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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연중 제27주일>(10.8) -군인 주일-'울타리'는 '율법'이고, '탑'은 '성전'입니다.성실한 일꾼


<연중 제27주일>(10.8) -군인 주일-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마태21,38) 

성실한 일꾼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21,33-43)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의 악한 마음을 지적하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그들에게 들려주십니다.

'포도밭'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포도밭의 소작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입니다.
'울타리'는 '율법'이고, '탑'은 '성전'입니다.

그리고 '포도밭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보낸 종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위해 파견되어진 수많은 예언자들'입니다.
그리고 '포도밭 주인의 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다른 소작인들'은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믿는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인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가 이 복음을 듣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하나는, 선택되어짐(세례성사)이 구원의 절대적 보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의 선택과 그에 따른 합당한 열매(사랑실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스라엘의 거부(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박해)로 인해, 구원의 대상이 유다인들에게서 이방인들에게로 바뀌었듯이, 구원의 문은 올바른 믿음과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이들에게로 끊임없이  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밭 주인의 소작인들인 우리의 지금 모습은 어떠한가?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사명에 충실한 소작인들의 모습인지?

아니면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모습, 불충실한 소작인들의 모습은 아닌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성찰해 보는 하루, 그래서 조금 더 가까이 구원자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필리4,9)

(~ 예레 23,8)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7주간 월요일>(10.9)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10,25-37)은 '가장 큰 계명'에 대한 말씀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합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10,25)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10,26) 그가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에 대해 말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10,28)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10,29)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이 물음에 응답하신 것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10,30-37)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질문 안에 머물러 봅니다.

믿는 이들이 정말로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고 있는지?
믿는 이들이 정말로 영원한 생명을 최고의 목적으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그렇다면 지금보다는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바뀔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도 그를 피해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리는 사제나 레위인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큰 자비를 베풀어 진정한 이웃이 되어 준 '또 하나의 착한 사마리인들'이 여기저기에서 넘쳐 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신앙의 지식이 아니라,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단순하게 믿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제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   

(~ 예레 23,18)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7주간 화요일>(10.10)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10,42) 

'빼앗기지 않아야 할 하느님 사랑!' 

오늘 복음(루카10,38-42)은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그의 동생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시자, 두 여인이 바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바쁘고, 그의 언니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합니다. 마르타는 아마도 자기 집을 방문하신 예수님께 드릴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바빴을 것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를 두고 짜증을 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1-42) 

우리는 어제 복음인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이웃 사랑의 본질'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사랑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시작되며, 하느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사랑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분리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분리된 사랑은 공허하고 메마른 사랑으로 전락하기 쉽고, 그런 사랑은 죽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나열(순서)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이 먼저이고, 다음이 이웃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으로 대변되는 마르타의 모습'보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대변되는 마리아의 모습'을 더 마음에 두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아야 할 사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입니다.

(~ 예레 23,32)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7주간 수요일>(10.11)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11,1a) 

'기도의 본질!' 

오늘 복음(루카11,1-4)은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11,1b)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하시면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유일하고도 가장 완전한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이는 주님의 기도가 '하느님과의 대화'이며,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청원기도'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주님의 기도는 다섯 개의 청원기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바치고 있는 주님의 기도는 '일곱 개의 청원기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본 기도의 본질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대화인데, 오늘 복음 묵상은 이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대화의 두 가지 방법'에 대한 묵상입니다.

첫째, '솔직한 대화'입니다. 대화는 거짓과 가식이 없어야 합니다. 사랑과 신뢰가 크면 클 수록 진실된 대화,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갖고 대화를 합니다. 하느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렇게 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프면 아픈 마음으로, 기쁘면 기쁜 마음으로 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대화의 성숙도'입니다. 어린아이일 수록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기도의 모범'입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습관적으로 바치지 말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담아 바칩시다! 

(~ 예레 25,14)

*** '하느님 아버지와의 대화ㅡ

첫째, '솔직한 대화'입니다.  사랑과 신뢰가 크면 클 수록 진실된 대화,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갖고 대화를 합니다. 하느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렇게 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프면 아픈 마음으로, 기쁘면 기쁜 마음으로 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대화의 성숙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기도의 모범'입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온 마음과 정성을 담아 바칩시다! 

<연중 제27주간 목요일>(10.12)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11,9) 

'끊임없이 청하여라!'

