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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사순시기

<사순 제2주일>가해 23.(3.5) -성 요셉 성월-'순종은 곧 믿음!'


 <사순 제2주일>(3.5) -성 요셉 성월-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17,2)

'순종은 곧 믿음!'

오늘 복음(마태17,1-9)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신앙의 목적은 '부활'입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부활과 죽음 저 너머에서의 영원한 부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을 '부활신앙', '끊임없이 부활에로 나아가는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가 믿음으로 얻게 되는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 너머에 있는 부활과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겪게 되는 고통 그 너머에 있는 부활에 대한 희망의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창세12,1-4)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미지(未知)의 세계로 떠나라.'는 주님 말씀에 아브람이 그대로 순종합니다. 우리라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브람과 같은 믿음을 드러낼 수 있을까? 하지만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말씀대로 길을 떠납니다.

대단한 순종이요, 엄청난 믿음입니다.
조그만 해도 입고 싶지 않고, 무엇을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우리들인데...

'순종은 구원의 언어이고,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지만 순종 그 자체는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내 것을 포기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어야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의 순종도 고통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22,42)

'순종은 곧 믿음'입니다.
믿음이 큰 사람들이 순종도 잘합니다.
장한 순교자들, 수많은 한국교회 순교자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순종하셨습니다. 믿음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믿음, 우리의 순종은 어떻습니까? '자존심' 때문에 무너지는 우리의 믿음이 아닙니까?

(~ 2사무 20,4)



 <사순 제2주간 월요일>(3.6) -성 요셉 성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다시 부활하자!'

오늘 복음(루카6,36-38)은 '자비에 대한 말씀과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고, 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하는 근거는 이것이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명령이고, 예수님 친히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자비와 용서의 절대적 전제는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 안에서 보면, '잘못했으니, 죄를 지었으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이들의 간절한 청을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다 받아주셨습니다. 돌아오는 이들,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조건 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15,21)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18,13)

"주님,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다니9,5.7)

우리가 먼저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그래서 먼저 자비를 입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은 너를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를 용서하고, 너에게 잘 베풉니다.

은혜로운 때요 구원의 날인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더 깊이 묵상하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돌아가려고 회개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고해성사에 대한 부담, 판공성사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로 나아갑시다!
그래서 다시 부활합시다!

(~ 2사무 21,14)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사순 제2주간 화요일>(3.7) -성 요셉 성월-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마태23,3)

'위선을 극복하자!'

오늘 복음(마태23,1-12)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크게 분노케 했던 가장 큰 죄는 '위선의 죄'입니다. 위선은 말과 행동이 다른 것입니다. 위선은 죄를 짓고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끝까지 대립각을 세웠고, 예수님으로부터 호되게 야단맞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1,16.17.18)

이렇게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게 돌아오라고 외치는 주님의 말씀을 그들은 거역했습니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멸망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자들은 '믿음이 없거나 약한 자들'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죽음 저 너머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돌아옵니다. 회개합니다.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사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보이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고, 하느님보다 위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23,11-12)

'믿는 이들 가운데에서 위선자가 아닌 사람이 과연 있을까?'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하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위선자입니다. 때문에 위선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비이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 2사무 23,39)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사순 제2주간 수요일>(3.8) -성 요셉 성월-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8)

오늘 복음(마태20,17-28)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세 번째 예고'와 '출세와 섬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셨습니다.
이것이 당신을 이 세상에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이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나무에 달려 돌아가셨고, 그래서 사흗날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셨는데,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자신의 두 아들이 높은 자리에 있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 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

제베대오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지 않을까요? 영광과 부활에만 관심을 두고, 부활의 절대적 전제인 죽음과 고통에는 관심이 없는 우리의 마음???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6-28)

신앙은 역설입니다.
신앙은 신비입니다.
죽어야 사는 역설이요 신비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고통이요 기쁨입니다.

오늘 독서(예레18,18-20)는 눈물의 예언자라고 불리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고통을 전합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 버리자."(예레18,18)

예레미야 예언자의 고통이 참예언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으로 이어졌고, 또한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죽음과 부활입니다.
고통 너머에 있는 부활입니다.

