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주님 세례 축일 You are my son! 너는 내 아들이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이사 42:1-4.6-7 2독서: 사도 10:34-38 복음: 마태 3:13-17 Today the Church celebrates the feast of the Baptism of Jesus. The most important thing in Jesus’ baptism is not the external fact – Jesus coming to be baptized by John the Baptist-; this is only the framework. The essential element is the Father’s own voice proclaiming Jesus as his beloved son. ‘After Jesus was baptized, he came up from the water and behold, the heavens were opened [for him],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coming upon him. And a voice came from the heavens,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with whom I am well pleased.”’ (Matthew 3:16-17). 오늘 교회는 예수님의 세례 축일을 지냅니다. 예수님의 세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순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외적 사실일 뿐입니다. 이 사건의 본질적 요소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로 선포하는 성부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6-17).”’ When you write the biography of a poet or of an artist, you always look for the person (generally a woman) who was the source of inspiration for that genius, his muse – often hidden. In Christ’s life, we find a secret love who was the inspiring motivation of all he did: his love for his heavenly Father. 어떤 시인이나 예술가의 전기를 쓸 때, 우리는 항상 그 천재적인 작가의 영감의 원천이었던 사람(일반적으로는 어떤 여성), 그의 뮤즈를 찾곤 합니다. 하지만 그 뮤즈는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에서 우리는 그분이 하신 모든 일에 영감을 주는 원천은 은밀한 사랑, 즉 하늘에 계신 성부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In fact, he did not say ‘Father,’ but Abba, which means ‘Daddy’, ‘my dad, ‘dear father.’ It was a new, unprecedented way of addressing God and at the same time, of boundless respect and confidence. Now, at the Baptism in the Jordan, we discover that it is a mutual love. The Father proclaims Jesus his ‘beloved son’ and discloses all his happiness by sending upon him the Holy Spirit who personifies that very love. 사실 그분께서는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빠(Abba),’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아빠(Abba)’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부르는 전례 없는 새롭고도 무한한 존경과 신뢰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요르단 강에서의 예수님의 세례에는 성부와 성자의 상호 사랑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성부께서는 성자를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셨고 그 사랑의 실체인 성령을 성자에게 보내심으로써 최상의 행복을 드러냅니다. Who knows why literature, art, showbusiness and advertising all exploit only one kind of human relationship: the sexual intercourse between a man and a woman, husband and wife. Maybe since it is so easy to talk about sex, it is an upsetting subject and the human mind wallows in the dark side of things. There seems to be nothing but this. We have to admit that sex is becoming an obsession. If someone landed on the earth from another planet or managed to get the signal of a certain kind of TV shows, I think they would even find us a little ridiculous in this respect. 문학, 예술, 쇼 비즈니스, 그리고 광고 모두에서 한 종류의 인간 관계, 즉 남자와 여자 또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성적 관계만에 집중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쉽기 때문에, 금방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고 인간의 마음을 어두운 면에 쉽게 빠져들게 합니다. 성적 관계(섹스)에 잡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합니다. 만약 다른 행성에 사는 생명체가 지구의 오거나 우리가 보는 TV 프로그램을 보게 된다면 이런 점에서 우리를 매우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What is still almost unexplored is another human relationship which is as universal and vital, another of the great sources of joy in life: the father – child relationship, the joy of paternity. Modern psychology has dealt with it a little bit, but almost exclusively in a negative sense, to highlight the father – son conflicts. 지금까지 많이 이야기되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자녀 간의 관계는 보편적이면서도 살아있고 삶의 큰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다루면서 부정성을 강조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강조하였습니다. On the other hand, if one explores the human heart with calm and objectivity, for most normal people, a successful, intense and happy relationship with children is, for an adult and mature man, no less important than the man-woman relationship. We also know how important that relationship is for sons or daughters and how big is the void caused by its lack. 하지만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탐구해보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성공적이고 강렬하면서도 행복한 자녀와의 관계는 성숙한 성인에게 남녀 관계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이미 우리는 이 관계가 자녀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 결핍으로 인한 공허함이 얼마나 큰 지를 알고 있습니다. As on the feast of the Holy Family, we dealt with the relationship between husband and wife, today let me say something about this other essential and neglected relationship between a father and his children. We shall deal with mothers some other time, also considering that mums themselves will be the happiest, because they are known to be the first victims of a bad relationship between fathers and children. 지난 성가정 축일에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다루었듯이, 오늘은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본질적이면서도 쉽게 간과되는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머니들은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나쁜 관계의 첫 번째 희생자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어머니들은 행복할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이러한 어머니들에게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According to Scripture, just as the relationship between a man and a woman is modeled on that between Christ and the Church, so too the father-child relationship is modeled on that between God the Father and his Son Jesus. As saint Paul says, God the Father is the one ‘from whom every family in heaven and on earth is named’ (Ephesians 3:15), drawing its meaning and value from Him. 