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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대림성탄

2021년 성가정 축일Your father and I 네 아버지와 내가

2021년 성가정 축일

Your father and I
네 아버지와 내가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사무 1:20-22.24-28
2독서: 요한1 3:1-2.21-24
복음: 루카 2:41-52
 
성탄절 다음, 첫 주일 전례에서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거행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어떻게 길을 잃었고, 어떻게 성전의 율법 교사들 사이에서 발견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를 전합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이 축일을 제정한 교회의 목표는 성가정이 모든 인류 가정의 모범이자 영감의 원천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정과 평범한 인간 가정의 공통점을 찾기 어려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가여운 피조물일 뿐인 두 분에게 모범을 보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과한 것일까요? 우선,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에는 인간 부부의 독특한 특징인 성적 수준에서의 하나됨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거기에서 성가정의 표본이 결혼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정에 대한 통계 결과는 놀랍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모두가 주변에서 보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뿐입니다. 법적 별거와 이혼이 증가하고 있으며, 가장 무서운 것은 이것이 결혼 초에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결혼 1년 만에 위기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러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한 여성 사회학자는 이것을 사랑의 문맹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성공적 결혼을 위해서는 육체적인 끌림과 성적인 하나됨만이 증명되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고, 자동적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종종 매력은 피상적인 관계, 잊어버림, 배신, 성을 너무 하찮게 취급하는 습관과 연결되어, 부드러움의 단계나, 두 사람의 깊은 관계, 서로의 지인을 위한 시간 할애, 침묵, 눈의 마주침, 상호의 계획은 잊게 합니다.

이러한 결혼 생활이 산산이 부서지는 현실이 놀랍지는 않습니다. 두 사람이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으로 서로 붙어있는 상황을 보고, 우리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들은 침에 갇혀있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결혼 생활이 그런 것입니다.

나자렛 가족의 표본은 젊은 부부에게 결여되어 있지만 오랜 세월 함께 지속할 수 있는 결혼 생활을 이루기 위한 영적 가치, 즉 상호 지식과 존중, 타인의 시각에서 볼 수 있는 능력, 공동의 목적, 침묵의 시간, 그리고 기도를 성장시키는 능력을 강조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마리아가 성전에서 다시 아들 예수님을 발견하자마자 한 말을 다시 묵상해 봅시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너의 아버지와 나'는 간과할 수 있는 사항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고통뿐 아니라 남편의 고통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분은 실로 나와 너의 아버지가 아닌 너의 아버지와 나라고 표현하며 당신보다는 남편의 고통을 먼저 언급하십니다.

결혼을 한다는 것은 1인칭 단수인 에서 1인칭 복수인 우리로 바뀌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되는 그러한 변화가 없다면 부부의 하나됨은 피상적이고 불안정할 뿐입니다. 결혼은 합의나 집을 공유하는 것, 성적인 결합, 그 이상의 것입니다. 이는 가 합하여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의미입니다. ‘... 둘은 한 몸이 되리라.’ 성경에서 말하는 한 몸은 육적인 하나를 넘어서 하나의 인격을 의미합니다.

가끔 저는 결혼하였는지 모르는 어떤 남자를 그리고 어떤 여자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조언이나 의견을 말하기 전에 저는 그들이 말하는 방식에 집중합니다. 그러면 곧 그들의 상태(결혼 여부)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실망하곤 합니다.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도 밝히지 않은 채, 자신의 사생활을 몇 시간동안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항상 , , 를 말하며, 결코 남편과 나또는 아내와 나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의 객체로서 부부가 된 적이 없습니다. 배우자, 연인, 부부라는 단어는 이제 구식 단어가 되어 누구도 반기지 않습니다. 배우자의 라틴어 ‘coniunx’를 사람들은 노예의 한 형태로서 짐을 지우고 같은 멍에에 놓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이미지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소에게 씌운 것이 아니고 인간이 스스로를 같은 멍에를 지기 위해 자유로이 선택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예수님과 마리아의 그림이 있습니다. 어떤 약혼한 연인에게 보여줬더니 이를 청첩장 이미지로 사용했습니다. 수비아코 수도원에서 발견된 아주 오래된 프레스코화입니다. 이는 성 바오로가 말했듯이, 모든 결혼은 궁극적인 표본이신 그리스도와 교회(이 그림에서는 마리아로 표현됨)를 보여줍니다(에페소 5:32). 신랑이신 예수님은 신부의 목에 팔을 두르시고, 신부의 머리는 신랑의 어깨에 기대고 손으로는 섬세하게 신랑을 받쳐줍니다. 이 그림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할 때 어떤 멍에를 메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 멍에는 외부로부터(사회, 교회, 하느님께서 아시는 그 누군가)가 아닌 배우자 자신, 그러니까 그들의 의지에 의한 결합으로 이상적인 멍에이며 이는 쉬운멍에(마태 11:30)입니다. 2세기의 시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마치 신랑의 팔이 신부에게 놓이듯, 나를 아는 자들의 멍에는 이와 같으리라.”

