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사의 은혜/대림성탄

제목 <대림 제2주일>(12.4) -인권 주일-매일 성체를 모시고, 매 순간 그분을 찬양하는 모든 순간들이 주님의 날이요 구원의 때입니다!맑은 정신으로 늘 깨어 기도했던 광야의 대 예언자, 세례자 ..

맑은 정신으로 늘 깨어 기도했던 광야의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

<대림 제2주일>(12.4) -인권 주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3,2)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자, '인권 주일'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림 제2주간은 '사회 교리 주간'입니다.

불을 밝힌 대림초 두 개가 주님께서 좀 더 가까이 오심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오늘 복음(마태3,1-12)에서 세례자 요한이 설교하고 있는 '회개의 세례'가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권 주일은 'Imago Dei' 곧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인간의 존엄성에서 시작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 안에서 이러한 인권이 잘 보호받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교리'는 이에 대한 '교회의 구체적인 가르침'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두 개의 교리'가 있습니다.
곧 '믿을 교리와 지킬 교리'입니다.
이 두 교리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교리이자, 하나의 사랑(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사회교리'는 예수님 말씀에 근거합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마태7,21)과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마태25,31-46)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10,29-37)' 등등

'사회 교리란?'
인간노동, 경제생활, 정치공동체, 환경보호 등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을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세상 안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교리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하고 있는 회개의 세례는 분리되어 있는 두 교리(믿을 교리와 지킬 교리)를 하나가 되게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 비참한 이들, 소외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들을 도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 특히 부와 자산을 소유한 사람들의 의무입니다."('모든 형제들' Fratelli Tutti, 285항)
모두의 구원인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도록 오늘도 최선을 다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매일 성체를 모시고, 매 순간 그분을 찬양하는 모든 순간들이 주님의 날이요 구원의 때입니다!

<대림 제2주간 월요일>(12.5) -사회 교리 주간-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5,20)

'그들의 믿음!'
오늘 복음(루카5,17-26)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중풍 병자는 스스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를 남자 몇이 평상에 누인 채로 예수님께 데리고 갑니다. 군중 때문에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갈 수가 없자,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채로 예수님께 내려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5,21)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 앞에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5,24c)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말합니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5,26)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예수님께로 데려가야 할 '또 하나의 중풍 병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이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있는 이들'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힘으로 이들을 주님께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내 안에, 우리 안에 크게 자리잡고 있는 복음화의 커다란 병폐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이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사랑의 반대인 무관심을 버리고, '내 주변에 있는 또 하나의 중풍 병자들을 주님께 데리고 나갑시다!'
날마다 우리 안에서 신기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대림 제2주간 화요일>(12.6) -사회 교리 주간-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
'작은 이들과 작은 것들을 사랑하신 예수님!'
오늘 복음(마태18,12-14)은 '마태오 복음 사가가 전하는 되찾은 양의 비유'입니다. 양 백 마리 중에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되찾은 것을 두고 기뻐하는 비유를 통해서, '작은 것의 소중함과 우리 안에 있는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메시지가 경제 논리 안에서 더 소유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이들에게는 큰 십자가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들은 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보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라가는 길은 참으로 힘든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여겨진다면, 잘 가고 있는 모습이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잘 사는', 곧 '공동선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 건설'입니다.
"저희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 모든 피조물과 창조 질서 안에서 조화롭게 살아가고,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선을 이룸으로써, 이 땅에 사랑과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사회교리주간 기도문 中에서)

