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주님 공현 대축일 They departed for their country by another way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1독서: 이사 60:1-6 2독서: 에페 3:2, 3ㄴ, 5-6 복음: 마태 2:1-12 성 아우구스틴은 주님 공현 축일이 막 전례에 포함되었을 때 강론을 통하여 주님 공현 축일의 내용과 이의 성탄절과의 관계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얼만 전에 우리는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분께서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계시를 주님의 탄생과 같은 엄숙함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퉁이돌이시며 할례와 무할례라는 두 벽의 차이를 평화로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이 일치는 유대인인 목자(양치기)들과 이방인인 동방박사들을 통하여 예표되었습니다. 유대인인 목자들은 천사들의 소식으로 이방인인 동방박사들은 별을 통하여 인도되었습니다. 이에 오늘 우리는 교회의 보편성, 믿음에 대한 이방인의 초대와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깊은 일치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동방박사에게 나타난 별은 하느님의 영광을 의미하는 ‘하늘의 찬란한 언어’였습니다. 후대에서는 이러한 지위를 복음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오늘날의 복음도 세계 만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초대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이교도의 세계에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별과 같습니다. 이제 베들레헴의 동방박사에 대한 복음을 자세히 살펴보고 여기에서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찾아봅시다. 이 이야기에는 분명 역사적 요소와 신학적 그리고 상징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복음사가들은 ‘사실’만을 기록하고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할 일’을 주장하여 독자들이 본보기로 삼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성경 전체가 그렇듯이 이 이야기도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예수님 탄생 선포에 대한 세 가지 다른 반응, 즉 동방박사, 헤로데, 그리고 수석 사제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피해야 하는 부정적인 모델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먼저 헤로데 임금입니다. 예수님 탄생에 대해 들은 헤로데는 이 말을 듣자마자 ‘깜짝 놀라며’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습니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고 음모를 꾸미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예수님을 찾으면 돌아와서 본인에게 보고해달라는 말에 드러났습니다. 그의 계획은 동방박사를 메신저(소식을 전하는 자)에서 스파이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헤로데는 이미 모든 선택의 결정을 내린 사람을 대표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자신의 뜻 사이에서 그는 분명 후자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이나 그분과 관계되는 것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보에만 관심을 가지고 국제 가톨릭 은사 쇄신 봉사에 위협이 될만한 것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감동 받았지만, 성 아우구스틴이 말한 대로 ‘하느님의 적이 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뿐입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왕족과 국가의 이익을 수호하는 의무를 다하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조차 역사상 다른 독재자들과 같이 공익을 위하여 필요하고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조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오늘날에도 헤로데와 같은 자가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의 공현(나타나심)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이 멀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보고 싶지 않기에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은총의 기적만이 그들(다행히 많은 사람들)의 자기 중심성을 깰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교회에 다니고 복음을 듣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경우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수석 사제들의 태도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헤로데와 동방박사가 그들에게 메시아가 어디에서 태어날지를 묻자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그들은 메시아가 태어난 곳을 압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처럼 서둘러서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성 안의 그들의 집에서 편안하게 지냅니다. 성 아우구스틴의 또 다른 주님 공현 축일 강론에서 말했듯이 그들은 이정표의 역할만을 합니다. 그들은 길을 보여주지만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는 태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필요하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끝까지 실천할 용기와 적극성이 부족합니다. 그 위험은 우리 사제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말했듯이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같은 태도는 반성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유대 고을 가운데 가장 작은’ 베들레헴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늘날에도 가난하고 겸손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축제의 주인공인 동방박사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들은 언어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서,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 자신이 경험 안에서 평소 그들이 즐겨 의미 부여를 하던 것, 하늘을 바로보는 습관을 통하여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들은 기다리지 않고 바로 길을 나섭니다. 안전환 환경과 자신이 알고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들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 것처럼 아주 단순히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보고 왔습니다.’ 여기에서 익명의 성경 기록자들의 위대한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들에게 닥칠 위험을 하나하나 계산하였다면 그들은 초심을 잃고 헛되고 무익한 결론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즉시 움직였고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감을 쟁취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들은 바로 국제 가톨릭 성령 쇄신 봉사 신앙을 따른 첫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브라함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히브 11:8)’ 고국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말씀만을 의지하여 떠났습니다. 그들은 ‘그분께 경배하기 위하여’ 떠났습니다. 성탄절의 맥락에서 이 단어는 심오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마태오 사가에게 매우 명확하게 와 닿았을 것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동방박사들은 ‘경배하다’의 의미하는 바를, 즉 ‘프로스키네시스(무릎을 꿇고 찬송하고 경배함)’를 수행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고 최고의 경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로지 왕에게만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동사가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사용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는 암묵적이지만 분명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최초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동방박사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진정한 경건함에 움직인 것입니다. 