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사의 은혜/연중시기

그리스도왕 대축일 . “당신의 숨을 내보내시면 그들은 창조되고 당신께서는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Send your Spirit, Lord, and renew the face of the earth!).”

세상은 여전히 성령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사도 2, 1-11
2독서: 로마 8, 8-17
복음: 요한 14.15-16.23-26

부활절 저녁 다락방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20:22).’ 예수님의 이 숨은 창조 때에 불어 넣으신성부 하느님의 행위를 기억하게 합니다.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이 행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께서 첫 피조물에 생명을 주신 것과 같이 성령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신성한 숨이라고 말씀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당신의 숨을 내보내시면 그들은 창조되고 당신께서는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창세 104:30).”

성령께서 창조주이심을 선포하는 것은 그분의 활동 범위가 교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생생한 현존은 모든 시간과 장소에 걸쳐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성경 안에서 그리고 성경 밖에서 행동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리스도 이전에, 그리스도의 때에, 그리고 그리스도 이후에 활동하시지만, 그리스도와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누구든 진리를 말한다면 그것은 성령에서 오는 것입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물론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영의 활동은 교회 안에서나 성사 안에서의 활동과는 같지 않습니다. 밖에서는 능력()으로, 안에서는 인격적 현존함으로 활동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창조적 능력의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하거나 그 결과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창조주로서 체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를 알아보기 위하여 창조 이야기를 확인해 봅시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1~2).” 우리는 영이 개입하셨을 때 이미 우주가 이미 존재하였지만, 여전히 꼴을 갖추고 있지 못하고 어둠, 즉 혼돈의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가 구체적인 꼴을 갖추게 된 것은 그분 행동의 결과입니다. 빛은 어두움으로부터, 육지는 바다로부터 갈라지고, 만물은 일정한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혼돈(chaos)의 세계에서 우주(cosmos)라는 질서로 피조물을 옮기시는 분, 아름답고 질서 정연하며 깨끗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우주(cosmos)’의 어원은 코스메틱(화장품)과 같아서 아름답다라는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이 단어의 두 번째 의미에 따라 세계를 만드십니다. 오늘날 과학은 지금의 생명체는 수십억 년 동안 진화를 통하여 완성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하고 창의적인 언어로, 생명을 완성한 느린 진화와 세계의 현 질서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연한 물질의 과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그 안에 두신 내적 계획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활동은 한처음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항상 창조의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활동하시면 항상 혼돈에서 우주로, 즉 무질서에서 질서로, 혼란에서 조화로, 무형에서 아름다움으로, 노년에서 젊음으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이는 모든 수준에서 이루어집니다. 거시적인 차원에서도 미시적 차원에서도, 같은 이치로 온세상에서도 한 명의 인간에게도 이루어집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관계없이 성령께서 온세상에서 활동하시고 새롭게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물리적인 영역뿐 아니라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에서도 얼마나 많은 새로운 발견들이 있었습니까! 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에서도 성령께서 세상의 사회 질서의 진화를 이루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악이 활동하는 것과 같이 선 또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악은 파되되고 그 자체로서 멸망하는 것과 달리 선은 성장하고 우리 곁에 남습니다. 물론 도덕적,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우리 주위에 계속 존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하느님의 영을 너무나도 필요로 하고 있기에 우리는 다음 시편의 말씀으로 끝없이 그분께 간구해야합니다. 당신의 숨을 내보내시면 그들은 창조되고 당신께서는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Send your Spirit, Lord, and renew the face of the earth!).”

 
그는 내 아들이기도 하지만, 만민의 아들, 내 스승, 내 주님이십니다!


오랜 준비 끝에 드디어 공생활을 위해 출가하신 예수님, 그리고 나자렛에 남아 계셨던 성모님, 두 분은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몸과 마음은 언제나 일심동체, 하나였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셨듯이 성모님의 머릿속은 온통 아들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특별한 음식을 드실 때는 머릿속에 즉시 예수님 얼굴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끼니나 챙기며 다니나? 걱정이 앞섰을 것입니다.


오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나, 식사나 제때 하고 다니나? 춥지는 않을까? 어디 아픈 데는 없을까? 성모님의 안테나, 주파수는 오로지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성모님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마리아! 큰일 났습니다. 아드님 상태가 꽤나 심각한 듯합니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합니다. 유다 세력가들과 맞짱을 뜨는 것은 보통이고, 헤로데를 비롯한 고위층의 심기를 거스르는 발언들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제 명대로 못 살겠는데, 어쩌죠? 우리가 가서 데리고 와야 하지 않을까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성모님은 형제들(아마도 사촌, 팔촌 형제들)을 앞세워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문밖에 나와 있는 사도에게 면회를 신청했습니다.


