본소득도 더이상 어불성설이지만은 않죠. 돈과 물질의 가치가 사람의 가치를 넘어서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얻는 대신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람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시대에 과연 풍요롭다고 해서 행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복지를 실천하는 것이 과연 지레 겁먹고 회피해야 할 만큼 시간과 비용과 노력이 많이 드는 것일까요? 그저 한 사람이라도 소외된 이웃에 대한 관심부터 시작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들과 관계를 계속 이어가려는 저자, 그리고 그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의 노력이 있기에 희망을 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부쩍 쌀쌀해진 날씨라 그런지 에피소드에 더욱 몰입되고 쓸쓸함을 느꼈지만, 한편으로 오랜만에 사람의 온정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꼭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bh****  앉아서 기다리는 복지여서는 안 된다

이 책<가난할 권리>의 지은이 최준영은 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당선됐다. 2005년부터 노숙인, 미혼모, 재소자, 여성 가장, 자활참여자 등과 함께 삶의 인문학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는 ‘거리의 인문학자’라는 별호를 얻기도 했다.

성프란시스대학(노숙자 인문학 과정)에서 가르치기도, 아무튼 그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 귀담아들어야 할 이야기다. 볕이 들지 않는 곳에서 누구의 관심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패배자요 시대와 이 사회의 악, 처리되어야 할 쓰레기 취급을 받는 이들에게도 권리는 있다. 이른바 가난할 권리다. 즉, 누구든 인간의 존엄성과 그에 걸맞은 인간의 권리라는 게 있다는 말이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이 말의 존엄함을 이 책에 담았다. “넘어진 자는 반드시 바닥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성프란스시대학)

이 책의 구성은 3부로, 1부는 가난할 권리, 가난보다 더 서러운 “가난의 대물림”을 이야기한다. 2부는 희망의 인문학, 3부는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의 이야기를 담았다.

복지는 그저 앉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복지여서는 안 된다. 동정이 아닌 권리로서의 복지를 이해하도록 쉬지 않고 설명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살아가야 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가난할 권리’다.

거리의 인문학

노숙인, 사람이 없는 사람들, 빚쟁이에게 쫓길까 봐, 사업에 실패하고 부끄러워서, 저마다의 이유로 사람과의 관계가 다 끊어진 사람이 그들이다. 살 권리는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연결해주는 것이다. 관계망이 존재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어떻게 하든 삶의 활로를 찾고 행복을 추구한다. 거리의 인문학은 이들 노숙인의 곁이 되어 주는 일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음”을, 유튜브에 이런 영상이 올라왔다. 사회실험 영상, 노숙인에게 다가가는 한 남성, 자기 동생이 지금 중병을 얻어 병원에 있는데 수술을 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그러자 노숙인은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어디론가 갔다가 다시 온다. 그리고 한 남성에게 돈을 건넨다. 내가 모아놓은 돈은 이것밖에 없지만, 수술비에 보태쓰라고. 남성은 웃으면서 실험 영상을 찍는 중이었다고, 당신의 착한 마음에 보상이라며 수백 달러를 그의 손에 쥐여준다.

노숙인은 삶을 포기하고 마구잡이로 닥치는대로 살아가는 미래 희망이 없는 하루살이 인생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할 뿐이다. 일자리를 얻지 못할 뿐이다. 아직 바닥을 짚고 일어설 결심이 서지 않았을 뿐이다. 외형을 보고 판단하지 말라. 차별과 편견, 혐오는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모습이다.

