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일>(3.12)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4,14) '생명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요한4,5-42)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이방인입니다. 그가 "선생님은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4,9) 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마리아인들은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4,7)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방인에게 다가가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보편성, 곧 모두에게 열려져 있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어는 '물'입니다. 물은 '생명수'입니다. 물 없이 결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야곱의 우물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4,14)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실 때, 먹을 것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말합니다. "스승님, 잡수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4,32.34) '우리를 이제와 영원히 살 수 있게 하는 생명수와 생명의 양식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완수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한 생명수요, 양식 그 자체인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 1열왕 6,17) '우리를 이제와 영원히 살 수 있게 하는 생명수와 생명의 양식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완수하는 것'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한 생명수요, 양식 그 자체인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아멘 !!! |
<사순 제3주간 월요일>(3.13)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4,24) '나의 본질은 살아있는가?' 오늘 복음(루카4,24-30)은 '예수님을 진실되게 믿고 받아들이는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의 구원행위(기적)가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우리에게 기쁨과 자유와 해방이라는 부활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이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희년 선포를 통해 당신이 요셉의 아들(인성)이시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신성)이심을 드러내시는데도,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복음입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과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던 엘리야 때와 나병 환자가 많았던 엘리사 예언자 시대를 언급하시면서,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구원행위가 내리지 않고,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내렸다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행위가 이스라엘 백성 유다인들에게 내려지는 전유물이 아님을 선언하십니다. 이는 곧, 내가 세례 받았다고, 내가 기도했다고, 내가 미사했다고, 내가 성경을 필사했다고, ... 그것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절대적 행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그리고 우리 앞에 놓여 진 구체적인 이슈와 문제 앞에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세례의 본질이 드러나고, 기도와 미사와 말씀의 본질이 드러나야, 우리가 이제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행위가 이루어져야 할 이 세상이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분열의 장과 싸움과 전쟁의 장으로 변해있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세례와 기도와 미사와 말씀의 본질이 살아있는가? 그 본질은 '예수님'이십니다. (~ 1열왕 7,12)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사순 제3주간 화요일>(3.14)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18,35) '용서가 힘든 이유?' 오늘 복음(마태18,21-35)은 '조건 없는 용서에 대한 말씀'과 '매정한 종의 비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18,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18,22) 그리고 이어서 '매정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매정한 종의 비유'는 내가 너의 잘못을 조건없이 용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만 탈렌트(6조 원)'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1천만 원)'을 빚진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습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엄청난 빚(죄)을 탕감(용서)받고 있기 때문에, 나도 너의 빚(죄)을 탕감(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가 안 되고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먼저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용서 받았고, 또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는 '나의 믿음의 문제',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약하거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을 잘 믿는 사람들과 말씀(마태18,35)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용서를 잘 합니다. 그것도 예수님 말씀처럼 조건 없이 용서를 잘 합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18,32-33) (~ 1열왕 8,22)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사순 제3주간 수요일>(3.15)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 '사랑을 완성하자!' 오늘 복음(마태5,17-19)은 '예수님과 율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율법이라는 틀 안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했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끝까지 그 생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율법의 파괴자가 아닌, '율법의 완성자'라고 소개하십니다. 율법의 본질인 사랑을 완성하러 왔고, 율법의 본질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 불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서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같은 모습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대리자, 곧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라고 기름부음을받고 파견된 사제들을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의 모습으로 대하는 신자들도 있어 보입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 사제가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그 틀 안에 갇혀있는 신자들도 있어 보입니다. 어떤 신자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 있는 사제만 사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도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 가두어 놓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 하느님이 맞지 않으면 하느님도 거부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자신들의 전통과 틀을 깨부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일어지탁(一魚之濁)' 공동체와 세상을 흐트러뜨리고 힘들게 하는 '일어지탁과 같은 존재'가 되지 말고, '공동체와 세상을 살리고 기쁘게 하는 신자들, 율법의 본질인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완성하는 그런 신자들'이 우리 안에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 1열왕 8,53)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사순 제3주간 목요일>(3.16)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루카11,23)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오늘 복음(루카11,14-23)은 '예수님과 베엘제불'에 대한 말씀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 합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고, 그래서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는데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악담을 퍼붓습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루카11,15)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마귀로, 마귀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이라고 하니... 하느님의 손가락(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시는데도,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예수님의 마음 안에 머물러 봅니다.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아픔도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악담을 해대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루카11,23)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하면서 살아가겠다고 굳게 약속 해놓고서는 예수님 편에 서 있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당 안에서는 "아멘!" 하고, 성체를 잘 받아 모시면서도, 성당 밖에서는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에서 시편 저자는 말합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후렴)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런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예레7,23) (~ 1열왕 9,14)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사순 제3주간 금요일>(3.17)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12,28-34) '누가 내 이웃인가?' 오늘 복음(마르12,28-34)은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어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29.30)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12,31) 율법 학자는 첫째가는 계명 하나를 물은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눈에 보이는 나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자, 그 율법 학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12,32.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12,34) '지금 머물러 있는 나의 삶의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인가?' '우리나라가, 우리 가정이, 우리 공동체가 하느님의 나라(천국)인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1열왕 10,13)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사순 제3주간 토요일>(3.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18,14) 모든 덕의 으뜸인 겸손! 오늘 복음(루카18,9-14)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서로가 서로를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서로가 앞 다투어서 낮아지려고 하고 겸손해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천국)의 반대인 지옥은 이와 반대의 모습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겼던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었고, 잘 지키고 있었다고 자부했던 그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업신여겼습니다. 바리사이가 바리사이답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18,11-12) 하지만 바리사이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8,13)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8,14) 좀 안다고, 좀 사랑을 실천했다고, 권력과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우쭐해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하느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우리는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모든 덕의 으뜸은 겸손입니다. (~ 1열왕 11,25)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미사의 은혜/사순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