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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연중 제23주일>(23.9.10)"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서로 사랑합시다!함께 참사랑을 실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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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일>(9.10)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마태18,15) 

'율법의 완성인 사랑!'

오늘 복음(마태18,15-20)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야 하고,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너의 구원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노력이 바로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고, '나와 너를 구원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33,7-9)인데,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완전 멸망 후 바빌론 유배 때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노력한 예언자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의 찬 메시지를 전하면서 이스라엘의 회복,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에제33,7)

사랑은,
너를 위한 사랑은,
서로를 위한 사랑은,
'서로가 서로의 구원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냉담 교우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만 하는 당위성(當爲性)'입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내가 너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너를 구원으로 이끄는 나의 노력'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참사랑이며, 우리가 살아야 할 참사랑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4,16)

서로 사랑합시다!
함께 참사랑을 실천합시다!

(~ 이사 1,9)

마산교구 합천본당주임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3주간 월요일>(9.11)

"손을 뻗어라."(루카6,10)

'예수님의 사랑!'

오늘 복음(루카6,6-11)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틀을 뛰어넘는 '확장성 사랑'입니다. 곧 어떠한 틀이 없고 경계가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특히 죄인들과 병자들에게 열려있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사랑과의 충돌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율법이라는 틀(규정)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틀 안에 갇혀 있는 사랑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과 충돌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루카6,7)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6,9) 그러고 나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손을 뻗어라."(루카6,10)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사랑이 율법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는 자신들의 사랑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과 충돌했고,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았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틀은 없는지?
그래서 하느님도 그 틀 안에 가두어 버리고, 너를 또한 가두어 버린 그 틀이 내 안에 없는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하느님과 너를 그 틀 안에 가두어 놓고 판단하고 단죄한 죄가 있다면,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합시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1,24)

오늘도 화이팅~

(~ 이사 3,15)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3주간 화요일>(9.12)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6,12) 

'하느님 감사!'

오늘 복음(루카6,12-19)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말씀'입니다. 

'놀라운 사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시기 위해 산에 가셔서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기도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으신 예수님의 지혜에 놀랍습니다.

'놀라운 사실 또 하나'는 그렇게 뽑힌 열두 사도의 면면을 보면 그리 대단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네 생각과 너무나도 달라 놀랍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사도들(봉사자들)이라는 사실과 하느님의 나라 건설과 우리의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뜻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먼저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모두는 바로 이런 존재들입니다. 이런 존재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서 이렇게 평범하고 부족하기까지 한 나를 하느님 구원 사업에 필요한 봉사자로 불러주셨다는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를 봉사자로 쓰시겠다고 부르시면, 이를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면서 기쁘게 "예!" 라고 응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부르심은 하느님의 부르심이고, 나에게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 불러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나의 인간적인 능력이나 힘으로 하기보다는,  예수님처럼 기도하면서 기도의 힘으로 합니다. 곧 하느님의 힘, 그리스도의 힘, 곧 성령의 힘으로 합니다. 

그러니 봉사를 제일 잘하는 모습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나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리면서, '기쁘게 하는 봉사'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콜로2,6) 

(~ 이사 6,13)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9.13)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루카6,20.24) 

'희망 선언!'

오늘 복음(루카6,20-26)은 '참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개의 행복'과 '네 개의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선언이 참으로 의아하게 들려옵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그 이유는 우리네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달라도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실까?

그리고 어떻게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남들이 좋게 말하는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실까? 

예수님의 말씀은 그 깊은 뜻과 의미가 숨겨져 있는 신비입니다. 오늘 말씀에 숨겨져 있는 신비는 무엇일까?

오늘 말씀은 믿음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영원한 것에 대한 믿음이 없거나,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말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사는 이들에게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말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굳건한 사람들, 죽어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사랑 실천에 큰 의미를 두고 사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말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오늘 행복선언이 이렇게 들려왔을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라고 말입니다.

오늘 독서(콜로3,1-11)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3,1.5)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합시다!

(~ 이사 11,16)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예수님의 말씀은 그 깊은 뜻과 의미가 숨겨져 있는 신비입니다. 오늘 말씀에 숨겨져 있는 신비는 무엇일까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굳건한 사람들, 죽어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사랑 실천에 큰 의미를 두고 사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말씀으로 
"예수님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오늘 독서(콜로3,1-11)에서 사도바오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합시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9.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3,14) 

'십자가는 구원의 표징!'

오늘 복음(요한3,13-17)은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위로부터, 곧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내용인 '우리의 구원,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 나무에 들어 올려지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3,16-17)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나무에 들어 올려지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실패와 죽음처럼 보이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날이며, 십자가의 신비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 나무에서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어,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나이다."(감사송 中에서) 

십자가는 표징입니다.
십자가는 죽어야 부활할 수 있다는 승리의 표징입니다.
십자가는 죽음과 부활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신비의 표징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믿음의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경배하고, 십자가를 지니고 다닙니다. 그래서 성당이나 가정의 중심이 되는 곳에 십자고상을 걸어놓고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이요 핵심인 십자가를 자주 바라보고, 십자가 신비 안에 숨겨져 있는 '죽음의 사랑'을 지금 여기에서 실천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 

(~ 이사 14,32)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1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요한19,25)

'엄마의 고통!'

오늘 복음(요한19,25-27)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가 되게 해 주신 말씀'입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19,26)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19,27) 

오늘은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 탄생 예고 때 드러내신 결정적인 순종이후, 한생을 당신 아들 예수님과 함께 하시면서 끝까지 순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기 때문에 엄마 성모님의 길 또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더 성모 칠고, 곧 성모님의 일곱 고통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칠고(七苦)'는 이렇습니다. 

첫 번째 고통은 '시메온 예언자의 예언의 고통'입니다.
두 번째 고통은 '아기 예수님과 함께 이집트로 피난 가신 고통'입니다.
세 번째 고통은 '소년 예수님을 잃으신 고통'입니다.
네 번째 고통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과 만나신 고통'입니다.
다섯 번째 고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의 고통'입니다.
여섯 번째 고통은 '예수님의 성시를 품에 안으신 고통'입니다.
일곱 번째 고통은 '예수님을 돌무덤에 묻으신 고통'입니다.

성모신심이 큰 분들, 특히 레지오 단원들은 고통의 어머니처럼 고통을 잘 참아내고 이겨냅니다. 한생을 아들 예수와 함께하면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 대리자로 살아가고 있는 사제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말에 잘 순종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우리 신앙의 결정적 모범이신 성모님을 잘 공경하는 이들은 잘 참아냅니다. 그리고 말없이 겸손하게 묵묵하게 행동하면서 봉사합니다.

♥아멘♥ 

(~ 이사 21,17)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9.16)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6,46)

'살아있는 믿음!'

오늘 복음(루카6,43-49)은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6,45)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요지는 '그 사람의 행실을 보면 그의 믿음을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드러나는 나의 행실 하나 하나가 곧 '믿음의 척도'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우리의 믿음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죽은 믿음'이 되어서는 안되고, 삶으로 이어지는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1티모1,15-17)는 살아있는 믿음의 구체적인 한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1,15)

오늘 독서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을 굳게 믿고, 내가 죄인 임을 고백하는 것이 곧 구원에 이르는 길이고, 이것이 또한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 완전한 십자가 사랑 앞에서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저는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먼저 실행해야 할 나의 믿음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굳게 믿고,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봅시다!

(~ 이사 26,21)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