우리 시대,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안의 편견, 암묵적 편견에서 벗어나자고, 노숙인 등 우리 사회가 불가촉천민으로 밀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달라고, 그들도 때 빼고 광내고 말쑥하게 차려입으면 우리 이웃이라고, 이들이 누군가를 대상으로 사기 치려고 의도적으로 이렇게 위장할 마음이 없기에, 거꾸로 이들은 사회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건 역설 아닌가,

보육원에서 만난 꼬마 시인 이야기 ? 오만 원-

보육원에 찾아온 사람들이 아이들 손에 쥐여주고 간 돈들, 보육원 아이들은 개 한 마리를 산다. 그 개 이름은 10개도 넘는다. 초등학생인 꼬마 시인의 시, “오만 원” 덕분에 개 이름은 오만원이 됐다. 나는 집에 가기 싫다'로 시작한 시는 이젠 집에 오는 게 즐거워졌다. 오만원이 생겼기 때문이다. 오만 원 주고 샀으니까 이름이 오만원이다. 나는 오만원이 좋다. 나를 마중 나오고 같이 산에도 다닌다. 친구들도 나를 부러워한다. 나는 이제 외롭지 않다. 겁이 나지도 않는다. 나에겐 오만원이 있기 때문이다. 오만원은 엄마나 마찬가지다.

가난할 권리, 인간의 권리

지은이가 지역 자활센터에서 인문학 강좌를 하던 때의 일, 매월 1만 원씩 강좌가 끝나면 수학여행 가기로 했다. 그때 수해 속보와 함께 어이없는 소식이, 해당 지자체장이 골프를 쳤다고, 해외여행에 나섰다고, 과연 누가 부자인가?

성장 이데올로기 국민은 국가의 주체로 여기지 않는다. 국민은 그저 개조의 대상이거나 소모적 수단일 뿐이다. 국민이면서 주체가 아니었던 터라 성장의 과실은 고스란히 소수의 권력층과 그에 편승한 기업들의 차지가 되고, 국민 일반은 철저히 소외됐다. 산업화가 낳은 병리가 소외이며, 가난과 불운과 불행의 구조화 혹은 내면화로 이어졌다. 이제 국민은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알아서 만들어 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국민은 선진국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게 됐다. 알아서 제 밥벌이를 못 하는 국민은 국민의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게 없으니.

지은이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너무 상식적인 너무 형식적인, 너무 무식한, 너무 관료적인. 너무 외형적인, 난 “복지”대상자라고, 말끔하게 차려입고 자신의 사정을 구구절절 말하는 사람은 그 말이 진실이든 뭐든 우선 조치를 해주겠노라 하지만, 구질구질한 차림에 냄새라도 풍기며 복지지원을 신청하면, 힘든 사람 코스플레이를 하는 게 아닌가, 의심하기조차, 이게 어찌 된 현상인가, 복지는 찾아 나서는 것이다, 앉아서 기다리는 게 복지가 아니라는 말만 확실히 해두자.

거리의 사람들, 사람이 없는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관계를 원한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응원해주면 함께 헤쳐나갈 용기와 격려를 해줄 이웃이 필요하다. 동정이 필요한 게 아니리라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그런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ok***** 인문학의 핵은 '울음'이다. 울 줄 알고, 우는 이를 보면 다가가 보듬고 다독일 줄 알아야 '참사람'이다. 울음이란 '소통'의 원초적 형태다. 이런 울음과 소통의 자세를 적극 실천하는 이가 휴머니스트가 아닐까. 다만 작은 울음과 작은 소통, 큰 울음과 큰 소통의 차가 있는데, 이런 차이는 공명판이라 할 수 있는 인격의 그릇 크기에 따른 것이다. 조선의 대문호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요동의 너른 벌판을 조망하면서 한번 크게 울어도 좋을 자리라고 한 대목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나는 울보다. 양 쪽에 눈물점이 나 있는 그런 울보다.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이 쓴 『가난할 권리』(책고래, 2023)를 보면서 세 번 울었다. 책은 20여년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했던 저자의 감상과 의식을 나름 절제된 언어로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문사철로 대변되는 인문학을 우승 트로피처럼 과시하는 이도 있고, 맛동산 같은 소풍용 간식처럼 가끔가다 챙기는 이도 있고, 아무 쓸모도 없다며 개무시하는 이도 있다. 인문학을 소비하는 행태가 다양하듯, 인문학의 정의도 다양하다.



