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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사순시기

<사순 제1주간 >(23.2.26)광야, 광야에 서 있네--- 예수님처럼 '말씀의 힘으로' 유혹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모범을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사순 제1주일>(2.26)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태4,1)

'광야의 의미!'

오늘 복음(마태4,1-11)은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시면서 '대피정'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본격적인 드러남이신 예수님공생활의 시작을 앞두고...

그곳 광야에서 대피정을 하실 때, 세 번에 걸쳐 악마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이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유혹을 받으시고 이를 물리치십니다. 이 또한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입니다. 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말씀의 힘으로' 유혹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모범을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광야의 의미'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요즘 묵주기도 바치면서 산책할 때 유튜브로 듣는 생활성가가 있는데, '광야를 지나며'(장진숙/노래해주리) 라는 생활성가입니다. 이 노랫말 안에 광야의 의미가 잘 드러나 있어 함께 공유해 봅니다.

    <광야를 지나며>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내 자아가 산산히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어 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길

광야를 지나며..

오늘 복음과 노랫말 안에 드러나 있듯이, 광야(고통)는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주님을 만나는 곳이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화이팅~

(~ 2사무 5,5)



 <사순 제1주간 월요일>(2.27)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하나의 사랑!'

오늘 복음(마태25,21-46)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두 개의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는 죽어서 개인적으로 하느님 앞에서 받는 '사심판'이고, 또 하나는 오늘 복음이 전하고 있고, 사도신경("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 때인 세상 종말의 때에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이 함께 받는 최후의 심판인 '공심판'입니다.

오늘 복음은 '심판의 기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이라는 것'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 곧 가장 비참하고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소외된 이들과 아픈 이들이 바로 나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 준 것이고, 그들이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인 영원한 생명(천국)에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벌(지옥)을 받는 곳으로 간다는 아주 단순한 말씀입니다.

심판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 받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받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세상에서 결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단순하게 믿고, 이를 향하여 나아갈 뿐입니다.
만약에 하느님의 심판과 그 결과인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말하면서 내 좋을 대로 막 살다가, 죽어서 천국과 지옥을 마주하게 된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심판 교리는 우리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갖게 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다니엘서나 요한 묵시록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교리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리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이미 우리 안에 놓여 져 있습니다.
그 선택은 내가 합니다.
지금부터 천국을 사는 거룩한 사람이 됩시다!

(~ 2사무 8,18)



 <사순 제1주간 화요일>(2.28)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6,7.9)

'구원의 절대적 행위요 이유인 용서!'

오늘 복음(마태6,7-15)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유일한 기도이자, 가장 완전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만남이요 대화'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기도의 형태로, 곧 '감사와 찬미기도로, 청원기도로, 그리고 때로는 탄원기도의 형태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대화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청원기도의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무엇을 청하는 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종종 내가 바라는 것을 우선적으로, 또 집중적으로 바치곤 합니다. 청원기도를 바칠 때에는 하느님 아버지의 것,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먼저 청하고, 그리고 우리의 것, 나의 것이 이루어지기를 청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하느님께 먼저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치고, 그 다음에 청원기도와 탄원기도를 바쳐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유 청원기도의 형태'이기도 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6,12)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6,14-15)

용서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용서는 내가 살기 위한, 내가 구원 받기 위한 절대적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내가 너를 용서해야 하는 절대적 이유'입니다.

혹시 지금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님께 용서의 은총을 청하고, 이 기도의 힘으로 너를 용서해 봅시다!

내가 살기 위해서~

(~ 2사무 12,23)



 <사순 제1주간 수요일>(3.1)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11,30)

'나도 표징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11,29-32)은 '요나의 표징'입니다.
'표징의 사전적 의미'는 '밖으로 드러나는 특징이나 상징으로써 본질적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을 말합니다. '성경 안에서의 의미'는 '계시 곧 하느님의 뜻을 전달해 주는 매체'를 말합니다.

'요나의 표징', 곧 요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니네베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내렸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3,1-2.4)

'요나가 전하는 표징'을 보고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합니다.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마침내는 니네베 임금까지 회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이렇게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시고,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회개의 기적'입니다.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표징', 곧 '당신의 성탄(육화)과 땀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은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3월의 첫 날'을 맞이했습니다.
오늘은 104년 전 일제 식민 통치에 항거했던 날을 기념하는 '삼일절'입니다. 유관순 열사 등 수많은 열사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지금 우리 안에는 삼일절 정신을 잊고 '친일(親日)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삼일절을 맞이하여, 우리 대한민국이 회개했으면 좋겠습니다. 대통령이 회개하고, 국회의원이 회개하고, 나아가 우리 모두가 회개했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 2사무 13,22)



 <사순 제1주간 목요일>(3.2) -성 요셉 성월-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

오늘 복음(마태7,7-12)은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라는 말씀과 '황금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인 에스테르기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음의 물음들을 먼저 던져보게 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무엇을' 청하고 찾고 있으며, 그것을 얻기 위해, 곧 청하고 찾는 것을 주시는 분께 '어떻게' 다가가고 있는가? '어떤 열정'을 드러내고 있는가?"

"어린 아이처럼 울고불고하며 떼를 쓰면서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만을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고 있지는 않은지?"

"하느님의 것,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뜻인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서도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고 있는가?"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그리고 복음 후반부에 나오는 '황금률'(황금과도 같은 율법), 곧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7,12)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는 산 위에서 군중을 두고 하셨다는 말씀인 '산상설교(마태5-7장)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산상설교의 결론'이자 '황금률의 뿌리'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레위19,18)는 '이웃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 세상 떠날 때 함께 할 수 없는 것들,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과 그것을 얻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지만 말고, 이 세상 떠날 때 함께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사랑의 업적'을 쌓는 일에도 '관심과 열정'을 쏟았으면 좋겠습니다.

(~ 2사무 16,23)



 <사순 제1주간 금요일>(3.3) -성 요셉 성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마태5,20)

하늘 나라인 천국!

오늘 복음(마태5,20-26)은 '용서와 화해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구체적인 삶으로 따라가는 이들의 목적은 '이제와 영원히 하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14,17)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반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 그 자체, 곧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문자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이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하느님 사랑이 이웃 사랑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곧 이웃 사랑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5,23-24)

우리 안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은 '용서와 화해하는 일'일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신적 영역', 곧 결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실 때, '성령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내가 죽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이 힘들고 어려운 이유는 '내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데 말입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18,23)

(~ 2사무 18,10)



 <사순 제1주간 토요일>(3.4) -성 요셉 성월-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5)

'하느님의 보편사랑과 역설사랑!'

오늘 복음(마태5,43-48)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기울지 않는 하느님의 보편사랑에 우리도 참여하라고 하십니다. 아니, 그 보편사랑을 뛰어 넘어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나를 힘들게 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역설사랑에 참여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실행할 수도 없을 것처럼 다가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 힘든 역설사랑을 실행해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야 지금 여기에서 살고, 죽음 저 너머에서도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의미를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5,46)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보편사랑'입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똑같이 '은총의 비'를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누구는 그 은총을 받고, 또 못 받습니다. 내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편은총(사랑)을 받지 못한 것은 내가 '죄 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만과 인색과 시기의 우산, 탐욕과 음욕과 분노와 게으름의 우산'을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치우치지 않는 '보편사랑'을, 그 사랑을 뛰어 넘는 역설사랑인 '원수사랑'을 해 봅시다!

"주님, 이정숙(사비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 2사무 1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