오늘도 화이팅~~

(~ 1열왕 1,31)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수욜--신앙은 역설
신앙은 신비.
죽어야 사는 역설이요 신비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고통이요 기쁨입니다. --죽음과 부활입니다.
고통 너머에 있는 부활입니다.---참된삶과  영원한 생명                                                                                                                                                                                                                  

 <사순 제2주간 목요일>(3.9)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루카16,25)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오늘 복음(루카16,19-31)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 대문 앞에는 거지 라자로가 비참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둘이 죽어 저 세상으로 갑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둘의 처지가 완전히 뒤바뀝니다. 천사들이 거지 라자로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리고 가고, 그는 거기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던 부자는 영원한 벌이 있는 곳에서 고초를 겪습니다. 살아 있을 때 거지 라자로를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제 오후에 어떤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배둔성당 신부님이시죠? 옥치문 씨가 돌아가셨습니다. 무연고자로 처리가 되었습니다."

옥치문(사도요한) 형제님은 배둔성당 신자입니다.
재작년에 폐암에 걸려 치료를 받으시다가 요양병원에서 어제 오후에 돌아가셨고, 그 소식을 전해주신 분은 요양보호사였습니다.

'무연고자 처리라니???'

3남3녀의 장남이고, 아들과 딸이 있고, 어머니(치매.90세)도 살아계시는데. 마음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살아생전에 무슨 원한 관계가 있어 장례도 무연고자로 처리해서 장례를 치르는가??? 가족들이 고인의 장례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인 믿는 이들은 그렇게 해서도, 그렇게 보내드려셔도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오전 9시에 배둔 신자들과 함께 장례식장 발인실에서 고인을 위한 장례미사를 드립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옥치문(사도요한)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달라고 간절히 청원하는 미사'입니다.

함께 기도해 주세요.

"주님, 옥치문(사도요한)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 1열왕 2,29)

목욜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루카16,25)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옥치문(사도요한)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달라고 간절히 청원하는 미사'입니다. 그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순 제2주간 금요일>(3.10)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마태21,38)

'머릿돌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21,33-43.45-46)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포도밭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소작인들인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의 잘못을 지적하십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죽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에서 구해주시려고 수많은 예언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이 전하는 것처럼 그들은 수많은 예언자들의 신탁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당신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들은 그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상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리 안으로 파견되어진 '사제와 같은 수많은 또 다른 예언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처럼 내버려야 할, 빨리 보내드려야 할 걸림돌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21,42)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신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세상 구원을 위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형제들의 시기(질투)와 미움 때문에 이집트 상인들에게 팔려간 요셉도 이스라엘을 기근으로부터 구해 낸 그런 머릿돌이었습니다.

우리도 머릿돌이 됩시다! 
세상을 살리는 머릿돌, 가정과 본당과 머무는 공동체를 살리는 머릿돌이 됩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 1열왕 3,28)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21,42)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신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세상 구원을 위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형제들의 시기(질투)와 미움 때문에 이집트 상인들에게 팔려간 요셉도 이스라엘을 기근으로부터 구해 낸 그런 머릿돌이었습니다.

우리도 머릿돌이 됩시다! 
세상을 살리는 머릿돌, 가정과 본당과 머무는 공동체를 살리는 머릿돌이 됩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아멘 !!!

 <사순 제2주간 토요일>(3.11)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15,21)

오늘 복음(루카1-3.11-32)은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져 있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오늘 복음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분명한 그 본질'이 드러나고 있고, 또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에 이르게 되는지에 대한 분명한 본질'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루카15,11)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작은 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납니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모두 허비합니다. 그래서 알거지가 됩니다.
그때 아버지의 집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말씀드려야지 하는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그대로 실행합니다.

아버지는 알거지가 되어서 돌아온 아들을 어떠한 이유를 묻지 않으시고 조건 없이 품어 안아 주십니다.
그리고 큰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15,22)

우리가 사는 길은 오직 하나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이들에게는 한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화답송)

돌아갑시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갑시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돌아갑시다!

(~ 1열왕 5,14)

아버지는 알거지가 되어서 돌아온 아들을 어떠한 이유를 묻지 않으시고 조건 없이 품어 안아 주십니다.
그리고 큰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오직 하나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이들에게는 ♡♡♡한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돌아갑시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갑시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돌아갑시다!
넵~


 
네 고모님 열씨미 걸어갈께요  오소서 성령님!!! 생기돋워주시기를 빌며 
고모님 삶처럼 , 낭비된 향유처럼,   주님의 향긋한 향기를  쪼금이라도 지니고 시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