"삶의 의미를 궁구한다는 일반적인 정의에서부터 우주의 질서를 탐구하는 것, 시민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덕목을 일깨우는 것, 사물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기 위한 학구적 태도, 생명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학문이라는 정의가 있다."(195쪽)



그런데 노숙인 등 소외 계층을 대상으로 한 '거리의 인문학'은 그 정의가 남다르다. 거리의 인문학은 '사람을 알기 위한 공부'다. "사람에 대한 새로운 이해, 사람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거리의 인문학은 노숙인으로 시작해, 자활 참여자, 재소자, 여성 가장, 어르신, 탈학교 청소년, 미혼모, 가난한 어르신 등 소외 계층 전반을 아우른다. 또한 기업체 CEO, 임직원, 주부, 공직자 등 사회 전역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고 한다. '거지 교수'라고도 불린 저자는 거리의 인문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거리의 인문학이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소통이다. 사람과 사람의 소통, 개인과 집단의 소통, 시민과 사회의 소통, 나아가 피상의 나와 내면의 나와의 소통. 거리의 인문학에서 소통의 방법으로 채택한 것이 독서와 글쓰기였다.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과 소통할 기회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200쪽)



거리의 인문학을 관통하면 현실이 보인다. 이젠 '울보'인 게 전혀 부끄럽지 않다. 궁극의 '현타' 를 겪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기에.
ks****** 우리에게 거리의 인문학자라로 알려진 저자가 만났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속에 인문학이 결국 사람에 관한 학문이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으로 거창하지않더라도 우리의 일상에서 인문학을 통해 변화된 삶을 경험할수 있음을 일깨우는 책이었어요.

가난하다고해서 행복할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죠. 우리 사회에는 복지 사각지대에 처한 사람들이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고 뉴스화 되는 경우가 요즘 들어 부쩍 늘고있습니다. 노숙자 문제도 심각하고 쪽방촌에 사는 노인들도 많고. 경제적으로 우리가 선진국에 가입했다고는 하지만 복지 측면에서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고 소외된 사람들을 어떻게 끌어안고 함께 가야할지를 고민해야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길거리에서 우리가 자주 만나게된 빅이슈라는 잡지의 창간에도 저자가 지대한 역할을 했더라구요. 저자는 소외된 탈학교 학생들, 교도수 수감자, 노숙자등과 소통하면서 그들이 마음을 열고 변화된 삶을 살수있도록 따뜻한 격려를 지금도 보내고 있고 노숙인 인문학의 전국화도 꼭 이루어내기를 응원하게 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행복한 삶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수 있죠. 빈부에 상관없이 권력의 유무에 상관없이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라며 저자가 전하는 이야기를 읽으면 눈시울이 붉어지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더불어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더 따뜻한 관심을 가져야겠고 그들 역시 행복하길 원하는 이웃임을 잊지말아야할 것 같아요.

도서관에서만 하는 공부가 공부는 아니고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인생 역시 더 큰 공부임도 생각해 볼수 있는 책이었어요.

ti******* 올해로 꼭 스무 살을 맞이한 거리의 인문학을 기념으로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 교수가
그동안 강의에서 만났던 노숙인과 미혼모, 어르신, 교도소 수형자들에게 바치는 책이다.
모든 인간은 공포와 궁핍으로부터 해방될 권리가 있다,
넘어진 자는 반드시 바닥을 짚고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20여 년을 지나며
저자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았는데 사랑의 상호 감염이라는 찬사의 의미가 이해되었다.

노숙인 인문학 MT에서 저자가 구운 돼지갈비를 아무도 먹지 않아 서운해할 뻔했는데
그 이유가 치아가 성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라니 마음이 아팠다.
신체 중에서 가난이 가장 먼저 가장 심각하게 치고 들어오는 부위가 바로 치아란다.
치아 질환은 대체로 의료보험 적용이 안 되고 치료에 큰 액수가 되기 때문에
치료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방치되기 때문이다.

