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일>(10.1) -묵주기도 성월- "맏아들은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마태21,31) '생각을 바꾸자!' 오늘 복음(마태21,28-32)은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들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회개하지 않는 백성의 지도자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회개의 세례를 믿지 않은 백성의 지도자들의 불신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회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 곧 '하느님의 나라'라는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세리와 창녀들은 회개한 사람들의 표지'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세리와 창녀들은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회개의 세례를 믿고 회개했으며,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잘 받아들이면서 따랐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10월의 첫날인 오늘은 '성녀 소화데레사를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영명축일을 맞이한 자매님들! 축하드립니다. 10월은 '묵주기도 성월'이자, '전교의 달'입니다. 전교는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복음)를 전하는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부'입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를 성모님과 함께 묵상하는 기도'로써, '복음서 전체의 요약'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전하는 전교를 잘하려면 묵주기도를 잘(정성껏) 바쳐야 합니다. 돌아갑시다! 생각을 바꾸어 아버지의 뜻을 따른 맏아들처럼, 우리도 예수님께로 돌아갑시다! 돌아오는 이들을 기쁘게 맞이하십니다. (루카15,11-32 참조)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18,27-28) (~ 예레 11,23)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26주간 화요일>(10.3)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9,52) '배척 당하시는 예수님!' 오늘 복음(루카9,51-56)은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여정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한 여정이었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 공생활의 주 활동 무대로써, 그곳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고,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인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오늘 복음을 시작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여정의 종착지인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이 여정의 시작이 갈릴래아의 여정 때처럼 배척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갈릴래아에서는 희년이 선포된 후 곧바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셨는데, 예루살렘으로 향한 여정에서는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배척을 받으십니다. '배척 당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로부터, 백성의 지도자들로부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로부터, 그리고 유다인들이 상종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들로부터도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마침내는 수난과 죽음이라는 결정적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결정적 배척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결정적 배척을 통해서 우리가 결정적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배척이 우리에게는 기쁨이고 희망입니다. 오늘 독서는 구약성경에서 45권째 해당되는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이 예언서는 완전히 배척 당한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라는 배척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후의 이스라엘의 기쁨과 희망을 전하는 아름다운 예언(신탁)입니다.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이라는 배척 앞에서 좌절하지 않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화이팅! (~ 예레 15,12) 제일 좋아하는 티모테아 고모님 말씀ㅡ힘 사랑 절제의 영을 주셨다고 생각한답니다 좋아요 . 이 결정적 배척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결정적 배척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배척이 우리에게는 기쁨이고 희망입니다. 완전히 배척 당한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라는 배척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후의 이스라엘의 기쁨과 희망을 전하는 아름다운 예언(신탁)입니다.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이라는 배척 앞에서 좌절하지 않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화이팅! 팅!팅! 화이팅! |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 기념일>(10.4)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루카9,57) '겸손한 순종!' 오늘 복음(루카9,57-62)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째와 셋째 사람은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고, 둘째 사람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려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의 자녀가 되려는 사람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걱정을 버리고 철저하게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어렵습니다. 성당에 나와 미사 드리는 것도 어렵지만,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잘 따르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 따름의 결과가 이제와 영원한 부활이기에 우리는 인내로써 따름의 길을 걸어갑니다. 오늘은 회개한 이후 철저하게 예수님을 따랐던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이시고, 생태계의 주보성인이시며, 평화의 사도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큰 축일을 맞이한 프란치스칸 가족들과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형제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평화의 마을인 이태리 아씨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 그런 그에게 몇 번에 걸친 실패체험 후, 그는 나병 환자와의 결정적 만남(1205년 말)을 계기로 '완전한 회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왜 주인을 섬기지 않고 종을 섬기느냐? 아씨시로 돌아가라. 거기서 네가 할 일을 내가 알려 주겠다."(1205년 봄, 스뽈레토 계곡에서의 환시) "프란치스코야, 무너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다오."(1206년,성다미아노 성당에서 들었던 십자가 음성)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1208년, 포르치운쿨라성당 미사 때 들은 복음) 이후 프란치스코는 '완전한 회개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 예레 17,27)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26주간 목요일>(10.5)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 '봉사직!' 오늘 복음(루카10,1-12)은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 '봉사직!' 우리는 수확할 밭의 주인이신 주님으로부터 뽑힌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왕직, 곧 봉사직'입니다. 특히 본당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일꾼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요즘 본당 안에서 사목자에게 주어진 세 가지의 복이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 하나가 '사목회장과 사목위원들 구성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복'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요즘은 예전과 다르게 그리스도의 왕직인 봉사직의 일꾼들을 정하는 것이 어렵고, 이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서 우리를 도구로 부르십니다. 이는 내가 능력이 뛰어나고 잘나서 부르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봉사직의 첫 번째 조건은 '겸손한 순명'입니다. 