성경에서는 남녀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빗대어 설명하고,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했듯이 성부 아버지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종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에페 3:15)’이시며 모든 의미와 가치는 그분(성부 아버지)께로부터 나옵니다. Yet, just as a cancer usually attacks the most delicate organs in a man or a woman, so too the destructive power of sin and of evil attacks the most vital cogs of human existence. Just as there is nothing that is as subject to abuse, exploitation and violence as the relationship between a man and a woman, there is nothing that is as exposed to distortion as the father – son relationship: authoritarianism, paternalism, rebellion, rejection, incommunicability… 그러나 암이 일반적으로 사람의 가장 섬세한 장기를 공격하는 것과 같이 죄와 악도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한 톱니바퀴를 공격합니다. 남녀 관계의 학대, 착취, 폭력과 같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권위주의, 가부장주의, 반항, 거역, 불통 등으로 왜곡되어 노출되기 십상입니다. Psychoanalysts believed they were able to see in the unconscious of every child traces of the socalled Oedipus complex, namely the secret desire to kill one’s father. Yet without resorting to Freud’s psychoanalysis, we face up to terrible facts in the news every day. 정신 분석가들은 모든 어린이의 무의식에서 이른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흔적, 즉 아버지를 죽이려는 은밀한 욕망을 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굳이 프로이드의 정신 분석을 인용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하여 끔찍한 사실에 직면합니다. This is a typically diabolical kind of work. The word ‘devil,’ literally means ‘the one who divides, who separates.’ He is not content with setting one social class against another, nor a sex against the other, men against women and women against men. He wants to hit even deeper: he attempts to set fathers against children and children against fathers and often manages to do so.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악마의 작업입니다. ‘악마’라는 단어적 의미는 ‘분리하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의 사회 계층이 또 다른 계층를, 성별에 따라 남자가 여자를 또는 여자가 남자를 대적하는데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는 더 깊이 관여하여 공격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아버지가 자녀를, 자녀가 아버지에게 대적하게끔 시도합니다. One of the purest springs of joy in human life and one of the most important factors to guarantee balance and enhance the maturity of the human person in life is thus polluted. The suffering is mutual, even confining our discussion to fathers in this case. There are fathers whose deepest suffering in life is to be rejected, or even despised by their children, for whom they have done everything they have ever done. And there are children whose deepest and unconfessed suffering is to feel misunderstood or rejected by their fathers, and who, in a moment of anger, have heard them say “You are not my son!”. 이에 인간이 삶에서 가장 순수한 기쁨의 원천이자 인간의 삶의 균형을 보장하고 성숙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관계가 오염되어 가는 것입니다. 고통은 상호적인 것이지만 아버지의 경우에 집중하여 살펴본다면, 모든 것을 해준 자녀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심지어 멸시를 당하여, 인생에서 가장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아버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아버지로부터 오해받고 거부당하고 있다고 느껴, 깊고 고백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녀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화가 난 순간에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What can faith do to neutralize this work of Satan in our society? When John the Baptist was born the angel said that one of his tasks would be to ‘turn the hearts of fathers towards children and the heart of sons to their fathers’ (cf. Luke 1:17; Malachi 3:24). It is necessary to follow up on the Precursor’s own work, to launch the program of a great reconciliation, a healing of the sick relationship between fathers and children, disclosing and neutralizing the work of Satan. 우리 사회에서 이 사탄의 작용을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신앙이 필요하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이 태어났을 때, 천사는 그의 임무 중 하나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아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돌리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루카 1:17; 말라 3:24). 선지자의 임무를 완성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은 화해의 프로그램,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병든 관계를 치유하고, 사탄의 작용을 폭로하고 무력화하는 것입니다. It is not as if I have a strategy or a solution at hand, but I know who has it: the Holy Spirit! Within the Trinity he is the love between Father and Son. It is his personal feature which he carries wherever he gets. Therefore, whenever the Holy Spirit enters a father-son relationship the latter is renewed, a new paternity relationship is born along with a new filial feeling. It is the Holy Spirit who teaches to cry out: Abba!, viz. Daddy, my father! dear father! He reconciles and heals anything he touches. He is the divine balm that heals the deep wounds of the soul, by getting where no psychoanalysis can get. The Church addresses him this prayer: ‘Heal whatever bleeds.’ And the heart of many fathers and many children does bleed and needs to be healed. 