제가 묘사한 그림을 보면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 언제나처럼 여기에서도 남자는 일어서서 강한 자를 표현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기대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군요.’ 이 말은 맞습니다. 이 그림에서 그리스도는 강함을 상징하고 여자인 마리아는 신뢰와 의탁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강해지기 위해서 남자는 여자의 신뢰가 필요하고, 여자는 신뢰할 수 있는 남자의 강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부드러움보다 강함을 우선시하는 것은 죄로 왜곡된 우리의 기준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최상의 강함은 동시에 최상의 부드러움입니다.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의탁과 신뢰에는 강함과 같은 정도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저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 높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를 깨닫게 되는 날, 우리는 인간으로서 굉장히 큰 성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설명한 내용은 결혼한 사람들의 실체를 모르는 사제 또는 수사의 환상이 아닙니다. 저는 그리스도인 배우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종종 3세기초 터툴리안이 그의 아내에게 헌정한 책에 기록한 결혼에 대한 찬가를 기억합니다. “교회가 봉헌하고 확인한 결혼 생활의 행복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천사가 하늘로 이 소식을 전하고, 어떤 아버지가 이를 허락하신 겁니까? 지상에서도 자녀들은 아버지의 동의 없이는 올바르고 합법적인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두 신자는 하나의 소망과 하나의 열망과 하나의 원칙 아래 어떤 섬김의 멍에를 지게 된 것입니까? 둘은 이미 형제자매였고 하느님의 동료 봉사자로서 영과 육에서의 차이가 없습니다. 진실로 그 둘은 둘이면서 하나의 몸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육신뿐 아니라 영 또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고, 경배하고, 금식합니다. 서로 가르치고,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를 지지합니다. 하느님의 교회에 동등하게 머물고, 하느님의 잔치뿐 아니라 곤경과 박해 때에도 함께 합니다. 서로로부터 숨지 않고, 서로를 피하지 않고, 서로를 귀찮아하지 않습니다. 숨겨진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보고 들으며 기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그분의 평화를 보내십니다. 둘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분이 함께 계시며, 악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렇기에 가족은 하나의 가정 교회또는 작은 교회라고 불리우게 됩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로 그 사회학적 조사 역시 긍정적인 면도 보여줍니다. 가족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십대와 젊은이들은 합당한 사람을 찾아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누리길 꿈꿉니다. 저의 말씀이 그 젊은이들의 꿈을 격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마리아,요셉의 성가정 축일>(12.26)
-가정 성화 주간-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2,51)
'사랑의 순종!'
오늘은 성탄시기의 첫 주일인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먼저 가장 작은 단위의 교회인 모든 가정을 기억하면서, 가정 안에 성가정의 모범이신 예수, 마리아, 요셉의 사랑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아파 신음하고 있는 많은 가정교회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의 모습을 본받아,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하느님 은총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는 가정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도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하시기 전까지 약 30년 동안 부모와 나자렛에서 지내셨으며, 그들에게 순종하면서 지내셨습니다.
순종은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순종은 힘에 의한 순종(그것은 '복종')이 아니라, '사랑의 순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 때문에,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는 이 사랑 때문에 서로 순종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에게 순종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합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에게 순종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콜로3,13-14)
서로 사랑합시다!
서로 용서합시다!
그래서 가장 작은 단위의 교회인 가정 교회를 살립시다!
그래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이 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12.27) -가정 성화 주간-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요한20,4)
'사랑의 사도!'
오늘은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는 성 요한 사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뜻깊은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울 장호 느므느므ㅜ축하혀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한 명인 요한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이고, 야고보 사도의 동생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과 요한1.2.3서와 요한묵시록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요한 사도는 "나를 따라 오너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형 야고보와 함께 배와 아버지를 놓아둔 채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 이후 늘 예수님의 중요한 순간에 늘 함께 있었고,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때인 십자가 죽음의 때에도 함께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을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1요한1,1.3)
이 생명과 선포가 바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사도!
그래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4,.16)라고 고백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선포한 사도!
스승이신 예수님을 떠나지 않으면서 끝까지 함께 한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가 전하는 예수님 부활의 결정적 상징인 빈무덤 소식을 전해주었을 때, 으뜸사도인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도착한 사도!