이가 아프면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이 축나고, 힘듦을 잠시 잊기 위해
안주 없이 깡소주를 마시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깡소주가 안주 값이 없어서인 줄만 알았지 이가 성하지 못해서 그런 줄은 몰랐다.
노숙인이 16년 만에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게 해주는 게 인문학의 놀라운 힘이었다.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게 하고 표현하지 않았던 말을 표현하게 하고
마음의 근육을 단단하게 하고, 다시 희망의 삶을 살게 하는 것.
그럼에도 길 위의 인문학을 만난 이들이 모두 해피엔딩을 맞는 건 아니었다.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를 착실히 하는 듯 보였던 사람도
거리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하는 걸 보니, 하루라도 더 빨리
인문학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어른들의 무관심에 방치된 아이는 거리의 삶을 살아갈 확률이 높다.
그렇지만 그렇게 자란 어른이라도 거리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는 분들이 계시고, 인문학을 만난 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걸 보니 감동적이었다.

여러 연구에서도 어려운 환경에서도 제대로 성장한 아이들은
예외 없이 그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 주고받아 주는 어른이
적어도 한 명은 아이 곁에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연민, 관심, 애정 등 어떤 형태가 되었든 미약한 작은 관심은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기꺼이 고통을 감내해 내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손을 내밀어 주고 인문학과 만날 기회를 만난 사람들의 삶이 바뀌는 것을
보니,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소외되고 방치된 아이들이 생기지 않도록
전 사회적인 관심과 대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성격과 정체성은 유전자나 양육환경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결정된다.
나도 누군가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삶에 개입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영향을 끼칠 수 있게 잘 살아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저자가 좌절과 결핍의 시기, 심하게 흔들릴 때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마라톤같이 스스로가 지치지 않도록 공부에 대한 강약 조절과 리듬 조절을 하면서
여전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 본받을 만하다.

전문가 바보가 되어 자신의 전문 영역에만 갇혀 세상의 보편적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한 종류의 나무만 심어서는 숲을 이루지 못한다는 저자의 조언이 기억에 남는다.
혼자 하는 공부는 개인적 성취에 머물지만, 함께 하는 공부는 문명적 성취가 된다.
모든 사람들은 결핍이 있다. 거리의 삶을 사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적 결핍, 정서적 결핍, 연륜과 경험의 결핍, 젊음의 결핍 등
 안의 결핍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이 달라짐을 잊지 말아야겠다.
'인'은 충만한데 '연'이 닿지 않아 일이 풀리지 않는 일은 없다.

나의 부족함을 생각하지 않고 거만하면 진정한 연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걷어차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 + 간'의 의미를 알고, 사람들과 소통하며 나의 내면과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하게 만드는 만드는 책이었다.

 

rk****** 회사와 집만 들락거리며 일과 씨름하던 시절, 우연히 들은 ‘향유’(享有)라는 단어에 울컥한 적이 있었다. 멍하니 서서 거의 울뻔했다. 술 한잔 걸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고, 자유와 혜택이라는 ‘권리’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일이 나를 향유 했고, 운명이 나를 누렸다. 안 되겠다 싶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다만 읽고 쓰는 모양새는 여전히 씨름하는 형국이었고, 상대가 일에서 나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싸우지 말라고 한다. 싸워서는 답이 안 나온다는 얘기다. 특히 자기 자신과 싸움이 그렇다. 싸울 때는 상대만 드러나고 다른 풍경들은 지워진다. 그렇게 앞에 보이는 한 놈만 팬다는 식의 싸움은 방식은 쉬울지 몰라도 중국에는 자신을 테두리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느 순간, 다른 풍경은 죄다 지우고 일만 집중하는 삶이 쉬웠을 테고, 그나마 가장 상대하기 쉬운 나를 붙들고 싸우는 것이 수월할 터였다. 나는 ‘나’라는 껍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싸움에서 자주 졌다.

무심히 지워 낼 때는 무엇을 지웠는지 알지 못하지만, 무엇을 지웠는지 알았을 때는 되돌리기 어려운 게 우리네 삶이다. 한사코 삭제했던 풍경들에는 한사코 지켜내야 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나는 하나의 일도 아니고, 하나의 지위도 아니고, 온전히 나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관계하는 수많은 목소리의 합이 나일 것이다. 우리가 지운 목소리는 자기가 아주 특별하니 챙겨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지운 풍경들도 이러할 진데 우리가, 우리 사회가 지운 풍경들은 또 어떤 모습일까?