그들은 지식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헌신과 순종을 표현하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예배나 경배는 하느님께만 드리는 경의입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공경하고, 찬양하고, 축복하지만 그분을 숭배하지는 않습니다. 경배는 우리가 세 위격에만 드리는 영예입니다. 경배는 모든 힘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종교적인 마음입니다. 모든 종교 생활의 기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피조물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를 너무 가볍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령, ‘나는 낚시를 경외한다. 나는 나의 강아지를 경외한다.’와 같이 말입니다. 그들은 한낱 피조물인 사람에게도 이런 표현을 씁니다. 물론 이것을 죄라고 명명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종교적 민간성이 부족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동방박사가 집으로 들어가 그분의 어머니의 품에 있는 아기에게 경의를 표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우리는 성체 안에서 우리 마음 깊은 곳의 영과 정성을 다하여 경배할 수 있습니다.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방박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이 단어의 의미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지만, 서사의 웅장한 어조를 감안할 때, 이 안의 상징적 가치를 찾아보는 것은 적절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같은 길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삶이 변화하면서 길도 달라집니다.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돌아감을 결정하는 것이고 습관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왔던 길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어떤 것, 적어도 우리의 믿음과 삶의 목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오늘 주님 공현 축일에 하느님의 말씀 안에 우리는 세 가지 유형의 인물을 보았습니다. 삶의 서로 다른 선택을 하는 헤로대, 수석 사제, 그리고 동방박사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삶을 닮기를 원합니까? 동방박사는 길을 떠나며 넘치게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집 안에서 편히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누려보지 못할 기쁨입니다. 성 아우구스틴이 강론에서 사용했던 구절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과 진리를 선포하였으며 복음과 같이 국제 가톨릭 성령 쇄신 봉사회는 하느님의 별과 같이 빛을 내며 그리스도를 경배하게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왕이자 제사장으로서 인정하고 찬미하며 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것은 그분의 복음을 전하며 우리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로 떠나는 것입니다. |
<주님 공현 대축일>(1.2)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2,2) '공현의 삶!' 오늘은 세상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태어나신 빛이신 주 그리스도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공현대축일'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려온 유다인들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시고, 이방인이요 이민족인 동방 박사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유다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서, 유다인들 만에 그리스도가 아니라, 모든 민족들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이사60,1.3)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에페3,6) 동방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의 인도를 받아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 경배드리고, 보물 상자를 열어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립니다. '황금'은 예수님께서 '왕 중의 왕'이심을, '유향'은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몰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는 '우리의 희생제물'이심을 상징합니다. 우리도 동방 박사들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드리고, 그분께 합당한 예물을 드립시다! 합당한 예물,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받으시고 기뻐하실 예물은, 바로 '우리의 삶인 공현'입니다. 곧 '나의 삶으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1.3)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 '예수님의 땀!'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 사가가 전하는 예수님 공생활 시작과 그 활동에 관한 말씀'(4,12-17.23-25)입니다. 그 시작의 첫 말씀은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에 복음을 선포하시며,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말씀입니다.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공생활은 '모두의 구원'인 '너를 살리는 일'이었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이 일에 충실하셨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모든 이들, 성직자들, 수도자들, 신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하겠다고, 그래서 지금 여기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독서(1요한3,22-4,6)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4,1) 사도 요한의 이 권고는,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인,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의 영인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행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적의 영인 악령'에 의한 움직임인지 한번 잘 살펴보라는 권고입니다. 우리는 하루의 삶 속에서 많은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합니다. 그리고 너보다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너를 쉽게 판단하거나 심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1요한4,6) 나 자신과 우리나라와 그리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서, 하느님께 속한 사람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1.4)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6,37) '나눔의 기적!' 오늘 복음(마르6,34-44)은 '오병이어의 기적', 곧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입니다. '빵의 기적'은 네 복음서에서 모두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중요한 일 중에 하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배고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세상이 배고파하고 있고, 하느님의 피조물들이 배고파하고 있습니다. '빵의 기적'은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이며, 이들의 배고픔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큰 표징입니다. '빵의 기적'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너를 향해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야 하고, 이 나눔을 통해서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빵의 기적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4,3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4,7.10) 나눔은 이 사랑에서 나오고, 이 사랑은 나눔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몸이 아픈 이웃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아픈 이웃들이 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마실 것과 머무를 곳이 없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됩시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1.5)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마르6,48) '다가오는 사랑!' 