이번 주간인 대림 제2주간은 사회 교리 주간입니다.
'사회 교리 주간'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주간'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작은 이들과 작은 것들'이 많습니다.
이 다짐이 나의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다짐과 실천이 "마라나타! 곧 주 예수님 어서 오세요." 라는 외침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대림 시기의 구체적인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12.7) -사회 교리 주간-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예수님의 멍에!'
오늘 복음(마태11,28-30)은 '내 멍에를 메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이들', 곧 '죄의 짐'과 '일상에서 지게 되는 삶의 무게와 염려와 걱정과 갈등의 무거운 짐' 때문에 고생하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안식을 얻기 위한 대전제'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소가 짐을 실어 나르는 마차(달구지)나 쟁기를 끌때, '소 목 위에 얻는 둥근 나무 막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멍에는 무엇이고,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예수님의 멍에'는 짊어진 무거운 짐 때문에 지쳐있는 우리를 자유와 해방으로 이끄는 '예수님의 말씀', 곧 '예수님 자체'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자체'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님 부르심의 응답'이요, '예수님 안에 머뭄'이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이사40,25-31)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메시아)을 두고 이렇게 찬미합니다.
"그분께서는 피곤할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40,28-29)
나에게 힘을 주시러 오시는 분, 나를 살리시러 오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오늘도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갑시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안식을 누리고, 자유와 해방을 얻도록 합시다!
"보라, 당신 백성 구원하러 주님이 오시리니,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가는 이는 복되어라."(복음 환호송)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다산 정약용
유네스코는 2012년에 세계 기념 인물로 네 사람 (루소, 헤르만 헤세, 드뷔시, 정약용)을 선정하였는데, 그중 다산 정약용 선생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등재되었습니다.
성호 이익 선생의 유고집을 읽고 실학에 꿈을 키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 선생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 하나로 강진 유배지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자기를 모함한 몇 사람에 대해서만 불편한 얘기를 조금 했을 뿐, 나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평생을 나라 걱정, 백성 걱정으로 관료들의 부패를 척결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선생은 500여권에 달하는 저술을 통해 정치, 행정, 법학, 경제, 지리, 의학, 공학 등을 아우르며 철저한 실학사상(實學思想)을 펼친 실사구시 철학인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초시는 1000명, 진사는 200명을 합격시켰는데 다산은 22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진사 합격자는 임금님께 인사를 드리는데, 조선왕조 최고의 대학자였던 정조는 다산의 주관식 논문을 읽고 인재로 키워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조와 처음 만남이 이루어지던 날 정조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 이름이 무어냐?"
"네! 정약용입니다."
"나이가 몇이냐?"
"22살입니다."
"알았다."
이 첫 만남을 다산 기록에 풍운지회(風雲之會), 즉 구름과 바람의 만남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조는 성균관 학생들에게 수시로 시험을 치렀는데 다산이 계속 장원을 하니 감탄하여 학생인 다산을 수시로 불러 국가정책에 대해 물어보았고, 다산이 올린 정책 여러 개가 국정에 반영되기도 했습니다.
6년 간의 성균관 공부를 마치고 28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들어선 첫날 시(詩)를 지었는데, 공직자로서 공렴(公廉)이란 두 글자를 마음 속에 다짐한 것이었습니다. 이 다짐은 평생 동안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33세에 암행어사로 경기북부 4개 고을을 암행 감찰하였는데 농촌 백성들의 황폐하고 비참한 생활과 관료들의 부패에 충격을 받고 이대로 두고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겠다고 생각하여 결심하였습니다.
정조는 다산 선생이 30세 때 앞으로 10년을 계획하고 수원 화성을 건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다산 선생은 설계를 하면서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발명하였으며, 거중기 11대를 투입해 2년 4개월 만에 완공하여 정조가 감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다산의 유일한 배경이었던 정조가 서거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한 후 노론이 정권을 잡으면서 선생은 생애 최대의 위기를 맞습니다.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천주교 탄압에 연루되어 40세에 유배형을 받았던 것입니다.
1801년 11월 하순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정약전, 정약용 두 형제는 기약 없는 눈물의 생이별을 했습니다. 둘째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각각 유배를 떠났습니다.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동문 밖 주막에 들려 주모한테 어려운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높은 양반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는 모르겠는데 죄가 밉지, 사람이 밉겠소? 방이 하나 있는데 먹여주고 재워줄테니 내 부탁을 들어줄래요?"
"말씀해보세요."
"당신은 암행어사까지 하신 분이라 배움이 많을 것인데 우리 동네 아이들이 배우고 싶어도 선생님이 없어서 배울 수가 없으니 공부를 가르쳐 주겠소?"
"다른 건 몰라도 그거라면 하겠소."
선생은 흔쾌히 허락하고 골방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정치한다고 책도 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마음껏 책도 보고 글도 써야 되겠구나. 하늘이 내게 내린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선생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천리 길을 가족과 헤어져 온 사람으로서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생각이었습니다.
암행어사 시절 관료들의 부패에 고통받는 백성들의 황폐하고 비참한 현실을 보았고, 유배지 강진 고을에서도 홍안애명(鴻雁哀鳴)의 슬픈 현실을 지켜 보았습니다. 선생은 목민관들의 마음 자세가 이런 상태라면 나라가 망할 것이며 개혁을 하지 않으면 국가와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선생은 어리고 순한 양들이 제 목소리를 다 낼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그리며 목민관이 지켜야 할 지침서 목민심서(牧民心書) 48권 16책, 억울한 백성들이 없도록 하는 형옥에 관한 법정서 흠흠신서(欽欽新書) 30권 10책, 정치 사회 경제 제도를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목표로 저술한 경세유표(經世遺表) 필사본 44권 15책, 경세유표의 원제목은 방례초본(邦禮草本), "미완성작" 등등 500여권의 책을 저술하면서 모든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반드시 대안을 제시하여 실행하면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주자의 성리학적(性理學的) 해석과 관념의 문제점도 지적 실학적(實學的)으로 바꾸고 실천이 없는 철학과 사상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선생은 늘 "모든 과학의 원리는 수학에 근본이 있다."고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교과서를 개편하여 백성들이 수학을 배워야 나라가 부흥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자식인 학연, 학유 두 자식이 잘못될까 걱정하며, 편지를 통해 수없이 효제(孝悌)를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집안이 언젠가 폐족을 면하는 길은 책을 읽고 독서하는 것 밖에 없다. 짐승과 사람이 다른 점은 사람은 책을 읽을 줄 알고 짐승은 책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벼슬을 했어도 재산이 없어 물려 줄 것이 없는데 야박하다고 서운해 하지 마라. 내가 너희들에게 유산으로 부적 두 글자를 물려줄테니 항상 지니고 다녀라. 그것은 바로 근검(勤儉)이다."