최준영의 『가난할 권리』에는 우리 일상에서 삭제된 풍경들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거리의 삶을 살았던 김 씨, 대학 진학을 꿈꾸는 탈학교 청소년 윤수, 보육원 꼬마 시인, 자활 여성 가장, 인문학을 알고 나서 16년 만에 처음으로 아내에게 ‘사랑한다’ 말했던 노숙인 임 씨, 자신을 찾기 위해 전국에 노숙인지원센터를 뒤졌던 딸을 둔 아버지, 키가 엄마보다 커지면서 어머니라고 불렀다던 수형인, 이 나이도 꿈이 있기에 강의에 오신 어르신들, 그리고 아기를 키우는 어린 미혼모의 꿈과 눈물.

이들이 펼쳐내는 이야기들은 절대 가난하지 않다. 이들은 서로 안고 안기면서 사랑을 키워나간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사랑은 다른 목적이나 의도 없이 순수하다. 진심이 느껴진다. 책에 나오는 익명의 사람들은 어디쯤에서 다시 흩어지고 단절된다. 그리고 또 어디쯤에서 다시 이어진다.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책에 담긴 풍경에는 사회의 약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도 속살 그대로 담겨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복지’라는 이름을 가진 가상 시스템을 만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죄다 복지에게 맡긴 채 외면하는 중이다. 나눔마저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차별을 두려고 하고, 사회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시스템 안에서만 도와주려고 또 다른 벽을 세운다. 사람의 따뜻한 손길이 담기지 않는 복지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지우는 창백한 도구로 변질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생명에는 높고 낮음이라는 계층적 사다리가 없다.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기 위해서는 계층적 사고가 아니라 관계망식 사고가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이 지은 작은 관계망이, 들고 나는 나눔이 그리 대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관계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겐 모든 것일 수 있다. 관계를 맺는 순간 사람은 누구나 소중한 존재가 된다. 부적합자라는 단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나’는 중요한 존재다. 계층적인 시선으로 보면 알 수 없지만, 관계망이 수 놓은 수많은 공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피를 돌게 하는 존재다.

최준영의 『가난할 권리』는 우리가 그동안 무엇을 지웠는지, 그리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알려준다. 바로 ‘사람의 가치’다.

 

sa****** 인문학책추천♡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가난할 권리> 결핍이 쏘아올린 기적의 인문학

사람이 사는 것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고, 스스로를 위하여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마음곁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음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사람들 사이에 사랑과 정을 나누지 못하고 산다면 삶의 의미를 잃고 사는 것이 된다.


<가난할 권리>최준영의 낮은 곳의 인문학
결국은 사람이다. 사람이 남는다

최준영 작가의 별명은 '거지교수'부터 시작해서 '거리의 인문학자'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핍으로 시작했지만 꿈과 희망을 품었기에 <가난할 권리>에서 마음껏 쏟아낸 숱한 사연들이 생겼으리라.
이 책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빌어 '사람 최준영'의 녹진한 사람냄새를 풍긴다.
그야말로 결핍이 쏘아올린 기적의 인문학이 폭죽처럼 빛을 발하는 중이다

궁핍함 속에서 더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을 모른척 할 수 없는 선한 심지때문에 홀로 감당해야 했던 그의 삶, 남들이 가지 않는 진흙같은 길에 발을 성큼 담그는 성정 때문에 겪었을 경제적인 고통, 지름길도 있었겠으나 언제나 사람이 있는 곳을 돌고 도는 에움길의 고요함, 수많은 외로움의 시간들이 진솔하고 뭉근하게 다가온다.