결과는? 놀랍게도 문전박대였습니다. 어머니가 오셨다고 분명히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와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한술 더 떠 하시는 말씀이 성모님에게는 엄청난 상처가 되었음일 분명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복음 12장 48절, 50절)


나자렛으로 돌아오는 길에 성모님께서 느끼셨을 비참함이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문전박대로 인한 수모와 상처는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예수님 입에서 나온 정말이지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마음에 담고 또 다시 성찰과 숙고를 시작합니다. 지금은 비록 내 귀가 뚫리지 않아서 이해를 제대로 못 하지만, 기도하고 또 기도하다 보면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순간이 올 것을 확신하며, 또다시 깊은 침묵 속에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 평생의 노력 끝에 마리아의 신앙은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순간 위대한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내가 낳은 아들이지만, 내 안에 가둬두어야 할 아들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주님을 위해, 주님의 백성을 위해 부단히 내어드려야 할 아들, 정말 아쉽지만, 떠나보내 드려야 할 아들입니다. 그는 내 아들이기도 하지만, 만민의 아들, 내 스승, 내 주님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종말을 걱정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부터 영원을 살고자 노력합시다!


지금에야 종교 자유 시대를 만끽하며 살아가지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예수님 이름 때문에 권력자들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미움과 적개심과 박해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주님께 최우선권을 드린 이유로 부모도 뭣도 모르는 불효자로 낙인찍혔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대역죄인, 사형수라는 타이틀이 뒤따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굴비 엮듯이 줄줄이 엮여 법정으로, 감옥으로 끌려갈 때, 길가에 나와선 사람들은 마치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듯이 바라보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살아생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을 지상 최고의 행복으로 여긴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삶과 죽음을 초월했습니다. 주님으로 인한 고통과 시련의 강도가 커져갈수록, 이 세상 너머의 또 다른 주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더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주님 나라에서 누릴 행복으로 충만했습니다.


극심한 고통이 삶을 휘감을 때면 그들은 주님께서 남겨주신 희망과 구원의 말씀 머릿속에 떠올리며 힘을 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복음 21장 17~19절)


안 그래도 요즘 머리카락이 왕창왕창 빠져나가 걱정이 태산인데, 주님께서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시니, 마음에 세상 편안해지고 따뜻해집니다.

종말에 관한 복음을 읽으실 때 마다 많은 분들께서 걱정들을 하십니다.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고, 이윽고 종말이 다가올 것이라는 경고성 말씀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내린 결론은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철저하게도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자나 깨나 그분께서 생각하시는 고민 한 가지는 우리 모든 인류의 구원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의 영혼 구원을 위해 늘 노심초사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안개 속 같은 다음 세상 역시 그렇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 세상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 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세상임에 확실합니다. 이 세상보다 훨씬 하느님 사랑이 충만한 세상이 확실합니다.


다음 세상을 걱정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부터 영원을 살고자 하는 각오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부터 천국을 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바로 지금 내 안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더 시급합니다.


종말은 오랜 기다림의 완성입니다. 열심히 달리고 달린 사람들, 최선을 다해 노력한 사람들에게 표창장이 수여되는 은총의 순간이 종말입니다.


하루하루를 충만히 살아온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의 순간 머리카락 하나 잃지 않을 것이고, 인내와 수고의 보답으로 영원한 생명이 상급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우리의 목숨은 하루하루 주님의 손길에 맡겨져 있습니다!


다사다난했던 이 세상, 마치 한순간 가슴 설레던 소풍 같던 이 세상에서의 여행을 끝내고 떠나시는 분들의 마지막 모습이 참으로 천차만별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모습은 미처 준비되지 못한 분들의 죽음입니다. 살아생전 그저 죽음은 아직 내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려니, 아직 멀었으려니, 생각했던 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것을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전혀 준비되지 못하다 보니 끝까지 죽음을 거부하고 도망가다가 마지못해 맞이하는 죽음, 떠나기 싫어 죽기살기로 발버둥치다 맞이하는 죽음은 너무나도 불행한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죽음을 바라보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마음 역시 한없이 스산하고 찹찹합니다. 그들에게 역시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요, 극심한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끔 완벽하게 준비된 죽음을 바라봅니다. 그런 분들에게 죽음은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선물이요 기쁨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더 큰 빛을 보기 위한 작은 빛의 소멸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통해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매일 죽을 것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날마다 일어나면서 저녁때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저녁에 잘 때면 아침까지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의 생명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숨은 하루하루 주님의 손길에 맡겨져 있습니다.”(성 안토니오)


“사랑하는 하느님,
저는 모릅니다.
당신이 저를 어디로 이끌어 가실지를,
저의 다음날이
저의 다음주가
저의 다음해가
어떻게 될지 정말 모릅니다.