나를 하느님 나라 건설의 도구로 부르신 주님의 뜻을 찾고 이 뜻에 순명하려는 자세입니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 우리의 시대나 할 것 없이 동등히 잘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자신을 드러내려는 사람들, 자신의 뜻을 드러내고,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봉사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의 뜻을 내어 맡긴 사람들이며, 함께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부족한 나를 하느님의 나라 건설의 도구인 봉사자로 부르십니다. (~ 예레 18,18)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26주간 금요일>(10.6)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10,16) '회개하자!' 오늘 복음(루카10,13-16)은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곧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을 심하게 꾸짖으십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강한 메시지는 '구원의 절대적 조건'이 곧 '회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회개의 구체적인 모습'이 '받아들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세 고을을 꾸짖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10,16)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과 당신 자신과 그리고 하느님을 동일시 하십니다. 이는 구원의 강한 연대성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제자들을(너를) 배척하는 것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은 하느님을 배척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회개하지 않는 우리들, 곧 하느님의 도구로 파견된 너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 그들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 대한 꾸짖음이시고,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드러냅니다. '왜, 받아들이지 않고 물리치려고 할까?' '완고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선지식과 선체험들 때문인데, 이러한 것들이 비워지지 않고 쌓아지면 완고함으로 변하게 되고, 이 완고함이 너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죄를 낳게 됩니다. 받아들임이 이루어지려면, 비워져야 합니다. 날마다, 아니 매순간 내 안에 있는 것들이 비워지지 않으면 오늘(지금) 내게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없고, 기쁘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기쁨도 비워내고, 내 안에 있는 고통도 비워내는 삶', 이것이 바로 '회개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회개합시다! (~ 예레 19,8)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10.7)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묵주기도의 힘!' 오늘 복음(루카10,17-20)은 '예수님에 앞서 둘씩 짝지어 파견되었던 일흔두 제자가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하는 말씀'과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에 한 말씀'입니다.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10,17) 열두 제자는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지 못했는데(루카9,40), 일흔두 제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복종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우리의 영적인 움직임들이나 그에 따른 활동들, 곧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보상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 너머에 있는 저 세상에서 보상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 행해지는 칭찬 앞에서 겸손을 드러내려고, 교만으로 은총의 선물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오늘은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이 기념일은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 연합군이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에 이슬람 제국을 물리친 것(레판토 해전)을 계기로 제정된 기념일입니다. 레판토 해전의 승리는 성모님의 전구기도를 통해 이루어진 기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손을 꼭 잡고 바치는 기도인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칩니다. 그래서 저도 어디를 가든, 산책할 때나 등산을 할 때 항상 오른손에 묵주를 꼭 쥐고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함께 해 봅시다!' (~ 예레 20,18)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바야흐로 숙맥의 시대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숙맥이라 한다. 숙(菽)은 콩이고, 맥(麥)은 보리다. 크기로 보나 모양으로 보나 확연히 다른 곡식인데, 눈으로 직접 보고도 분별하지 못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이렇게 콩과 보리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런 쑥맥!'이라고 욕하기도 한다. 숙맥들이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콩과 보리뿐이겠는가 ? 상식과 비정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욕과 평상어를 구별하지 못하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해를 보고 달이라 하고, 달을 보고 해라고 하면, 낮과 밤이 바뀌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진시황제가 죽고 2세인 호해(胡)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때 그의 곁에는 환관인 조고(高)가 있었다. 간신 조고는 진시황제의 가장 우둔한 아들 호해를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고 자신의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했다. 조고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조정 신하들의 마음을 시험하기로했다. 그리고는 신하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사슴 (鹿)을 호해에게 바치며 말(馬)이라고 했다. 호해가 "어찌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가?"라고 하자, 조고는 신하들 에게 물어보자고 했다. 신하들은 세부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침묵파 였다. 분명 말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잘못 말하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침묵을 선택한 부류였다. 또한 부류는 사슴파'였다. 분명 말이 아니었기에 목숨을 걸고 사슴이라고 정직하게 대답한 신하들이었다. 마지막 한 부류는 숙맥파'였다. 분명 말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슴이라고 하는 순간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롭다는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슴과 말도 구별하지 못하는 숙맥이 되기를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숙맥들만 남고 모든 신하는 죽임을 당했다. 바야흐로 숙맥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숙맥의 시대는 채 몇 년도 가지 못했다. 더는 숙맥으로 살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봉기해 결국 진나라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됐다.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에 전하는 "지록위마" (指鹿爲馬)의 고사가 나온 배경이다. 이성이 침묵하고, 거짓이 참이되고, 변명이 사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를 숙맥의 시대라 하고, 이런 시대를 "숙맥의 난 (亂) "이라고 정의한다. 숙맥의 난맥상은 그 어떤 혼란의 시대보다 폐해가 크다. 상식은 몰락하고, 비정상이 정상으로 둔갑하는 도술(道術)이 성행한다. 이런 도술을 부리며 세상 사람들을 흘리는 도사들이 숙맥의 시대에는 주류가 된다. 혹세무민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그들의 주머니를 터는 일이 능력으로 인정된다. 숙맥파 교주들은 분별력을 잃은 숙맥들을 이끌고 허무맹랑(虛無孟浪)한 말로 사람들을 부추겨 그들의 잇속을 챙긴다. 이미 좀비가 된 숙맥들은 이리저리 몰려 다니며 교주들의 구호에 맞춰 절규하고 거품을 물고 욕을 해 댄다. 이념이 사람을 잡아먹고, 관념이 현실을 가린 숙맥의 난이 펼쳐지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류의 역사는 늘 숙맥의난(亂)으로 들끓었다. 서양에는 르네상스가 동양에는 성리학이 이성(理性)을 기치로 숙맥의 난을 평정하려 했지만, 번번이 벽에 부딪혀 좌절됐다. 진실은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너무 과분한 이상이었기 때문일까 ?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숙맥의 난에 절정에 이르고 있다. 숙(寂)과 맥(麥)을 분별해야 할 언론과 권력기관은 숙맥의 시대에 기름을 부으며 부추기고 있고, 각종 권력은 그 위에서 마음껏 난세를 즐기고 있다. 콩과 보리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숙맥의 세상을 침묵파로 살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다. - 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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