열심히 일하던 가장들이 일자리를 잃고 가정을 등지고 거리에 나서 노숙인이 되거나, 성숙하지 못한 청춘의 덫에 걸려 사회로 나오는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탈선 청소년, 미혼모들에게 인문학을 오랜시간 전해 온 최준영 작가님.
<가난할 권리> 이야기들은 지금도 어디선가 일어나는, 누군가 겪고있는 현재진행형의 사연들이다.
아픈 속내를 작가님 특유의 눙치는 말로 풀어냈지만 소외된 이들에게 마음 곁을 기꺼이 내어주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보기 드물게 반짝이는 눈물처럼 소중한 사람의 손길이기에 낮은 곳의 인문학<가난할 권리> 이야기들이 따스한 동화처럼 다가오는 것일까.

말로 꺼낼 수 없는 내면의 슬픔과, 고통받는 사회로부터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들과의 소통은 쉽지 않다. 학교에 부적응하고 힘을 얻지못하는 학생들과 문제있는 아이들을 모아놓은 곳에서 강의를 하면서 겪은 이야기, 사회에 부적응하고 마음을 닫은 아이들을 다독인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기에 더욱 어렵다.

버텼다.버티고 버텨야만했다. 집나간 아이가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부모의 심정으로, 한껏 싸우고 토라진 아이들이 마음 돌릴 때까지 참아주는 삼촌의 마음으로, 마음 터놓을 수 있는 친구의 마음으로_<가난할 권리> 중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는 나만 아프고 힘든게 아니었다는 안도감이 위로가 되기도하고 상처를 쉽게 꺼내지 못하고 두려운 사람들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들어주는 귀가 되어주는 것 또한 인문학의 실천이었다


5~6년전 북수원 도서관 인문학 강의에서 최준영 작가님을 처음 만났다. 드러내고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처지에 홀로 딸아이를 키우면서 버텨낼 힘이 바닥을 치고 있을 즈음, 작가님의 강의를 통해 내가 접해보지 못한 책에서 나오는 방대한 지식의 향연이 나를 사로 잡았다.
도서관 밴드에 글을 쓰기 시작하고 댓글로 첨삭해 주시면서 인연이 시작되어 <책고집>을 설립하는 일에 동참하게 된 것은 나를 지금까지 단단하게 성장시킨 키워드이다

[책고집]은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 작가님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수원 북문 행궁동에 만든 작은 도서관이자 인문공동체로서, 나에게는 인문학의 둥지와 같은 곳이다
언제나 그 곳에 가면 만날 수 있는 분이 최고집, 바로 최준영 작가님이다.

많은 작가들을 만나 경험하지 못한 삶의 여정을 함께 했고, 은유작가의 첫 강의를 듣고나서 글쓰기를 위한 꿈을 위한 도전으로 곧바로 블로그를 개설했으니, 책고집 최고집 최준영 작가님에게 조금은 인문학의 빚을 진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누구나 어릴 때 잠시나마 간직했던 소중한 꿈이 있다. 사느라 바빠서 펼쳐보지 못한 꿈, '사랑한다'는 고백을 꺼내놓고 기뻐하는 사람들,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던 사람들, 글을 마주하고 인문학을 들으면서 자신의 삶을 마주하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가난하기에 찾아내야 할 것들, 잃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스며들게 하는 것은 한결같이 변함없는 진심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아파본 사람, 울어본 사람, 삶의 바닥에서 무너진 사람, 그들과 함께 견져 올리는 행복과 희망의 소리를 듣고 나누는 글이 빼곡하게 살아있다.
결핍이 쏘아올린 기적의 인문학이 <가난할 권리>가 아닐까.

"세상에는 욕망할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살아가야 할 권리가 있다. 가난할 권리다"_ <가난할 권리>중에서

밥을 지어도 뜸이 들어야 깊은 맛을 낸다.
최준영 작가<가난할 권리>에서 읽었듯이 밥은 이미 차고 넘치도록 지었다.
오랜 시간만큼 뜸도 충분히 들였다
이제 맛나게 뜸 들인 밥으로 사람이 고픈이들의 배를 채우고 마음의 허기와 생각을 풍성하게 채워질 일만 남았다.