이런 요한 사도를 본받아,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고,
이 사랑을 선포하는 '사랑의 사도'가 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12.28) -가정 성화 주간-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였다."(마태2,16)
'첫 순교자들!'
오늘은 헤로데의 탐욕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된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순교자'는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며,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입니다.

헤로데에 의해 살해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은 '죄의 물듦이 없는 첫 순교자들'입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서만 바라보면 죄 없이 죽어간 아기들의 죽음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전체 안에서 바라보고, 무엇보다도 신앙 때문에 스스로 기쁘게 목숨을 던진 수많은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헤로데의 탐욕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곳곳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탐욕으로 인하여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하고 엄마 뱃속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낙태아들'입니다.

분명 하느님 앞에서 헴 바쳐야 할 '인간의 큰 죄'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1요한1,9: 2,1c-2)
이것이 바로 '성탄의 본질이며, 성탄의 기쁨'입니다.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분께로 나아가,
우리의 큰 죄를 고백하고, 그분의 크신 자비에 힘입어 다시 태어나, 생명을 지키는데 일에 앞장섭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성탄 팔일 축제 제5일>(12.29) -가정 성화 주간-

"(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32)
'봉헌의 의미!'
맏배, 곧 첫아들은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 주님께 봉헌됩니다.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시메온이 성전에서 주님께 봉헌되시는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시메온의 노래(루카2,29-35)'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예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메온은 하느님께서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노래하면서, 그러나 모든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34-35)
시메온의 이 예언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근본 이유이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인 죽음'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1요한2,3-4.6)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신 '주님의 성탄'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너를 위해 '죽는 사랑'을 합시다!
서로가 나의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진심으로 '사랑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성탄 팔일 축제 제6일>(12.30) -가정 성화 주간-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2,37)
'하느님의 은혜!'
'한나'라는 예언자는 세상 적으로만 보면 참으로 가련한 여인입니다. 남편과 혼인하여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 보면 참으로 행복 가득한 여인입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으니 말입니다.

히브리어인 '한나'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은혜'라는 뜻을 지닌 '안나'입니다.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으니,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충만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인 성령 충만함 안에 있었던 한나 예언자는 예루살렘의 속량, 곧 예루살렘의 해방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고 오늘 복음(루카2,36-40)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세상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말과 삶으로 전하는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6-17)
주님의 성탄을 믿고 기뻐하는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도 살고(부활), 영원히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희망을 조금씩 이루어갑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께서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으니, 옛 종살이를 하며 죄악의 멍에에 짓눌려 신음하는 저희를 구원하여 주소서."(본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12.31) -가정 성화 주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1,9)
'한 해의 끝 날!'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미사(송년미사)가 거행되는 '2021년 신축년(하얀 소의 해)의 끝 날'입니다.
올 해도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참으로 힘든 한 해를 보냈습니다. 요즘은 전 세계적으로 더 확산되어 가는 추세입니다. 인구수가 6천7백만 정도되는 영국에서는 12.29 하루 확진자가 약13만명에 가깝게 나왔다고 합니다. 참으로 암울한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감사할 일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보고,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으면서 다가오는 '임인년(검은 호랑이의 해)' 새해를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십니다.
빛은 어둠을 밝힙니다.
어두운 세상과 어두움이 드리워진 인간의 마음을 비추시어 다시 태어나게 하려고, 하느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 사도는 오늘 복음(요한1,1-18)에서 세상은 그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미사 때 본기도입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자의 탄생으로 참된 믿음을 일으키시고 완성하셨으니, 저희를 인류 구원의 샘이신 성자의 지체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오늘 독서(1요한2,18-21)에서 요한 사도는 '지금이 마지막 때'이고,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참빛이신 성자의 지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한 해의 끝 날인 오늘,
나는 '성자의 지체'로 살아왔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적'으로 살아왔는지를 성찰해 보고, 깨끗한 마음 안에서 새해를 맞이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12.31) -세계 평화의 날-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2,19)
'새해 평화 많이 받으세요!'
오늘은 2022년 임인년 새해 첫 날이자,
교회 전례력으로는 의무대축일인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제55차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2022년 한 해는 보다 더 영과 육이 함께 건강하시고,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평화가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의 결정적 모범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하느님의 자녀요 상속자답게',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하느님 아버지 뜻에 순종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평화'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욱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 219항)

"모든 시대에 평화는 높은 데서 내려오는 선물이며 함께 하는 노력의 결실입니다."
(제55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에서)

평화는 우리의 노력, 우리의 땀의 결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평화, 가정의 평화, 공동체의 평화, 나라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 출발과 그 시작은,
'평화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평화'는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그분 안에 머물 때, 머물려고 노력할 때 결실로써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성모님의 겸손 너그러움 곰곰이 되새김****으로올한해 함께 살아가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