저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는 전략이나 해결책이 있지는 않지만, 저는 누구에게 이것이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성령이십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성령께서 어디를 가시든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을 내포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개입할 때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새로워지고 새로운 부성애와 효성과 함께 새로운 부자 관계가 생깁니다.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분께서 개입하시면 모든 것은 화해하고 치유됩니다. 그분은 정신분석학이 감히 닿을 수 없는 영혼의 깊은 상처까지도 치유하시는 신성한 향유이십니다. 이에 교회는 성령께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모든 상처난 것들을 치유해 주십시오.’ 많은 아버지와 자녀들의 마음은 상처가 깊고 이에 성령의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What shall we do? First, believe, newly find trust in paternity, which is not only a biological fact, but a mystery and participation in God’s own very paternity. Ask God for the gift of paternity, of being able to be a father. Ask him for the Holy Spirit.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육체적인 아버지뿐 아니라 신비이신 성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새로운 신뢰를 찾아야 합니다. 진정한 아버지가 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선물을 청하십시오. 성령을 보내주십사 청하십시오. Then also strive to imitate the heavenly Father. Saint Paul, after sketching the husband-wife relationship outlines the fathers-children’s relationship as follows: ‘Children, obey your parents in everything, for this is pleasing to the Lord. Fathers, do not provoke your children, so they may not become discouraged.’ (Colossians 3:18-21) 그런 다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본받으려고 노력하십시오. 사도 바오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 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콜로 3:18-21).’ Children should be obedient, but out of filial obedience, not as slaves or soldiers. Anyhow, let us leave the duties of children aside. (We will have other opportunities to talk about them, without even considering that today’s fathers are yesterday’s children and today’s children are tomorrow’s fathers and so the matter concerns everyone). What are fathers asked to do? ‘Not to exasperate their children; in a positive sense, to be patient, thoughtful, without demanding everything immediately, being able to wait for children to mature and to excuse their mistakes. Not to discourage them with continuous reproaches and negative remarks, but rather encourage every little effort they make. To communicate a sense of freedom, protection, trust in themselves, confidence. As God does, when he says that He wants to be for us a ‘stronghold’ and ‘an ever-present help in distress’ (Psalm 46).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되 노예나 군인들과 같지 않고 효성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자녀들의 의무에 대해서는 잠시 잊도록 합시다. (오늘의 아버지가 어제의 자녀이고, 오늘의 자녀가 내일의 아버지이기에 모든 이에게 적용 가능한 사실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들은 무엇을 하라고 하였습니까? 자녀들을 들볶지 말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인내심과 사려 깊음으로 빨리 하라고 재촉하지 않고 자녀들이 성숙하고 자신의 실수를 변호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끝없는 질책과 부정적인 말로 그들을 낙담시키지 않고, 그들이 하는 모든 작은 노력에도 격려합니다. 자유, 보호, 신뢰 그리고 자신감과 같은 감정 안에서 서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산성(피신처)’이 되시고 ‘어려울 때마다 늘 도우시는 분’이신 것과 같이 자녀들을 대해야 합니다(시편 46). I would recommend fathers wanting to know what not do to their children read Kafka’s well-known Letter to My Father. His father had asked him why he was afraid of him, and the novelist answers him with that letter drenched with love and sadness. What he laments in his father is mostly not to have realized the dreadful ‘power’ in good and evil he had upon him. With his peremptory phrase: ‘Not a word of contradiction!’ he had inhibited him so much that he caused him to lose the power of speech. Did he bring back from school a joy, a small child’s feat or a good result? The response was: ‘I have other things to think about!’. (“Other things to think about” meant his work, his shop). In contrast, there are a few rare positive glimpses of what he could have been for his son: a friend, a confidant, a model, the whole world. 저는 자녀들에게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아버지들에게 카프카의 잘 알려진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아버지가 그를 두려워하는 이유를 묻자, 소설가는 사랑과 슬픔에 젖은 편지로 답합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한탄한 부분은 바로 아버지가 아버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두려운 ‘권력’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모순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너무 억제하여 말의 힘을 잃게 하였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어떤 기쁨, 성적, 좋은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저에겐 생각할 다른 것이 있어요’라고 답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다른 것은 그의 작품이나 가게에 관한 것입니다.) 친구, 짝꿍, 본보기, 전 세계 등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One should not be afraid of imitating God the Father literally and say to one’s son or daughter, if circumstances call for that, in private or before other people: ‘You are my beloved child! You are my beloved daughter! Of you I am well pleased!” That is to say I am proud of you, of being your father! If such words come from the heart and at the right time, they have miraculous effects letting a boy’s or a girl’s hearts fly high. And for a father it is like giving birth again to one’s child, with more consciousness. 성부 하느님을 본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 개인적이든 다른 사람들 앞에서든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이다. 너로 인해 나는 기쁘다.’ 