공부하는 노동자, 최준영 작가는 고집있게 지켜온 인문학 강의를 통해 세번째 꿈을 이루고 싶어한다
교도소 대학 설립이 그가 이루고 싶은 또 하나의 희망이다.
최준영 작가님의 결핍이 쏘아올린 기적의 인문학, 사람의 손을 잡는 연대가 점차 거리를 지나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길까지 번져나가기를 응원한다.

"노동이 곧 공부이고, 공부가 다시 노동이 되는 삶, 지나온 나의 삶이 그러했고 앞으로의 삶 또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_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가난할 권리>

ql******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살아가야 할 권리가 있다. 가난한 권리다.”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의 책 《가난할 권리》.

하나. 나에게
인문학 ;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다시 말하자면 사람과 사람이 만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 다시 말을 추려보면 사람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가난한 권리》의 도입부를 수놓은 김 씨의 이야기를 보면서 인문학이란 무엇이며 인문학이 가진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나도 인문학의 한 자락을 잡고 2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온 사람이건만 과연 나의 인문학에는 사람이 있는가 반문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질문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계속 반복되었다.
이제 해답을 찾아야겠다. 최준영 작가는 거리에서, 사람들 곁에서 그 답을 찾았다. 나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두울. 당신에게
A야.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에 무엇이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두고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이 역시 다시 생각해보자. 그래서 진정으로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인지 답을 찾아보자. 난 그러고 싶어졌다.

세엣. 그대들에게
그대들 중 지금 시대에 인문학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또 무엇인지 고민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 책을 권하겠습니다. 이 책에는 인문학이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가 사람과의 이야기란 형태로 쓰여있습니다. 얽힌 사연과 적힌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분명 답이 보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wn******* 우리는 가난에 대해 돈이 없고 생활력이 떨어지는 이미지를 그리면서, 그들을 동정하고 저들처럼은 되지 말아야지와 같은 마음 속에 다짐을 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에 대해 개인적인 문제를 왜 국가가 도와주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품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할 권리를 가지고 있을까요? 그러한 생각을 이 책에서 읽으면서 떠올려 줍니다.

 

이 책의 저자인 최준영이라는 사람은 거리의 가난할 사람, 이웃처럼, 거리에서의 가난한 사람을 주제로 하는 인문학을 이야기하면서, '거리의 인문학자'라는 별명과 함께 이 책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의 인문관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가난할 권리라고 짓을 저자는 가난할 사람의 마지막의 보루인 복지가 있으며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권리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노숙자라고 하였을 때 부정적인 이미지가 그려져 있을 때 저자는 그에게 사람과의 관계를 알려주며, 사람으로써 또,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읽으면서, 단순히 개념적인 이야기보다는 사람에 대한 사례들을 보여주면서, 사람으로써 가져야 하는 감정, 생각을 심어주기 마련이다. 읽다보면서 어떤 부분이 인상적일 수 있고, 때로는 눈물이 날 수도 있다.

 

 



사람이다. 거리의 삶을 산다고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어서 사람이 죽으면 슬퍼하고 울고 괴로워하고 힘들어한다.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해 어쩌면 미리 겪은 자신의 죽음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돈, 삶의 마지막 비상금을 기꺼이 꺼내서 동료 노숙인의 노잣돈으로 내어놓는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다.

34쪽,

이러한 말처럼, 인간은 인간의 괴로움이 편치 보지는 못한다는 말처럼 그들의 아픔이나 고통에 공감하고 토닥일 수 있는 존재라고 마음 속에 새기면서, 읽어나가면 삶의 의미를 알게 되면서, 사람임을 되새기게 된다.

여러 사례나 문구들이 자신에게 망치질을 하며 수련해주게 하는 책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책을 정리하게 된다면 10점 만점에 10점이고, 가난할 사람 측면이나 관점으로 보여져 있어도, 결론은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유를 제시한 것과 같다. 이러한 책을 거부하는 것은 사람임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한가를 반문하게 하는 인문학이다.