손을 펴려할 때,
당신이 제 손을 잡고
당신 집으로
이끌어 가시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사랑에 감사합니다.”(헨리 나웬 신부)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금산성당 조경 전정하러 갔다 신랑이랑  차암 행복했다.
지상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천상의 일도 생각해야겠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특징 중 가장 우세한 것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백성들도 잘 이해할 정도로 쉽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다양한 비유나 예화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지역의 주변 환경과 자연 현상들도 자주 활용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무화과나무도 포도나무와 더불어 근동 지방의 주요 나무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잎이 돋고 지는 것을 통해 종말, 주님의 날을 잘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역시 시골에 살면서 주변 자연 현상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실생활에 적극 활용하는 편입니다. 개구리가 합창하면 곧 비가 오겠구나, 하며 이런저런 대비를 합니다. 아침 해무가 자욱하면 날이 낮에는 햇빛이 창창하고 덥겠구나, 생각합니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은 물고기들도 불안해져 입질을 제대로 하지 않으니, 애써 출조를 하지 않습니다. 폭우가 내려 흙탕물이 바다로 유입되면 아무리 물때가 좋더라도 돌게나 골뱅이들이 모래 깊이깊이 숨어버리니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자연의 징조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치밀하게 관찰하고 대비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주님의 날에 대한 준비는 소홀한 저를 향한 예수님 말씀이 날카롭습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복음 21장 29~31절)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는 표징들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 삶을 다시 한번 정리정돈해야겠습니다.


지상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천상의 일도 생각해야겠습니다. 세속적인 것은 조금씩 줄이고, 천상의 것들, 정신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을 늘려가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활양식을 갖추도록 준비해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루 온 종일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지나칠 정도로 엉뚱한 것들,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정작 가장 중요한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단 한치 눈앞의 이익이나 재미에 온 신경이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기도로 하느님께 몰입하면 매 순간이 기쁨과 감사의 성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말, 그리고 어쩌면 또 다른 종말인 우리 각자의 죽음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를 집약하고 또 집약하셔서, 딱 한 문장으로 만들어 건네십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복음 21장 36절)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루 한 번씩, 일주일에 한 번씩 깨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늘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권고 말씀을 두고, 그럼 대체 언제 자고, 언제 일하고, 언제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해결하라는 것인가?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밥도 먹지 말고, 사람들도 만나지 말고, 일상의 삶을 포기하며 살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삶을 기도화하라는 말씀입니다. 일상을 기도하듯이 해나가라는 것입니다.


가족들의 아침 식탁을 준비하는 어머니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식탁을 차리는 것이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의무감에서 억지로, 마지 못해 식탁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기쁜 얼굴로, 식사를 하게 될 가족들 한명 한명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들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준비하면, 그곳이 곧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잠자리에 들 때, 아무 생각 없이, 아니면 잔뜩 취해서 주저리주저리 술주정을 하면서 잠자리에 드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성찰하고 감사하면서, 성모송이라도 한번 바치고 잠을 청하는 것이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갑작스레 난데없이 닥쳐온 큰 고통과 시련 앞에서도 절대 낙담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노력하며, 고통과 시련을 통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곧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나타나는 것을 매 순간 볼 줄 안다면,
우리 마음이 갈망할 수 있는 모든 것도 거기서 얻게 된다.
현재는 늘 무한한 보배로 가득 차 있다.
기도로 하느님께 몰입하면 매 순간이 기쁨과 감사의 성사가 된다.
그 순간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을 사랑으로 수용하면 성사가 이루어진다.
현 순간의 관상을 받아들이고
기도 중에 정직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대면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갈망을 채워주신다.
마음은 많이 사랑할수록 많이 갈망하고,
많이 갈망할수록 더 많이 받는다.”(장 피에르 코사드)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