즉 나는 너를 그리고 너의 아버지인 것을 자랑스러워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합당한 시간에 마음에서 우러나온다면 이는 자녀들의 마음을 한껏 고양시켜 줄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아버지는 이러한 말을 하여 아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해 줄 수 있습니다. The most important thing to imitate in God the Father is: he ‘causes rain to fall on the just and the unjust.’ God would like us to be better than we are, more generous, but he already accepts and loves the way we are, he loves us in hope. An earthly father also (the same applies to mums too in this case) should not love an ideal son, the one he/she had dreamt of: brilliant at school, polite, successful in everything… He is to love the real child the Lord has given him, appreciate him for what he is and can do. How many frustrations are solved by calmly accepting God’s will concerning one’s children, while of course making every effort in bringing them up. Let me end by wishing all dads who are listening that their children be their joy now and their support tomorrow and their crown in heaven. 성부 하느님께 본받아야할 가장 중요한 점은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에게도 똑같이 비를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더 나아지고 더 너그러워지기를 원하시지만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시고, 희망 안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에 지상의 아버지(이 맥락에서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이상적인 아들 즉 학교에서 똑똑하고, 예의 바르고, 매사에 성공하는 그런 아들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그 모습 그대로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 그 모습 그대로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에게 계획하신 하느님의 뜻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면 자녀를 기르는 동안 발생하는 많은 좌절을 얼마나 잘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아버지에게 자녀가 오늘의 기쁨이 되고, 내일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며, 하늘에서는 면류관이 되길 바라며 오늘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제목 <주님 세례 축일>(1. <주님 세례 축일>(1.9)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루카3,21) '세례의 의미와 삶!' 오늘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주님세례축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세례를 기억하고 세례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는 날'입니다. '세례의 의미'는, 영적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정화'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는, '우리 세례의 근원이며 예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 앞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미리 다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 곧 세례 받으심과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심과 땀 흘리심과 수난과 죽으심은 '우리가 이제와 영원히 사는(부활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죽음과 부활의 예표'입니다. '물의 잠김'은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고, '물에서 올라오심'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신원', 곧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에 대한 분명한 드러남'입니다. 메시아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수님이야말로 '참메시아'요 '참구원자'라는 것이 드러난 '결정적 사건'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3,22) '세례의 참의미(삶)'는, '내가 예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남'입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면서 모두에게 사랑을 베푸신 '예수님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공정과 모두의 구원이라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 당신의 전부를 바치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나의 세례와 그때의 기억과 다짐을 되새기면서, 더 세례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가 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
<연중 제1주간 월요일>(1.10)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하느님의 나라와 회개!'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시고 난 후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그 첫 말씀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어부 네 사람, 곧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1,17)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그리고 이 선물을 위한 나의 회개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회개'는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나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회개는 돌아가는 것, 예수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돌아오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호소에 대한 나의 구체적인 응답입니다. 어제로 성탄시기를 마치고, 오늘부터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연중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묵상하는 시기인데, 특히 모두의 구원을 위해 애쓰신 예수님의 땀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나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합시다! 그래서 지금 여기가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 넘쳐나는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
<연중 제1주간 화요일>(1,11)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마르1,22) '새로운 권위!' 예수님께서 가파르나움에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그곳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1,25)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정확하게 알아본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에 모두 놀랍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새로운 권위'는 어떤 권위일까?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루카4,18)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권위'입니다. 곧 '성령의 힘'이며, 이 힘에서 나오는 권위가 바로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우리는 '육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의 움직임에 따라 몸이 움직여지는 존재입니다. 나는 어떤 영의 움직임에 내맡겨져 있는가? 깨끗한 영인가? 아니면 더러운 영인가? 성령인가? 아니면 악령인가? 우리는 날마다 더러운 영을 몰아내고 깨끗한 영인 성령의 움직임에 내맡겨져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참으로 '성공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1사무1,9-20)는 자식이 없었던 '한나의 간절한 청원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시는 말씀입니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 하면서, 자신에게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도 간절히 청해 봅시다! 성령을 간절히 청합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항상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15,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