오늘 복음(루카11,5-13)은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신 후에, 오늘 복음을 통해서 '왜' 또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은 언제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시기에 끈질기게 구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는 '기도하라.'는 말씀의 다른 표현들입니다. 그러니 '기도를 꾸준히 그리고 온 정성을 담아서 끈질기게 하면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뜻입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11,11-12)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1,13) 

'기도를 잘하고 있는가?'
'기도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신데, 기도하면서 내가 하느님이 되려고 하지는 않는지?'

리는 단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입니다.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주시는 하느님께 끊임없이 끈질지게 청할 뿐입니다.

지금 나의 기도가, 나의 청원기도가 올바른지를 한번 성찰해 보고, 기도하는 법, 청원기도를 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다시금 떠올려 보면서 '올바른 기도와 청원'을 통해 '성령'을 충만히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성령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성령께서 나를 구원으로 이끄시고,
나를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화답송)

(~ 예레 26,9)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우리는 단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입니다.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주시는 하느님께 끊임없이 끈질지게 청할 뿐입니다.

지금 나의 기도가, 나의 청원기도가 올바른지를 한번 성찰해 보고, 기도하는 법, 청원기도를 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다시금 떠올려 보면서 '올바른 기도와 청원'을 통해 '성령'을 충만히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성령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성령께서 나를 구원으로 이끄시고,
나를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화답송)
아멘 !

<연중 제27주간 금요일>(10.1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루카11,23) 

'예수님 편에 서자!'

오늘 복음(루카11,15-26)은 '예수님과 베엘제불에 대한 말씀'(15-23)과 되돌아오는 악령에 대한 말씀'(24-26)입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이에 대해 기뻐하기는 커녕, 군중 가운데 몇 사람은 예수님께 이런 악담을 퍼붓습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루카11,17.23) 

하느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에서, 그리고 예수님과 사탄 사이에서는 어느 누구도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수 없다는,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사탄과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사탄 편이든 예수님 편이든 어느 한쪽에 서야 합니다. 중립은 사탄 편을 드는 행위로 예수님 편에 서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편에 서자!'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에 의해 악령이 떠나갔다고 해서 너무 자만하거나 안심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루카11,26)

나는 어느 편인가?
나는 지금 깨어 있는가?

우리늘 분열시키는 악마는 늘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주위를 맴돌면서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1베드5,8 참조) 

정신차리고 늘 깨어있도록 합시다!

(~ 예레 27,5)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전쟁을 멈춰라!

  메주고리예 - 예언자 이반에게 하신 동정 마리아의 요청

  전쟁이 매우 가까워졌습니다!    모두를위한!
  상황이 심각해 중동에서 전쟁이 시작돼 전 세계로 확산된다.
  당신은 그것을 중지해야합니다.
  온 세상이 매 순간 기도해야 합니다!
  사제들은 교회의 문을 열고 사람들에게 묵주기도를 많이 하도록 권유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십시오.

  이 메시지를 전 세계에 보내고 무엇보다 실천해 보세요.

  매일 18시 30분, 세계 어디에서든 모든 것을 멈추고 성모송을 세 번 바쳐보세요!

  이 메시지가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고 기도가 시작되려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후 6시30븐 성모송 세번  모든것 멈추고 온마음으로 기도 하겠습니다. 

<연중 제27주간 토요일>(10.14)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 행복!'

오늘 복음(루카11,27-28)은 '참 행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놓여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11,27)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행복'을 언급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 행복!'

행복은 '모든 인간의 화두(話頭)'입니다. 모든 인간은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행복을 추구합니다. 행복해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짐으로써, 또 어떤 사람들은 더 높은 자리에 오름으로써, 행복함을 느낍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보편 행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이 인간의 보편 행복 안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 안에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영원한 행복을 믿고 희망하는 이들은 세상이 주는 행복에 근본을 두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 행복에 근본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 안에서도 행복을 찾지만, 보이지 않는 것 안에서도 행복을 찾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의 행복을 훨씬 뛰어 넘습니다.

모든 사람이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지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참 행복'을 추구합니다.

오늘 독서(요엘4,12-21)에서 요엘 예언자는 "주님의 날이 가까웠다." 라고 외치면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보다 더' 참 행복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 예레 29,3)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