 

p.98

인문학은 16년 만에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하게 해 주는 학문이었다. 인문학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게 하고, 표현하지 않았던 말을 표현하게 하는 것이었다. 생각의 힘을 키우고, 마음의 근육을 단단하게 해 주고, 다시 희망의 삶을 살도록 해 주는 것이 인문학이었다.

p.119~120

살다 보면 누구나 고난을 겪고 난관에 부닥치게 마련이다. 산다는 건 어쩌면 수많은 도전과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일지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인생의 모든 역경을 이겨낼 잠재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게 바로 회복탄력성이며, 그것은 인간관계를 통해 축적된 힘이다.

오랜만에 사람 향기 풍기는 진국의 책을 만났다.

삶을 더욱 경건하고 감사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kk******정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건 죽음을 다짐한 순간,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존재론적 상실감, 삶의 허무와 고통을 생각하는 대신 월세와 공과금을 떠올리고 있는 그들의 착하고 순한 마음이다.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이란 늘 그런 식이다. 쉽사리 어려움을 드러내기 보다는 혹여 누군가에게 폐를 끼칠까 염려한다. (-64-)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그런 자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으로서의 염치마저 내려놓으면 그건 사람도 아니라는 자학적 도덕률을 품고 있다. 그런 마음은 결코 우연히 형성된 것이 아니다. 가난을 내면화하고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인식하도록 강요한 사회 분위가가 그것을 정당화해 주는 개발주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씁쓸한 풍경이다. (-65-)

"읽기와 쓰기가 안 되는 어르신이 계셧어요. 읽기 부분은 대신 해 드렸는데 쓰기는 직접 하셔야 했어요. 민망해하실 줄 알았는데 끝까지 함께해 주셨어요. 글을 쓴다기보다 글자 모양을 그리는 방식으로 참여하신 거죠. 뭉클했어요."
(-158-)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생각이 없거나 꿈이 없는 건 아니다. 당연히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다. 그 단순하고도 간단한 사실을 망각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자주 본다. 가난한 이웃과 노숙인, 어르신, 미혼모, 탈학교 청소년, 한부모 여성 가장, 교도소에 다녀온 사람, 보육원 아이들은 그저 무시하고 멸시하고 사람 취급 안 해도 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183-)
사람에게는 누구나 결핍이 있다.결핍은 모든 사람의 문제지 거리의 삶을 사는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 결핍에 시달린다. 부자라고 해서 결핍이 없을리 없다. 돈에 대한 집착이 그 외의 삶의 가치를 압도하는 데서 오는 정서적 결핍 역시 경제적 결핍 못지 않은 심각한 결핍이다. 나이가 많은 분은 나이 그 자체가 결핍일 테고, 젊은이에게는 연륜과 경험이 결핍됐다. (-199-)
결핍과 열등감이라는 개념이 생성되면서, 인간의 삶에 삶의 가치와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행복한 삶을 우선하고,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인간의 행위가 반영될 수 있었다.가난은 돈에 대한 결핍과 열등감에서 시작된다. 궁핍하거나, 기아를 몸으로 느껴야 하는 절대적 가난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으며,상대적 가난이 남아 있다. 그건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았던 과거의 삶에서 탈피하고, 대한민국 전체에 보편적인 사회복지가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물질적 결핍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정서적 결핍은 항상 존재하고 있다.가난한 사람이 갑자기 부자가 되어서,물질적 결핍에서 벗어났지만, 허무함,정서적 고통으로 인한 정서적 결핍이 존재하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대한 만족감이 채워지지 않고 잇었다.

문제는 그 이후다. 인간의 삶에 더 나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불행한 삶,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는 현실이 눈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우울과 허무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서로 연대하지 않고, 급변하는 시대적 변화에 대해서, 스스로 극복하려는 의지가 사라지고 있다. 현실과 이상의 간격이 더 넓어지고 있으며, 가난에 대해 현실적 괴리감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가난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닌 사회가 만들어낸 개념이며, 밖에서 볼 때, 돈에 대해 자유로운 부자들이라 하더라도, 부자들 사이에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그들조차도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결핍과 열등감이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가하며,때로느 공감가지 않은 가난도 존재한다. 정서적 결핍이 가난이라는 주제,인문학과 엮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