올해 다산 정약용 선생의 탄신 260주년을 맞아 임인년 한 해를 정리하면서 선생이 남기신 큰 유업과 위대한 실학정신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짊어진 무거운 짐 때문에 지쳐있는 우리를 자유와 해방으로 이끄는 '예수님의 말씀', 곧 '예수님 자체'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자체'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님 부르심의 응답'이요, '예수님 안에 머뭄'이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단아한 정약용     바위 중간에 정석 이란 글을 남긴 글을 보고 느낀것이랍니다. ****독서와 근검 ****** 을 후손에게 유네스코세계기념인물이라니 더 더욱 후손으로서 자랑스럽습니다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12.8) -사회 교리 주간-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1,28)
'너 어디 있느냐?'
오늘 복음(루카1,26-38)은 '예수탄생예고'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자렛 처녀 마리아를 하느님 구원 사업에 결정적 도구로 선택하십니다. 그에게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아들 예수를 품을 성자의 합당한 거처로 삼으십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34)
하지만 마리아는 불가능해 보이는 이 엄청난 부르심에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이 결정적 순종으로' 나자렛 처녀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성모무염시태, 곧 복되신 동정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교리는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라는 교리에 결정적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품을 태가 결코 죄에 물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크게 입은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또한 주님의 백성을 위하여, 은총의 전구자요, 거룩한 삶의 모범이 되신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를 통하여,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성자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시어,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으니, 동정녀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소서."(본기도)
"너 어디 있느냐?"(창세3,9)
하느님께서 불순종의 죄를 짓고 숨어 버린 아담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또 하나의 아담들'을 부르십니다. 지금 나를 찾고 계시는 하느님께로 나아가 모든 죄에서 벗어나 새 사람이 됩시다!
이것이 바로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를 통하여,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성자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시어,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으니, 동정녀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소서."(본기도)"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1,28) **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루카 1.37)---제가 제일 마음에 두는 성구입니다. *****
제목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12.9) -사회 교리 주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11,17)
'내가 곧 간다.'
오늘 복음(마태11,16-19)은 '세례자 요한의 말도 예수님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들, 곧 지금 여기에서 회개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향해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오니,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주님의 말도 듣지 않고, 너의 말도 듣지 않는 이들을 두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오늘 독서(이사48,17-19)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17절)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위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18절)
'말씀이 곧 계명입니다.'
올 3월14일부터 시작한 '신약성경 필사'가 성모님 대축일인 어제(12.8), "주 예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과 함께하기를 빕니다."(묵시22,21) 라는 말씀을 끝으로 마쳤습니다. 이어서 '구약성경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시간을 내어 성경을 필사하는 것이 가장 멋진 기도이고, 성경공부라는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1,1-22,21)은 일곱 천사를 통해 요한에게 계시된 '새 하늘과 새 땅인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의 맺음말'입니다
"보라, 내가 곧 간다.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22,7)
"이 일들을 증언하시는 분께서 말씀하신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22,20)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재림)과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말씀 안에서' 잘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제목 <대림 제2주간 토요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12.10) -사회 교리 주간-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17,12)
'지금 이 시대에 엘리야는 누구인가?'
오늘 복음(마태17,10-13)은 '엘리야의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기원전 9세기(BC 850경)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을 겪은 뒤, 사마리아를 수도로 하여 세워진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활동했던 구약의 대표적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말하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구원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구약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를 주님에 앞서 파견된 예언자, 주님의 길을 닦는 사자로서, 주님에 앞서 오시는 예언자로 여겼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17,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던진 이 물음은,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있느냐는 율법 학자들의 주장을 전한 물음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앞서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마태11,14) 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서가 아니라, 엘리야의 일을 했기 때문에 그를 엘리야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엘리야의 일'은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닦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엘리야와 엘리야의 일을 하는 또 다른 예언자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 하면서, '나와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 지금 우리 안에 파견되어 있는 엘리야와 엘리야의 일을 하는 예언자는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는 그를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해 함께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