손에는 나눔이, 발에는건강이 ,얼굴에는 미소가, 마음에는 좋은생각 가득한 하루!, 네~ 고모님두요 ,사랑합니다, |
<연중 제1주간 수요일>(1,12)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않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마르1,34) '비움 속에 풍요!' 오늘 복음(마르1,29-39)은 열병으로 누워있는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시고, 갖가지 질병을 앓는 사람들과 나쁜 영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고쳐주신 말씀입니다. 요즘 우리의 시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곧 물질적으로는 풍요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한 시대 안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선물로써의 병폐'입니다. 예전보다는 더 풍요 속에 살고는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매우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는 마음이 따뜻하지 못한 때문이고, 마음을 차갑게 만드는 지나친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욕망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욕망은 희망과도 같은 것이어서 좋은 것입니다. 절제된 욕망은 오히려 필요하고 우리에게 적당한 에너지를 줍니다. 하지만 그 욕망이 너무 지나쳐버리거나, 절제되지 못한 끝없는 욕망으로 변질되어 버리면 많은 문제들을 낳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많은 고통들과 아픔들과 질병들 그리고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의 큰 어려움은 우리의 지나친 욕망이 낳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채우기보다 비우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할 때입니다. 지나친 욕망 비우기,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나쁜 영 비우기 등등 '비움 속에 풍요!'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선물'이고, 그분 안에 머물 때 받게 되는 '선물이자 치유'입니다. '마음이 따뜻한 벽난로'가 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1주간 목요일>(1,13)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1,41b-42)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죄인들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자유와 해방이라는 부활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고, 임마누엘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오늘도 내일도 우리 안에서 계속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이 외침을 들으시고, 그를 나병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외침을 거절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런 주님께로 향한 나의 믿음은 어느 정도인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 나자렛 예수가 나의 구세주요 구원자이신 참그리스도라고 믿는 이들은 참으로 많은데, 비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참으로 많아 보입니다. 왜 일까? 나의 믿음이 약한 때문이고, 나의 간절한 호소가 약한 때문은 아닐까?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너무나도 부족함이 많은 우리들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를 간절히 청해야만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고, 하느님의 자비를 간절하게 청합시다! 그래서 다시 깨끗한 영혼, 다시 구원 받은 영혼이 되어 기쁨과 자유와 해방이라는 '부활의 삶'을 살아갑시다! 어제 독서에서 "사무엘, 사무엘아!" 하고 사무엘을 부르신 주님께서 오늘은 "루카야, 루카야!" 하고 나를 부르십니다. 나를 살려주시려고. 그 부르심에 우리도 사무엘처럼,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라고 응답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1주간 금요일>(1,14)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2,5) '나도 천사가 되자!' 예수님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듭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들것에 들어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데,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내려 보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흘리셨을 예수님의 땀과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네 사람의 정성(믿음)을 묵상해 봅니다. 지난 주님성탄대축일 낮미사 때 두 명의 자매님과 한 명의 형제님께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들 모두는 누군가의 끊임없는 관심과 기도 속에서 주님의 인도를 받아 성당에 오게 되었고, 또한 신자들의 기도 속에서 6개월 간의 예비신자 교리를 잘 받고 기쁘게 다시 태어났습니다. 우리 주변을 관심있게 살펴보면 나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이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주님께로 나아갈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천사,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천사가 됩시다! 주님께서는 천사인 나의 믿음을 보시고 너를 살려주십니다. 너의 천사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 모두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땀'이고, 예수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실 '우리의 땀'입니다. 예수님 공생활은 모두의 구원을 애쓰신 예수님의 땀흘림이고, 연중시기는 이 땀을 집중적으로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이 묵상과 함께 예수님처럼 모두의 구원을 위해 땀흘리는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1주간 토요일>(1,15)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 '예수님의 소명!' 오늘 복음(마르2,13-17)은 예수님께서 마태오로 알려진 세관원 레위를 부르시고, 유다인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고 있었던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 주변에는 세리와 죄인들과 같은 약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랐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르2,16)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마르2,17)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어떻게 들려왔습니까? 듣기에 불편한 말씀으로 들려왔습니까? 아니면 기쁨과 희망의 말씀으로 들려왔습니까? 아마도 부족함 없이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의인)에게는 좀 '불편한 말씀으로', 반대로 부족함이 많고 그래서 스스로 죄인이라고 말하는 이에게는 '기쁨과 희망의 말씀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사람들을 살리는 구원에 있고, 이것이 '예수님의 소명'이라는 선포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픈 이들이 많습니다. 육적으로도 그렇지만, 영적으로 아픈 이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만약 지금 내가 그렇게 아픈 사람이라면, 그런 나를 살리러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그분께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나도 예수님처럼, 약한 이들과 아픈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제자, 그래서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는 제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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