맞바람이 불어오는 호수 위에서 노를 젓느라 애를 쓰고 있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어 그들 쪽으로 가십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향해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며 겁에 질려 비명을 지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6,50)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두려워 한 이유를, 그들이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기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빵의 기적은, '불가능이 없으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맞바람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맞바람'은 나를 향해 정면으로 마주 불어오는 바람으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장애물'이며, 지금 내가 처한 '힘든 상황'입니다. 그리고 맞바람 앞에 놓여있는 나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하느님의 사랑을 잘 받아들이고 있는 마음인지? 아니면 제자들처럼 겁에 질려 두려워하는 마음인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4,16.18) 나를 향해 다가오는 하느님의 사랑을 기쁘게 잘 받읍시다! 그리고 이 사랑의 힘으로 내 앞에 놓여있는 장애물과 힘든 상황을 잘 이겨냅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1.6)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 '하나된 사랑!' 우리의 신앙이 맹목적, 형식적, 광신적인 신앙이 되어서는 안되고, 매우 '구체적인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선포하시는 말씀의 핵심 메시지는 '우리의 신앙이 아주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먼저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루카4,14-22ㄱ)은,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이 선포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며, 또한 우리가 살아야 할 구체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18-19) 그리고 오늘 독서(1요한4,19-5,4)에서, 사도 요한도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4,20) 하느님을 사랑하겠다는 사람들은 그 숫자가 크지는 않다하더라도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 자리 잡고 '개인이기주의' 때문은 아닌지?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계십니다. '믿음의 힘인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된 사랑'을 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1.7)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5,13) '믿음으로!'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의 공생활은 아주 구체적으로 '주님의 은혜로운 해인 희년(기쁨)을 선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 모습으로 전해지는 것이 오늘 복음인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말씀'(루카5,12-16)입니다. 나병인 한센병이라는 것이 지금은 전염병도 아니고 사회적 인식도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전염병으로 알려져 있었고, 사회적 인식도 매우 안 좋아서 격리된 특정 지역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이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병은 나병만이 아니라,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받은 '소외라는 또 하나의 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나병을 치유해 주시고, 소외의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가 다시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어 정상적인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그에게 주어진 큰 기적의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회로부터, 공동체로부터, 너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향해 있는 예수님의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준 말씀이며, 동시에 우리도 '몸과 마음의 나병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나의 관심과 사랑을 전해 주어서, 그들을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5,12)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1요한5,5) 지금 우리 주위에는 몸이 문드러진 나병 환자들도 있지만, 마음이 문드러진 마음의 나병 환자들,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갑시다! 그들에게 나아갑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 새로운 코로나-오미크론(COVID-Omicron) 변종 코로나바이러스는 다르고 치명적이며 올바르게 감지하기 쉽지 않으므로 마스크를 착용하십시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오미크론 바이러스의 증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기침이 없다. 2. 열이 없다. 통증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3. 관절 통증. 4. 두통. 5. 목의 통증. 6. 상체 요통. 7. 폐렴. 8. 정상적인 상황에서 식욕이 없음 물론 코로나-오미크론의 독성은 델타 변종보다 5배 더 높고 사망률도 델타보다 높다. 질병이 극도의 중증도로 진행되는데 시간이 덜 걸리고 때로는 명백한 증상이 없습니다. 더 조심합시다! 이 바이러스 균주는 비인두 부위에 침착되지 않고 폐, 즉 "창"에 직접 영향을 미치며 지속 시간이 비교적 짧습니다. 코로나-19 진단을 받은 몇몇 환자들은 결국 발열과 통증이 없는 것으로 진단됐지만 엑스레이에서 가벼운 흉부 폐렴이 발견됐습니다. 코로나-오미크론에 대한 비강 면봉 검사 결과는 일반적으로 음성이며 비 인두 검사의 위음성 사례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이러스가 지역사회로 확산되어 폐를 직접 감염시켜 바이러스성 폐렴을 일으키고 급성 호흡압을 유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왜 코로나 -오미크론이 매우 유해하고 바이러스가 매우 독성이 있으며 치사율이 높은지를 설명합니다.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고, 열린 장소에서도 6 피트 /1.5m 거리두기, 이중 마스크 착용, 적절한 마스크 착용, 모두 증상(기침, 재채기)이 없을 때 손을 자주 씻으십시오. 이 코로나 오미크론 물결은 코로나-19의 첫 번째 물결보다 더 치명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우 조심하고 *코로나바이러스 예방*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
오미크론 조심하겠습니다, 고모님께서도 조심하셔요 싸랑합니당 화병과 꽃이 온화하고 부드럽고 친밀하고 좋아요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1.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뿐이다."(요한3,28) '파견된 사람들!' 오늘 복음(요한3,22-30)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모두의 구원이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지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파견되셨습니다. 자신을 신랑이신 예수님의 친구로 비유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증언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29-30)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 모두의 구원이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지니고 이 세상에 파견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이어 파견된 우리들! 파견되었다는 것은 파견한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파견된 사람들은 먼저 항상 겸손한 자세로 파견한 분의 뜻과 파견한 분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늘 기억해야 하고, 그것을 실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수많은 성인성녀들'께서 그렇게 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3,27) 우리도 '파견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러니 '항상 겸손하게 그리고 기쁘게'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충실하게 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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